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형
대프니 듀 모리에 지음, 변용란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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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될 운명인 아이는 불어오는 모든 바람에 예민하다"-대프니 듀 모리에

 

 

대프니 듀 모리에(1907~1989) 는 "레베카' 라는 작품을 통해 알게 됐다.

레베카!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로맨스를 그토록 스릴러적 긴장감으로 읽어본적이 있었던가?!

원작 소설에 반해서 보게된 뮤지컬은 더 좋았다. 소설을 읽을땐 남녀 두 주인공의 감정에 푹 빠져 읽었었는데, 뮤지컬을 볼땐 댄버스 부인의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정말 압권이었다.

그 후 대프니 듀 모리에 의 단편집인 이 책 '인형'을 읽게 됐다.

'서스펜스의 여제' '최고의 이야기꾼' 으로 불린다는 20세기 영국의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명으로 일생 동안 꾸준히 작품을 활동을 했다는데, 이제야 읽게 되었다는것이 아쉬웠을 정도로 너무 좋은 작품집이었다.

나는 국내 단편소설을 읽을떄 단편 특유의 난해함?!에 내용 전부를 공감하고 이해하기 어려울 떄가 많았다. 하물며 외국 단편은 더더욱;;; 그래서 외국 소설의 경우 장편이 늘 손에 잡기 편하곤 했다. 하지만 대프니 듀 모리에 의 단편들은 달랐다. 앞이나 뒤가 갑자기 뚝 잘린 느낌의 단편들이 아니라 하나하나 완성된 작품으로 충분한 소설적 재미가 가득했다. 외국 단편집을 이렇게 빠져들어 읽어보긴 또 처음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1926~1932년 사이 그러니까 대프니 듀 모리에의 경력상 매우 초창기에 쓰여진 작품들이다. 공식 작품 연보에 드러난 발표순서가 아닌 순수한 의미의 작품 탄생 순서를 따라 실었다는 열세 편의 작품들은 다 25세 이전에 쓰여졌다는 것인데, 정말 천재적인 작가임에 분명하다. 거의 백여년전에 쓴 작품들이 이토록 현대적일 수 있다니... 애드거 앨런 포 의 단편집을 읽을 떄보다 더 강렬한 서스펜스와 스릴을 느낄 수 있었기에 왜 작가의 이름이 그동안 왜 국내에서 유명세를 타지 않았던 것인지 의아했다. 내가 잘 몰랐던 것일수도 있지만, 여하튼 정말 놀라운 감각을 지닌 작가였다.

거대한 바다는 하얀 포말을 일렁이며 절벽에 부딪치면서 항구 주변의 바위를 휩쓸었고, 그러는 사이 계속해서 불어오는 동풍이 들풀을 쓰러뜨리고 뜨거운 하얀 모래를 사방으로 흩뿌리며 희미한 운무 사이를 휘젓고 다녔고, 초록색 파도는 악마처럼 섬을 제멋대로 뒤덮었다. <동풍> p. 14

그런 섬이 있는지 없는지 알려지지 않은 작은 섬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거센 동풍을 피해 커다란 배가 한 척 정박하게 되고, 그 배의 선원들은 작은 마을에 동풍이 일으킨 폭풍우보다 더 거센 파란을 일으킨다. 하지만

그렇게 낮이 가고 또 다른 밤이 지나고, 또 다른 하루가 밝았다. 태양은 빛나고 바다는 전율하며 부서지고 바람이 불었다. 고기를 잡으러 항구를 떠난 사람은 없고, 땅을 일구는 사람도 없었따. 풀밭은 갈색으로 변해 죽어가고, 몇 안 되는 나무들도 말라서 축 늘어진 이파리를 떨구면서 섬엔 그늘이 없어진 듯 했다. <동풍> p. 20

동풍이 불어 바다에 배를 띄울수 없었던 며칠간, 의문이 범선이 머물던 그 며칠간 마을은 태풍의 눈 속에 있었던 듯 평화로운 것처럼 보였지만, 동풍이 멈추었을떄 마을은 제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들은... "대형 범선은 아침 썰물을 빌려 떠나버렸다" <동풍> p. 24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보자마자 사랑에 빠져버렸다. 하지만 그 여인은 알듯 알듯 없었고 가까워질듯 하면서 멀었다. 그녀의 이름은 리베카.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다. 내 처지가 우스꽝스러웠다. 하지만 나더러 어쩌란 말인가? 그녀는 나에게 하나의 광기, 집착이 되었다. <인형> p. 48

리베카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남자는 느꼈었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대상은 그가 아니었다.

생기도 없고 유리알처럼 고정된 그의 눈은 결코 흔들림 없이 나를 응시했다. 축축한 선홍빛 입술은 비웃음을 머금었고, 매끄러운 검은 머리칼은 뺨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나사로 작동되는 일종의 기계였다. <인형> p. 52

한 성당의 주임 사제인 제임스 홀러웨이는 매력의 결정체 같은 존재였다. 외모도 탁월했고, 목소리는 울림이 있었으며, 매너와 재치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그 자신이 자신의 그 매력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모든 순간 모든 장소에서 모든 일에 대해 자신만만했다. 그러던 어느날 한 요양원에서 설교를 하던 중

"예수님께서 우리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오셨다는 사실을 우린 잊고 있습니다. .. 그리스도처럼 철저하게 인간이셨던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 그분의 감정이 인간의 감정이었음을 가리키는 확고한 증거가 가득합니다. ... 그분의 마지막 외침 또한 인간의 음성이 아니었습니까?" 약간 숨이 가빠진 신부는 말을 멈추었다. 환자들은 확실히 감동을 받은 듯했고 그는 또 한번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먼 구석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화에 전혀 참여하지 않고 있던 심술궂은 얼굴의 노인이었다.

"그리스도는 신의 아들인 걸로 알고 있소" 노인이 말했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고 잠깐이지만 신부는 약간 어안이 벙벙했다.

이윽고 그가부드럽게 말했다. "맞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너무 늦은 대답이었다. 마법은 깨져버렸다. 그는 패배감을 느끼며 그곳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p. 75

 

하지만 제임스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고, 다시 자신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었다.

그는 아름다운 자신의 목소리에 홀딱 반했다. 마침내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최고조의 승리감에 벅찬 음성으로 강론을 마쳤다. 세상은 그의 것이었다. 마지막 손짓과 함께 그는 의기양양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그러므로 이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p. 92

작가는 서스펜스에만 능한 줄 알았더니, 블랙 코미디적 유머감도 훌륭했고 남녀의 심리비교도 탁월했는데,

남자는 어쩌다 특별한 이유 없이 탈출해야 한다는 걸 그녀는 절대 깨닫지 못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외출은 그에게 자유로운 기분을 안겨 주기 때문에 되풀이되었다. <성격 차이> p. 93

하지만 그녀가 분개하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 싶어 했다. 그녀는 그와 따로 떨어져서 무언가를 한다는 걸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묘하게 그의 생각을 읽을 줄 알았다. <성격 차이> p. 94

 

예전에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 라는 책 제목이 상징하는 남녀의 차이점에 대해 비교묘사하는 것이 유행하던 떄가 있었는데... 저자는 이미 단편에서 그 차이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하는 작품을 썼다. ㅎㅎ

그녀는 자신이 혐오스러웠으며, 자신이 한 말을 증오했고, 내심으론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싶었다.

그는 버럭 소리쳤다. 방을 나온 그는 집 밖으로 나왔다. '하지만 내가 하려던 말은 그게 아닌데, 내가 하려던 말은 절대로 그게 아닌데' 라고 그는 생각했다. <성격 차이> p. 107

 

남녀는 아주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 말다툼에서 아마도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듯 하다. 지금의 현실에서도 남녀가 수시로 그러하듯이 ㅎ

한 남자가 7년의 약혼기간을 기다려 사랑하던 여자와 드디어 결혼했다. 이 둘은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둘이 함께 노력하면 미래는 행복이 넘쳐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박하게 떠난 신혼여행 첫날 낭만적인 밤을 꿈꾸며 숲속에 야영 텐트를 쳤다.

하지만 갑작스런 폭풍에 텐트는 주저앉았고, 길가에 세워둔 차는 그 안에 실려 있던 짐과 함께 도난당했으며, 길을 헤매다 결혼반지 까지 잃어버렸다. 그렇게 허름한 여인숙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다음날 서둘러 일자리를 찾아보았는데

"달링, 나 일자리를 찾았어"

"정말 멋지다!" " 나도 일자리를 구했어. 근무 시간은 9시부터 7시까지야"

"설마 진심으로 하는 말은 아니겠지!"

"왜! 뭐가 문젠데?"

"내 근무시간은 7시부터 9시까지. 달링, 난 액튼에 있는 은행의 야간 일꾼이야" <절망> p. 120~121

 

작품 제목이 <절망> 이다. 그런데 읽으며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모른다.

7년을 기다려 결혼했는데, 첫날밤도 함께 하지 못한채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구한 일자리 시간이... ㅍㅎㅎㅎ

한 여자의 독백이 시작된다. 묘한 차림의 이 여성의 외모 묘사로는 어떤 일을 하는지 누구에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처음엔 알 수 없었다.

잘 들어. 잉크 묻은 손가락으로 수첩을 들고 있는 우스꽝스럽고 왜소한 기자 양반, 내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줄 거야.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잘 듣고 당신 입맛대로 인용해서 [일요일 개소리] 특별판에 큰 글씨로 실어도 좋아. 메이지의 고백, [무엇이 나를 이 직업세계로 이끌었는가] <피카딜리> p. 126

의외로 여성은 자신의 사랑이야기를 털어놓는다. 한남자를 너무나 사랑했고, 그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가 하라는 모든 일을 순종적으로 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를 떠났고, 방황하던 그순간 그녀 눈에 띈 것은

"참 나, 신의 계시가 곧장 내 머리 위에 큼지막하게 적혀 있떠라고, 승강장 끄트머리에 불꽃같은 글씨체로 말이야. '피카딜리로 가실 분은 붉은 등을 따라가시오" <피카달리> p. 142

작품 제목을 봤을떄 짐작했어야 했음에도 그러지 못하고 읽었을 만큼 이야기 풀어나가는 솜씨가 탁월했다. 그리고 이 작품은 아마도 피카딜리를 아는 영국인이 읽었을 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을 유머일 것이다.

한 소녀가 오랜 기숙사 생활을 조신하게 하는 동안 어엿한 숙녀가 되었다. 그녀는 어른이 되었고, 많은 일들이 펼쳐질 것이라 기대하며 고향 어머니집에 돌아왔는데, 자신을 맞이하는 어머니의 태도가 전과 같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늘 모녀와 함께 였던 존 삼촌이 있었다.

그렇다. 존 삼촌은 어머니에게 유용한 존재이고 다정했지만, 꽤 나이가 많아서 마흔을 훨씬 넘겼다. 가엾은 늙은이 존 삼촌! 여름에 두 분이 파리를 거쳐 칸에 가는 길에 잠시 들렀을 때 팡시옹에 함께 지내던 친구 하나가 그에 대해서 뭐라고 했더라? "저 사람이 너희 어머니가 키우시는 집고양이야?" 얼마나 근사한 표현인지! <집고양이> p. 146

그녀는 존삼촌이 집고양이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머니가 전과 다르게 딸을 대하듯이 존삼촌도 전과 다르게 그녀를 대했다. 냉랭해진 어머니와 다르게 갑자기 친근감있게 다가왔다.

그는 상기된 얼굴에 다소 흥분한 표정이었고, 영문을 알 수 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손짓을 했다. 그가 말했다. "어서 와라, 즐겁게 지내야지. 고양이가 자리를 비웠을 떄 말이다......" p. 153

결국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것이었다. 복잡하고 사악하기 이를 데 없는 친밀한 관계의 부도덕한 이면. 사랑스러움도 없고 로맨스도 없었다. 그녀도 자기 차례가 되면 이렇게 어머니와 똑같은 가면을 쓴 채 거짓으로 점철된 가혹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집고양이> p. 163

 

아름답고 조신한 숙녀가 되어 집에 돌아와 겪는 며칠 동안 이 어린 숙녀는 곧 깨닫게 된다. 그녀가 꿈꾸던 어른으로 사는 살이 결코 꿈꿀 만한 것이 아니란 것을.

이런 작품을 작가가 25게도 안되던 때 썼다니.. 그시절에도 지금처럼 웃픈 현실이었나 보다.

여성작가라서인지 아무래도 작품들 속에 여성화자가 많이 등장한다. 그리고 여성의 심리를 다양한 측면에서 섬세하게 잘 묘사한다.

메이지 라는 젊은 여성이 있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는 중이지만, 그러한 하루하루가 그녀 본인도 편치는 않다.

"이봐요, 나도 한때는 당신처럼 젊고 예뻤다우, 나한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돈도 넉넉하게 챙겨주는 신사들도 많았지. 그렇게 먼 옛날 일도 아니야. 언젠가 당신도 늙고 추해지면 어떤 심정인지 알게 되는 날이 있을 거야. 그때가 오면 지금 나와 똑같이 당신도 여기 서서 사람들에게 자신을 구걸하게 될걸" <메이지> p. 185

하지만 어느 시대이든 젊은이들은 늘 젊기떄문에 이러한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메이지도 그랬다.

석달간 독일에 출장간 남편을 돌아오기로 한 날 설레는 마음으로 남편맞이 준비를 하는 여성이 있다. 하루종일 행복에 들떠 준비하던 그녀에게 친구의 울음 섞인 전화가 걸려온다. 당장 달려가 친구를 위로해주긴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마음은 둥둥 떠있다.

문가에 서서 그녀가 얼굴을 환하게 빛내며 행복하게 말했다. "괜찮아.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오래가는 아픔은 없다> p. 202

남편이 올 시간이 되어 급하게 떠나며 그녀는 친구에게 위로의 말을 남기지만... 남편이 돌아온지 몇시간이 채 안됐을 떄 그녀는 자신이 했던 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그녀는 남편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에 초조하게 미소를 지었지만, 무언가가 예리하고 작은 칼날처럼 그녀의 심장을 찌른 뒤 이리저리 비틀었고, 그녀의 머릿속엔 그 말이 계속 되풀이해 떠올랐다. "괜찮아,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오래가는 아픔은 없어" <오래가는 아픔은 없 다> p. 211

사람은 늘 정말 한치앞도 모르는 존재다. 그리고 남의 일이 자신의 일이 될줄은 더더욱 예상치 못한다. 저자는 블랙코미디에도 소절이 넘쳐난다.

달려가는 거리가 늘어남에 따라 그의 이마에 빨갛게 햇빛에 화상을 입은 자국이 우스운 모양으로 생겨났는데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남자 역시 그녀가 쓴 베레모 아래로 까만 곱슬머리가 예쁘게 삐져나온 것은 보았지만, 콧등에 두들긴 파우더가 더덕더덕 뭉쳐 있는 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주말> p. 214

그들은 서로 애칭으로 부르며 특별한 언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둘 다 혀짤배기소리를 하며 입술을 삐죽이지 않고는 문장을 맺지도 못했고, 말끝마다 발을 동동 구르며 손뼉을 쳤다. p. 216

 

사랑에 빠졌을 떄 그 순간 상대방의 단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인다. 서로를 유치한 애칭으로 (소설 속에서는 찍찍이 와 까칠이 ㅎㅎ) 부르며 혀짧은 소리를 내는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 보다.

가끔씩 그녀는 남자의 이마에 생긴 일광 화상 얼룩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그는 여자의 콧등에 뭉친 파우더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더 이상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주말> p. 225

그들이 서로 사랑인줄 몰랐을 떄 사랑에 빠져들었듯이, 그들이 서로 사랑이 식인줄 몰랐을 떄 그들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남녀가 함께 한 시간은 불과 단 한번의 '주말' 이었다. ㅋㅋㅋ

그녀가 처음 그 골짜기를 본 것은 꿈속이었고, 깨어나면서 몇몇 장면만 스치듯 떠올랐다가 낮 동안 바삐 지내며 쉽사리 기억이 희미해지고 잊히기를 반복했다. <해피밸리> p. 229

데자뷰를 경험하듯 그녀가 꿈에서 만났던 사람을 만나고 그와 간 곳에서 익숙한듯 낯선 장소를 경험한다. 일종의 시간여행 같은 이 작품은 판타지를 읽는 기분도 느끼게 하는데 저자가 판타지 소설을 썼어도 재밌었을 것 같다.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 라는 작품은 한 남자의 편지로 진행되는 작품인데, 편지를 읽으면서 이 남자가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렸을 떄와 사랑에 빠졌을 떄와 그 마음이 식었을 때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짧은 편지글만으로도 충분이 미루어 짐작이 되었다. 저자의 센스가 정말 감탄스러웠다.

중국에서 보낸 3년이라는 세월은 저의 예절과 대화술을 완전히 망쳐놓았기에 틀림없이 제가 끔찍이도 서툴고 어핵해 보였을 것입니다. p. 248

과도하게 문명화되어 성욕마저 과도한 이 나라에서 벗어나, 플랜테이션의 평화와 안정감 속으로 되돌아기 전까진 난 숨도 쉴 수 없을 듯 합니다.

(B부인에게 남겨진 전화 메시지 'X.Y.Z씨는 오늘 중국으로 출항했음' <점점 차가워지는 그의 편지> p. 274

 

책에 수록된 마지막 단편인 <인생의 훼방꾼> 은 '아전인수'가 무슨 뜻인지 정말 제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그냥 소설을 읽는 것뿐인데도 몰입이 되다보니 어찌나 기가막히던지... 그야말로 헐!

내가 알고 싶은 건 바로 이것이다. 내 인생은 어디부터 잘못되었을까? 온갖 사람들에게 그토록 친절하게, 내가 얼마나 진심을 다해 너그럽게 대했는데 어쟤서 그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나는 전혀 이득을 보지 못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나는 내 자신을 마지막 순서로 두고,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앞세웠다. 그런데도 저녁 시간인 지금 나 홀로 앉아 내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차례로 떠올려보면, 그들의 표정은 전혀 다정하지 않고 어쩐 일인지 쫓기는 듯한 얼굴이다. 하나같이 나를 제거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들은 그림자로 남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의사는 내가 너무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살고 있다면서 수면제를 한 병 주었다. 어제, 또 한 번 진료 약속을 잡으려고 전화를 했더니 반대편 목소리가 말했다. "죄송하지만 야들리 박사님은 휴가중이십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나는 의사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그가 다른 사람 목소리를 가장하고 있었다. 왜 나는 이렇게 불운하고 불행한가?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인생의 훼방꾼> p. 318~319

 

 

ㅍㅎㅎㅎㅎ

처음 시작은 긴장감 쫄깃한 스릴러 작품으로 시작했는데, 읽다보니 스릴러 보다도 살짝 비틀린 유머가 가득해서 여기저기 키득거리며 읽었다. 정말 이런 재미를 느끼게 될줄은 전혀 예상못했는데!

'레베카' 라는 쫀쫀한 로맨스를 읽엇을 떄의 감상을 토대로 비슷한 분위기의 단편들이지 않을까 싶었었는데... 정말 반전 대반전이었다. 마지막 장을 덮었는데도 다음 작품이 또 있었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이 정말 궁금해진다.

외국 작가의 단편집에서 만족감을 느껴본 적 없던 사람이라면 정말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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