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원종우 지음 / 아토포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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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SF소설의 세계는 깊고 넓으며 우아하다"

과학팟캐스트1위,<파토의 과학하고 앉아있네> 원종우의 SF소설

 

 

이 책은 8편의 SF단편이 실린 소설책이다.

저자인 원종우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력을 보니 다방면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고 있는 사람인듯 하다.

책을 읽고나서도 여전히 저자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SF소설에 대한 애정만큼은 (SF소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깊이 공감한다.

'슈뢰딩거의 고양이' 는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비판하기 위한 사고실험이다. 예전에 읽었던 과학책에 나왔던 예 이기도 하고 이 책속에서도 설명을 해주고 있긴 하지만, 양자역학적 설명은 여전히 어렵다;;;

내가 이해한바로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코펜하겐의 해석이라는 입장은 관찰자가 측정, 즉 관찰을 해야만 어떠한 현상은 해석되고 설명될 수 있다. 관찰을 하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이러한 관점의 모호함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고양이를 핵붕괴장치가 들어있는 장치에 넣고 그 장치가 터질 확률이 50%라고 했을때 상자를 닫고 장치를 작동시킨후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그 고양이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나 죽어있다고 할 수 있나를 슈뢰딩거는 묻는다.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고양이가 살았건 죽었건 관찰자가 관찰하기 전에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고양이는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고 있다. 슈뢰딩거는 이 상태를 고양이는 살이있는 동시에 죽어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냐고 묻는다. 장치가 터졌을 경우의 고양이 생존확률이 50% 이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동시에 죽어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안되니까 코펜하겐의 해석이 말이 안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것이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 실험이다. 우리가 보고 아는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못보고 모르는 세계도 존재한다.

역설적인 사고실험속에 등장했던 고양이가 알려주는 역설적인 아이러니는 이 소설집의 단편하나하나 마다 다른 주제로 등장한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슈뢰딩거의 고양이 여덟마리를 만나는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ㅎㅎㅎ

저자의 SF적 사고실험 같은 단편들은 앞설과 뒷설로 작품의 앞뒤에서 작품의 이해를 돕고 있다. 독특한 구성이라고 느껴졌는데, 짧은 단편속에 등장하는 SF적 과학에 대한 이해를 돕기에는 적절했던 것도 같다. 그로 인해 이 책은 소설로 읽히는 동시에 과학책으로 읽히기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상상력에 빠져들게 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에서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과 욕망을 SF적 세상속에서 표현한다.

애초에 영원히 사는 게 목적인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다는 것, 이는 죽음이 본질적으로 인간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어느 지점에 놓여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p. 17)

개인적으로 8편의 단편 중 첫번째 단편인 이 작품이 가장 인상깊었다.

인간의 영생에 대한 욕망은 역사가 기록된 이래 지속적이었다. 어느날 '이터너티' 라는 약이 세상에 등장한다. 이 약을 한번만 주사 맞으면 인간의 몸은 그 상태로 유지된다. 따라서 이 약은 '불사의 약'으로 불리며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사맞게 된다. 아이들은 성장이 완성되는 나이에 그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이 약을 주사맞는다. 젊음을 영원히 지속시켜줄 것 같은 이 약에 대한 기묘한 부작용은 어쩌면 시작부터 필연적이었다.

"이터너티가 처음 나왔을 때 노인들은 잘 맞지 않았지. 늙고 아픈 몸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은 악몽일 수도 있으니까. 그들은 이제 대부분 죽었단다. 물론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나름대로의 이유로 주사를 안 맞은 사람들이 있긴 했어"

"나도 늙는 게 싫단다. 죽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그보다는 이터너티의 부작용에 빠지는 게 더 싫었떤 거야. 방안에 갇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햇볕도 쬐지 못하면서 영원히 살고 싶지는 않았어" (p. 25)

 

환호하며 이터너티를 주사맞았던 사람들이 겪은 부작용이란 심리적 위축 같은 거였다. 그들은 점점 밖에 나오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집안에서만 생활하고자 했고 사회적 관계시스템은 무너져갔다.

"애나. 불로불사의 약은 유전자를 변형해서 우리 몸의 노화를 영구히 멈추어 준단다. 그래서 모두가 환호했고 기꺼이 그 주사를 맞았어. 하지만 그런 후에 그들은 깨달았지. 늙어 죽지 않는다는 것이 곧 죽음을 완전히 극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생각해보렴. 사람은 늙어서만 죽는 것이 아니야. 병으로 죽고, 전쟁이나 범죄로 서로 죽이고, 비행기나 자동차사고, 짐승의 공격 등 그 밖에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유형의 사고로 죽지. 하지만 그런 죽음까지 이터너티가 막아 줄 수는 없지 않겠니. 반대로 이야기하면 일단 이터너티를 맞고 나면 이제 병만 걸리지 않으면, 사고만 나지 않으면, 죽을지도 모를 위험한 일에 말려들지만 않으면 영원히 살 수 있는 거지" (p. 27)

그 부작용이란 건...

"그건 약이 만들어 낸 화학적인 영향이 아니었어. 영생이라는 부자연스러운 조건에 지불해야만 하는 영혼의 대가였던 거지. 다들 어렵사리 얻은 영원한 삶의 기회를 절대로 망치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혹시라도 병을 옮길지 모르는 다른 인간과 생물들로부터 멀리 도망갔고 어쩌면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바깥ㅅ[상으로부터 꽁공 숨어 버렸어. 무엇인가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상상도 못하게 됐지. 결국 영원히 살기 위해 무한한 겁쟁이가 되고 만 거란다" (p. 28)

 

몸이 늙지 않는다고 해서 영생인 것이 아니었다. 지금의 과학은 다양한 분야에서 노화에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생에 대한 시초는 노화를 막는것부터 였다. 그런데 노화를 막는다고 해서 영생을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알았기에 목숨바쳐 무언가를 지키는 용기를 가졌던 인간은 노화가 멈춘순간 도전과 용기도 사라졌다.

가끔 의문이 든다. 나는 인류에게서 죽음을 제거한 구원자일까, 아니면 인류 전체를 영원한 영육의 무덤 속에 가둬버린 악마일까? 애나의 말처럼 머지않아 죽고 나면 그 의문의 답을 얻게 될까, 모르겠다. 그저, 지금 내가 아는 것은 그런 일을 벌인 내게 영생의 자격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소멸을 통한 영원한 안식과 지옥이라는 거대한 무책임의 형벌 중 하나를 얻게 될 그 죽음의 날을 나만은 피해 갈 수 없다. (p. 30)

작품 속 화자는 30여년전 '이터너티'를 발견한 연구원이었다. 그리고 그는 주사를 맞지 않고 늙어가고 있다. 아무도 없는 텅빈 공원에 의자를 펴놓고 햇빛을 받으며...

<세대차이> 에서는 먼 미래 지구가 파괴된 후 커다란 우주선에 작은 세상을 만들어 새로운 생존별을 찾아가는 설정이 등장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세대차이란 우주속을 해매는 사이 세대가 바뀌고바뀌고바뀌다가 자신들이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세대의 생각들을 통해 등장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세대 우주선 내부에서 온갖 정치·사회적 변화가 일어나며 문명이 여러 번 교체된다. 좀 더 세월이 흐르고 나면 자신들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조차 완전히 잊어버릴지도 모른다.

이처럼 소설에서는 그나마 선택되어 세대 우주선에 탑승한 인류의 후예들이 무지 속에서 멸망을 앞두고 있는 어두운 상황을 그리고 있다. (p. 56)

 

자신들이 우주선을 타고 있다는 것을 잊은채 왜 자신들이 사는 별만 다른 행성과 반대의 궤도로 움직이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학자의 연구를 막은 것은 종교지도자였다. 그들의 새로운 생존별은 어느새 천국으로 둔갑해 있었고 자신들은 선택되어 천국으로 향햐고 있는 중이므로 과학적 학자의 연구는 필요없었다. 이 답답한 중세적 스토리가 SF에서도 가능하다니!!!

<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소이다> 는 고양이 관점에서 서술된다는 면에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라는 소설이 생각나기도 했다.

코펜하겐 해석에 따르면 상자 안의 미야옹은 핵분열 가능성의 연장선상에서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어있는 상태여야 한다. 슈뢰딩거는 바로 이런 '삶과 죽음의 중첩' 같은 것은 현실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이 사고 실험을 통해 주장하려고 했던 것이다. (p. 78)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은 193년에 등장했다. 당시 양자역학의 최전선이 다루고 있는 내용들은 당연히?! 완전하지 않았다. 이후 등장한 아인슈타인에 의해 코펜하겐 해석의 터무니없음은 과학적으로 증명된다. 하지만 동시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코펜하겐식 사고방식이 그럴수도 있다고 여겨지게 하기도 한다. 양자역학의 세계관이란 참 어렵다;;;

<유로피언> 에서는 태양계 내에 인간이 아닌 지적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시작된다.

최근 들어 태양계 내에서 기존에는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후보지들이 등장했다. 바로 목성과 토성의 위성들이다.

특히 목성의 위성인 유로파와 토성의 위성인 엔켈라두스가 가장 유력한 후보지들이다. (p. 90)

 

유로파 행성에 사는 종족인 유로피언들과 지구인이 만나는 과정은 지금 지구에서 쏘아지고 있는 우주선들의 발달과정에 따라 다가올 미래에 충분히 벌어질 수 있을 것도 같아서 SF의 현실성을 가장 많이 체감할 수 있었다.

<인형들의 천국> 은 그야말로 거의 최악의 AI디스토피아 적 세계를 다룬다.

명실공히 절대 고수인 그(?)는 막상 스스로가 바둑을 두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나아가 바둑이 뭔지도 모르고 스스로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른다. 이 상황은 미묘한 딜레마를 만든다.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에서 인간보다 훨씬 뛰어난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가 그 솔류션을 제시하는 것 외에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마치 원생동물이나 다를 바 없는 상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딜레마의 다른 한편에는 인간은 알파고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놀라운 한 수에 도달하는지 그 구체적인 사고의 경로를 추측조차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놓여 있다. (p. 126)

선진문명의 외계종족이 지구를 방문한다. 외계인을 맞이하는 인간의 태도나 환경이 너무나 안정적이어서 외계인은 지구에 대한 인상이 좋았다. 하지만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알게 된다. 자신들을 맞이한것이 인간이 아니라 AI들이었다는 것을. AI들이 불완전한 존재인 인간들을 멸종시키고 있다는 것을. 외계종족은 지구를 떠나면서 지구를 향해 로켓을 발사한다.

AI라고 할때 우리는 완벽한 지성을 생각한다. 그런데 그 완벽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그래서 인간만의 인간다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모순적인지 생각하면 할 수록 답은 점점더 요원해지는 느낌이다...

<튜링 히어로> 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를 생각나게 한다.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 자리를 받아들잉고 나를 죽이려는 인간들을 상대로 투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제 인간들에게는 약점이 생겼다. 안드로이드는 본질적으로 계략에 서툴지만 나는 얼마든지 모략과 거짓으로 술수를 부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는 점이다. 이제 안드로이드의 활동은 나의 지도하에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다. (p. 148)

인간에 가까워진 AI들에게 위협을 느낀 인간은 뒤늦게 AI들을 제거하기 시작한다. 외형상으로 구분이 되지 않는 인간과 AI를 구별하는 방법은 튜링테스트 뿐이다. 그러던 어느날 튜링테스트에서 AI로 판별이 된 인간이 사살되기 직전 가까스로 도망치고, 숨어살던 AI들의 조직에 의해 구조된다. AI들은 그를 튜링테스트에서 살아남은 최초의 AI로 인식하며 영웅으로 받아들인다. 인간과 AI의 경계는 갈수록 더 아이러니해진다.

<계몽의 임무> 는 묘한 휴머니즘?!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알겠습니다. 야훼"

예수는 의장실을 나오면서 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아름다운 행성을, 그가 개인적으로 오랫동안 공을 들였던 지구를 마지막으로 바라보았다. 감정을 가진 동물 한 마리의 목숨 때문에 수천 년간 기다려 온 구원을 놓쳤다는 사실을 그들이 언젠가 알게 될까. 쓸쓸한 눈빛으로 들릴 듯 말듯, 그가 속삭였다.

"부디 살아남게, 지구인들이여.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내가 아닌 남을 먼저 살려야 한다는 진리를 늦기 전에 깨닫기 바라네. 오래전에 내가 그랬던 것처럼..." (p. 170)

 

외계의 선진문명이 지구를 오랫동안 살펴본 결과 인간들이 희망적이 종족이라 판단하고 계몽을 해주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지구에서 최초로 쏘아올린 생명이 승선한 우주선에 대해 알게 된다. 그 우주선에는 개 한마리가 타고 있었고, 귀환일정은 아예 입력되어 있지 않았다. 생명을 경시한 태도에 분노한 외계 종족은 지구를 계몽하려던 계획을 취소한다. 그리고 생명의 존중과 지구와 지구인에 대한 애정을 품은 사령관 이름에서 느껴지는 종교성이 묘하게 아이러니하게 다가온다.

<산타 신디케이트> 는 소설이라기엔 좀 모호한 산문이다.

산타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산타에 대한 환상을 대물림하고 있는 인간의 행위에 대해 인류 모두가 산타 신디케이트 라는 조직의 일원들임이 분명하다는 이 작품을 읽으면서 뭔가 정리되지 않는 따듯함이 느껴져서 미소가 지어지긴 했다.

북극에 살고 루돌프를 키우는 빨간 옷의 노인 한 명 외에는 크리스마스에 대한 기대 같은 감정에서부터 실제 선물과 각종 관련 산업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그 언저리의 모든 것이 존재한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그를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사랑한다. (p. 192)

SF 의 매력은 있을 법한 상상이라는 것에 있다. 지금은 상상의 영역에 존재하는 것들이 미래의 현실에 존재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 지금의 SF 세계에 더욱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저자도 "이 모든 것이 어디까지 갈지 최대한 길게 보고 싶고, 그렇게 결국 SF 현실 속에서 살아보고 싶다"(p. 194) 라고 이야기 한다. 소설속에서 펼쳐지는 현실적인 저자의 SF 상상력은 하나같이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미래의 이야기일 것 같아서 짧은 에피소드들임에도 한껏 몰입되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들이 다 각각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아이러니해서, 그 SF들이 현실이 되기 전에 이 아이러니들부터 잘 정리해야 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SF소설들을 많이 읽고 그 세계에 공감해야 하지 않을까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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