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뜨기 마을 - 전태일 50주기 기념 안재성 소설집
안재성 지음 / 목선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는 소설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었다.

6.25를 배경으로 비전향 장기수였던 실존인물의 수기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작품이었는데, 제목그대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삶을 살다간 인물의 삶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한국현대사속 보이지 않았던 장면을 또하나 알게 해준 소설이었다.

그 뒤로 작가의 이름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새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을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작품을 통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을 지속해서 살펴보고 작품화하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마저 다른 곳을 볼 수는 없게 되버렸기에...

이 책은 지난 100년 한국의 놀라운 변화를 주도했던, 그러나 주목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한 민초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단편소설들로 이뤄졌다. 2년간 시사월간지 <시대>에 연재되었던 작품들로, 대부분 본인이나 유족의 직접증언을 토대로 썼다. 따라서 소설의 등장인물과 사건의 줄거리는 모두 실제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며 가독성과 익명성을 위해 약간의 각색만을 거쳤다. (작가의 말 中)

이 책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의 이력을 잠시 찾아보니 노동운동을 오래했었고 지금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듯 하다.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전태일 50주년 기념 소설집'을 엮은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여전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저자 자신의 소개글을 보니 더더욱 작품의 무게감이 진하게 전해져왔다.

그렇다. 무게감... 읽는 내내 잠깐씩 숨을 몰아쉬어야 할만큼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1부에서는 일제치하부터 분단까지의 노동현장을

<이천의 모스크바> 에서는 6.25 전후 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엎치락뒤치락 하는 진영의 갈등을 농부의 시선으로

<두발자전거> 에서는 일제치하 노동운동의 태동과 해방후의 갈등을 방직공장 여공의 시선으로

<달뜨기 마을> 에서는 결혼 후 세상과 사상에 눈을 떠 여맹위원장까지 활동했던 여성의 시선으로

2부에서는 80년대를 전후한 노동현장을

<첫사랑 순희를 찾아서> 에서는 분단 후 혼란스럽던 정치상황을 첫사랑과 엮어 회상하는 노신사의 시선으로

<팬데믹의 날> 에서는 노동운동에 앞장서서 노동자로 한평생 투쟁하는 도중 5.18을 경험했던 여성의 시선으로

<37년 만에 맞춘 퍼즐> 에서는 원풍모방의 여공으로 성장한 노동의식을 여전히 실천중인 여성의 시선으로

3부에서는 불과 몇년 전 혹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에서는 성진노조원들과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작업으로 인한 투쟁의 현장을 겪어낸 노조원의 시선으로

<스무 명의 성난 여자들> 에서는 네임텍 이라는 스티커 회사에서 무시와 멸시 속에 꿋꿋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노조원의 시선으로

<캐디라 불러주세요> 에서는 정식직원이 아니기에 정식노조도 제대로 만들 수 없었던 캐디 노조원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한편한편 읽어갈 때마다 허구가 아닌 실화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하나 전부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소설들이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다가도

변화한 시대만큼 새로운 형태의 착취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푸라기를 쥐던 손으로 계란을 던져 바위를 치다가 돌멩이로 벽을 부수는가 싶더니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조금씩 인정받아 가는 현실은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노동자가 등장한 이후 쌓였던 50년 억압이 전태일 을 계기로 터진지 다시 5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50년 뒤엔 지금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전태일 100주기 기념 소설집을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꼭 그렇게 되길 희망해본다.

나보다 서너 살이나 더 먹었을까, 아주 젊은 검사가 나를 보고는 반말로 이러는 거야.

"고생 많이 했다. 집에 가서 부모님 잘 모시고 농사 잘 지어라"

훈계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 터지는 거라. 저 사람들은 저리 잘나서 남을 때리고 훈계하는데, 나는 하찮고 못나서 여기 붙들려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펑 터져. 내가 무슨 학교 공부를 했어. 집에 전답이 있어? 배운 것도 하나 없고,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알뜰한 가난뱅이라. 그래도 평생 처음 내 주관대로 옳은 일이라 싶어 나섰던 건데, 모질게 두들겨 맞고 수모를 당하고 나니, 진짜 분하고 서럽더라고. (p. 18 - 이천의 모스크바 中)

 

 

지도부도, 선동가도 없는 시위였어. 계엄군에게 잡히면 피투성이가 되게 두들겨 맞고 팬티만 입힌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판이야. 어느 누가 감히 목숨을 버리라고 선동을 할 수 있겠어? 선동가는 아무도 없었어. 모든 게 자발적이었어. 시위에 참여한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었어. (p. 149)

이길 줄 알면서 싸우는 건 용기가 아니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모두들 나선 거야. 수많은 민란들과 동학난, 삼일운동도 그렇게 일어난 거 아니야?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불의한 권력 앞에 목숨 던져 싸우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나는 믿어. (p. 153 - 팬데믹의 날 中)

 

 

"노동조합은 단순히 월급 몇 푼 올리는 단체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게 노동조합이죠.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나 부모는 가르쳐 주지 않지요. 하지만 노동조합을 가르쳐줍니다. 노동조합의 힘으로 공동체가 되어 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겁니다.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p 211 - 37년 만에 맞춘 퍼즐 中)

"우리는 그동안 지는 싸움만 했어요. 거의 항상 졌어요. 그래서 지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승리했네요.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승리를 한 거죠. 제가 만일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다들 소설이니까 거짓말이라고 하겠죠. 소설보다 현실이 더 거짓말 같다고 할까, 저는 지금도 우리의 승리가 믿어지지를 않네요" (p. 253 -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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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국
요스트 더프리스 지음, 금경숙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4월
평점 :
절판


한 히틀러 연구가의 죽음이 촉발한 부조리극,

혹은

사랑하는 스승이자 친구를 위한 긴 고별사

표지 中

 

 

네덜란드 젊은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라는 요스트 더프리스 의 국내 첫 출간 소설.

1983년 생으로 언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고 예술분야 편집장으로 활동중이면서 소설을 발표하고 있는데 2013년 발표한 두 번째 작품 <공화국>으로 플랑드르 지역의의 권위있는 문학상인 황극책부엉이상을 수상한 소설.

사상이 격돌하고 동료와 충돌하는, 지적 싸움으로 가득한 책으로 현재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고 외양과 실제에 대한 새롭고 신선한 접근을 시도한 작품이라는 심사평을 얻은 소설.

이 소설에 대한 배경 설명을 왜 이렇게 길게 하느냐.... 하면...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해보기 위해서이다.

책의 반 이상을 읽었을때 까지도 내가 읽고 있는 것은 그저 글자 였다.

케이

이런식?!

그러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휘몰아치듯 깨달음이 찾아왔다.

BOOK 북

이라고 읽혀졌다는 것을.

읽는 내내 당췌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소설은 처음이라 그런가... 싶다가 또 이해가 안되면 그들의 지적싸움을 나만 이해를 못하는 건가... 싶다가 무엇을 지적하는 부조리극인건가 싶다가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에게 왕과 같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과정을 담은 기나긴 애도였고 슬프디 슬픈 진혼곡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코넬대학교에 있는 브리크의 아파트에서 대화를 나눈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사악한 금발에 훤칠한 미남인 프리소 더포스는 일인 근위대처럼 아래층 부엌에 자리했다. 그는 브리크의 학계 측근 중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동급인 가운데 으뜸인 자'라는 뜻으로 고대 로마 공화정에서의 지도자를 일컫는 말)로서 항상 커피, 차, 또는 브리크가 요구했음 직한 신문이나 기사, 책을 대령한다. "나의 작은 사설 무장친위대"라며 브리크가 미소 짓는다. (p. 35)

네덜란드인인 브리크와 프리소는 미국 코넬대학교에 함께 있다. 브리크는 저명한 교수이고 프리소는 그가 만든 잡지 <몽유병자>의 편집자이다. 그들은 히틀러학에 관심이 많고 다방면에서 비평을 즐긴다. 브리크의 요청으로 프리소가 칠레로 출장을 떠났을 때 브리크는 한 호텔에서 갑자기 추락사 한다. 프리소는 칠레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사경을 헤매느라 그의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가 없었다.

<위대한 독재자>포스터 액자는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럼에도 왠지 나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이 집은 이제는 그의 것이 아니고 낯선 이들의 손을 탔으며, 따라서 그의 존재는 아득히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재회는 내게 덜 개인적이고 덜 '브리크스러운' 것이 되어, 더 가볍고 더 쉬웠다. (p. 61)

프리소가 완쾌되어 돌아왔을 때 브리크는 부재했다. 그가 남긴 것들만 고스란히 존재했다. 하지만 프리소는 그의 부재를 믿지 못하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그저 가볍게 일상처럼 그냥 그렇게 보기만 했다.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뉴욕타임즈>의 말로는, 브리크의 공개 추모식에서 최고조는 놀랍게도 필립 더프리스 라는 네덜란드 연구원의 추도사였다. (p. 71)

그의 이름이 왜 굳이 언급되었을까? 기사에는 그의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았고, 내가 생전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었다. 적어도 <몽유병자>에 그가 글을 쓴 적은 없었다. 도대체 누가 그 사람을 안단 말인가? (p. 73)

"브리크 일 등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네. 추모식에서 당신이 정말 최고였어"

"그건 내가 아니야!"

"확실해? 신문에 났던데!" (p. 106)

"어떻게 생겼던가요?" 내가 물었다.

"손님 또래에, 머리카락 색이 같고, 키도 엇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네요" (p. 129)

 

프리소가 참석하지 못했던 장례식에서 참석했던 모든 이의 관심을 끌었던 필립 더프리스 라는 청년은 프리소 더포스 자신과 비슷한 외모를 가진 브리크의 제자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프리소는 브리크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느끼기 이전에 필립 더프리스 라는 청년의 갑작스런 등장과 관심집중에 격분한다. 알지도 못하는 그 청년의 추도사로 인해 브리크가 왜곡되었다는 듯이, 갑자기 등장한 그 청년이 오랜 세월 함께 한 자신의 존재를 부정했다는 듯이. 그래서 그 청년과의 토론 일정이 예정되 있는 학회 참석을 수락한다.

무슨 목적으로 오셨습니까? 목적? 빈 공항에서 도심으로 가는 길에 택시운전사가 던진 질문은 그 자체로는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학회에는 그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기후 변화, 질병 퇴치, 세계 평화 같은 '중대 사안'을 다룬다면 틀림없이 그렇다 -- 그런데 우리는? (p. 88)

브리크와 프리소의 대화도 그랬지만, 이 학회 참석기간 동안 설명되어지는 상황들은 그야말로 지적 싸움 이었다.

이 학회는 말하자면 히틀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학회였다. 히틀러학이 어찌나 다양한지;;; 린츠의 히틀러학자들, 빈의 히틀러학자들, 철십자훈장 히틀러학자들, 벙커의 히틀러학자들, 바이마르 히틀러학자들, 베를린의 히틀러학자들, 불가피주의자들 등등등... 이런 학자들이 정말 있단 말인가?

그들중 계보학자들은 '히틀러의 정자 세포를 레판토 해전 이전 까지 거슬러 올라가 추적할 수 있게 되었고', 해부병리학자들은 '히틀러의 남성상' 에 대해, 인식론자들은 '히틀러의 서명이 담긴 모든 편지와 모슨 서류'에 대해, 애서가 들은 '히틀러 독서목록'을 만들고, 재봉사들은 '그가 입었던 제복을 죄다 본으로 만들어 정확하게 마름질해 냈고', 이발사들은 '사진을 자료 삼아 그의 수염을 밀리미터 단위까지 정밀한 수치로 재계산해 낼 수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화가, 요리사, 연대학자등 그야말로 거의 모든 분야가 히틀러를 연구하고 있었다. 정말 무지막지하게 지적이어서 그저 혀룰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히틀러 연구학계에는 물론 또다른 부류도 있었다. 갈수록 인가를 끌고 있는 분야로, 사실에는 관심이라고는 없으며 새로 발견된 사실에는 더더욱 관심 없는, 브리크와 나 같은 사람이 속한 그룹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정보가 무슨 소용이냐고 브리크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아는 사람 없는 지식이 무슨 쓸모가 있어?' 누가 보아도 실제라고 여기는 공포 이미지가 어떤 종류의 사실성보다 가치 있고 힘 있다. 중요한 것은, 생각이 어떻게 비옥한 땅을 찾으며 나아가 그 생각이 어떻게 우리의 상상 안에 존속하느냐이다. (p. 97)

아무도 모르는 정보가 무슨 소용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었기에 브리크의 추모현장에 없었던 자신을 아무도 모른다고 여겨질수록 참을 수 없게 된 프리소는 필립 더프리스를 향한 맹목적인 미움으로 자신이 필립 더프리스 인양 남들을 속이기고 다니기 시작한다.

펠릭스가 열여덟살 때 그의 부모님은 겨울 스포츠를 하러 가는 그 전형적인 구절양장 도로에서 운전대를 놓치고 말았고, 그는 동생들과 함께 조부모님 집에 가서 살아야 했으며, 장남인 동시에 막둥이 성인으로서 동생들을 돌보았다. 피파는 정작 나보다 펠릭스를 알고 지낸 지 더 오래되었으나 그가 어떤 시절을 보냈는지에 대해서 내 의견에 동의했다. 이를테면, 사랑하는 사람이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처음 몇 주 동안, 더러는 몇 개월 동안에는 애도에 접어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 꽃과 음악을 골라야 하고, 공증인과 상의해야 하며, 부고를 보내야 하고, 보험과 정기구독을 해지해야 하며, 그리고 그 모든 일은 무릇 완벽한 도피가 되어 '죽음과 부재'가 아닌 다른 무엇에 집중하도록 강제한다. 피파의 말로는, 어쩌면 펠릭스는 그 제1단계를 지나지 않은 듯하다고, 시간이 그렇게 흘렀어도 여전히, 삶이 또한 실제 겪어 내야 할 의무에서 벗어나는 방식으로 질서 정연한 삶을 쫓는 듯하다고 했다. (p. 122)

프리소의 절친 펠릭스의 과거 경험에 대해 여자친구 피파에게 자신의 견해를 들려주었음에도 프리소 자신도 마찬가지 상황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더 안좋았다. 프리소는 먼 타국땅 칠레에서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브리크의 죽음에 대한 그 어떤 정리 절차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죽음과 부재가 아닌 다른 무엇에 집중하도록 강제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필립 더프리스 라는 청년에게 집중하고 집착한다.

필립 더프리스와 토론을 하게 되면 마음이 불편할 것은 당연지사였다. 벌써 내가 그 대신에 민망함이 느껴졌다. 그가 브리크와 거의 아무런 사이가 아니었음을, 빌어먹을 그랬던 적도 없음을 내가 알고 있다는 점과 이번에는 허풍 떨 수 없다는 점을 보란 듯이 알려 주어야 했다. (p. 141)

부재를 경험하지 못한 프리소의 일탈이 애도로 받아들여지기까지 내게는 꽤 긴 적응의 시간이 필요해긴 했지만... 다 읽고 이제와 생각하니 이해가 된다...

"종래의 이름은-주로 성인이나 순교자 이름에서 가져온-그 시기에 대대적으로 사라지고 세속적 이름이 선호되었는데, 정치권이 부추기기도 했지만 1940년대부터 전대미문의 성장을 보인 미국 대중문화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어요. 히틀러라는 이름이 그리 문제될 건 없었지요." 그녀의 이론은 브리크의 학생 한 명이 조사한 내용과 일치했는데, 히틀러 말고도 스탈린 다섯 명, 처칠 세 명, 무솔리니 두 명이 전화번호부에 있었다. (p. 204)

히틀러라는 이름을 갖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아갔던 칠레에서의 프리소의 시간은 이름이라는 허명과 실존하는 존재 자체 사이에서 방황하는 프리소의 애도적 방황을 미리 예견한 듯한 경험이었다. 갑작스런 질병에서 타인에 의해 생명이 건져지는 경험을 한 프리소가 브리크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는 스스로 헤쳐 나오기까지 더 긴 시간이 필요했음을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였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가 혹시 다른 사람도 고려했었는지 알고 싶었다. 꼭 집어 말하면 프리소 더포스, 1991년 창간된 히틀러 르포지 <몽유병자>의 전무후무한 편집장으로, 요시프 브리크의 최근 저서 다섯 권 가운데 적어도 네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열렬하게 공동 편집하고 공동 기획하며 일일이 다 챙겼던 '일인 근위대'

"그게 누구요?" (p. 255)

 

브리크를 애도하는 과정은 곧 프리소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애도기 이자 성장기로 읽혀지는 면도 조금은 있다.

연단에는 옆으로 흰 가르마를 탄 정치인 같은 인사가 샴페인 잔을 들고 <가우데아무스 이기투르>('그러니 우리 모두 즐거워하자'라는 뜻의 라틴어로 중세부터 부르던 유럽 대학생들의 전통적인 찬가이다. 원제는 '인생의 짧음에 대하여') 를 거침없이 선창했다. 나는 교수, 지식인, 언론인, 예술가, 학생이 이렇게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가 감히 합창을 청할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고, 또한 그들이 그 청에 응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마음으로 목청껏 부르는 노랫소리가 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질 줄은 더더욱. (p. 323)

우리의 국가가 울려 퍼졌다. 이것이 우리의 공동체임이 틀림없었다. 우리의 새로운 공화국, 학력주의 사회, 그토록 박식한 이 모든 사람-상황이 달랐다면 말이다. 그러면 나도 목청껏 노래를 따라 불렀을 테고, 무리의 일원으로 느꼈을 테고, 필시 브리크의 뒤에 서서 기차놀이 춤을 추며 그의 어깨를 내 어깨처럼 느끼며 들썩였으리라. 하지만 이제 나는 그것을 즐기지 못했다. (p. 324)

 

그들만의 학회, 그들만의 공화국. 하지만 브리크가 있었을 때는 우리들의 학회, 브리크의 왕국이었다. 프리소는 이제 왕국이 없어졌고 공화국의 혼란을 목도하는 중이다.

"너는 이 학회에 나보다 자주 왔었지? 브리크가 없는 지금은 많이 다른가? 내 말은, 내가 순진하기 짝이 없는 건지, 아니면 너무 열렬한 브리크 팬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프리무스 인테르 파레스가 그렇게 사라지면, 왕이 죽은 것과 좀 비슷하지 않아? 그러면 그 자리에 뭐가 남는 거지?"

"공화국" 나는 말했다.

"공화국, 그 말은 언제 들어도 서글픈 구석이 있어. 무언가가 지나가고 난뒤에 오는 법이니까. 왕조의 뒤에, 황조의 뒤에. 공화국은 절대 저절로 존재할 수 없지. 도대체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라는 듯이 말이야" (p. 341)

 

돌고돌아 만난 필립 더프리스는 예상보다 더 많이 프리소를 당혹스럽게 했다. 반전이라면 나름 굉장히 큰 반전적으로. 뒷통수를 뙇

통은 비었다. 브리크는 가 버렸다. 그리고 나는 거기 빈에 앉아 이 환상 장례식에서 깨어났다. 아주 한참을 물속에 있다가 마침내 수면을 뚫고 공중으로 고개를 내미는 듯했다.

통은 그대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필립 더프리스의 침대에서 통을 품에 안고 있었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바다에 재를 던져 버린 그 순간에 숫제 머물로 있었다. 나는 일말의 원망도 없이 유골단지를 필립의 침대 옆 협탁에 도로 갖자 놓을 수 있었다. 그 어떤 환영은, 내가 그것으로 무얼 하든지 간에 그보다 훨씬 더 값진 것이었다. 어떤 현실도 그것을 이기지 못했다. 내 배속에서 뭔가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몇 달 동안 느끼지 못했던 초연함이라는 감정이었다. (p 376)

 

혼자만의 장례식을 치루고 나서야 프리소는 다시 돌아왔다. 자기 자신에게로. 브리크가 없는 삶도 살아갈 수 있는 온전한 프리소로.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때로는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극한 소모가 필요하기도 하다. 너무나 당연히 함께할 거라 믿었던 존재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 그 실제감을 인정하기까지 어쩌면 사람마다 다 다른 방식이 필요한건지도 모르겠다. 프리소가 브리크를 떠나보내며 부른 애도가는 왕국이 멸망하고서야 등장할 수 있는 공화국에서 울려퍼지는 진혼곡이었다. 그리고 그 공화국에서는 왕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왕은 자연스럽게 잊혀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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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수업 -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김헌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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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문명의 근원 그리스 로마로 꿰뚫는 놀라운 통찰

'답은 틀릴 수 있지만 질문은 틀리지 않는다!'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상적일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을 이렇게 살짝 양끝을 접어놓은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질문도 아마 그럴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듯 살고 있는 생활 속에 문득 던져본 하나의 질문이 삶 전체를 되짚어 보게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질문들 9가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후 교사로 십년 근무하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직업을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다. 서양고대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서양고전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서 그리스로마 신화, 비극, 역사, 철학을 녹여낸 강의를 하고, 쉽게 풀어쓴 대중서롤 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중 이시다.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어 보이는데, 대학신입생이나 사회초년생에게 선물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질문하며 살라고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사건건 묻고 따지라는 뜻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많은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굵직한 질문들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반복해서 계속 물으며 자신의 답을 검토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질문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많다는 건, 단순히 질문의 개수가 아니라 굵직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 던진 횟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p. 14)

무작정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살다보면 그저 무작정인듯 살게 되곤 한다. 저자는 '질문'하는 삶을 강조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때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자랐다. 자랄 수록 질문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면 질문은 까맣고 잊어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을 관통하는 질문 몇개쯤 갖고 산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을 확정해놓은 듯한 해답 몇가지를 갖고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할법한 거의 모든 질문은 고대인들이 이미 많이 던져놓았기 때문에 삶에 질문하기 시작하면 고전과의 연결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래서 서양고전을 공부한 저자가 고대그리스로마를 관통하는 조언들을 해주고 있는 것을 읽다보면 그 필연성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0 들어가기 전에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팩트 체크부터 에포케 까지

플라톤은 그러한 국가를 '칼리폴리스(Kalipolis)'라고 표현했어요. 폴리스polis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말합니다. 앞에 붙은 칼리Kali는 아름답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상적인 국가를 강국이나 부국, 정의실현국가라는 식으로 부르지 않고 '아름다운 국가'라고 했던 거에요.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외적인 미美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익이나 윤리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p. 34)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는 '실천적 지혜'라는 뜻으로, 지식을 의미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 참된 지혜 혹은 성스러운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sophia)와는 결이 다른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삶을 사는 것에 관하여 잘 숙고하는 사람'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p. 37)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퓌론이라는 사람이 이끈 '회의학파'가 있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에포케(epoche)'라는 걸 강조했는데요, 이 에포케라는 말은 '판단 중지'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고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p. 38)

 

그리스 고전을 읽다보면 원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번역되면서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럴때마다 원문 자체로 읽지 못하는 나의 모자란 능력에 아쉽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책들에서 원어가 가졌던 뜻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곤 한다. 아 이런뜻이었구나 하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곤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가 칼리폴리스 였구나... 아름다운 국가 라... 굉장히 고대그리스인적인 표현이다!

저자가 중요시하는 '에포케' 도 신선했다. 지지부진하고 회의스러운 회의론이 아니라 '판단중지' 라는 보류개념은 신중해 보였다. 회의스러운게 아니라! ㅎㅎ

1 첫 번째 문 - 나는 누구인가? > 세상을 향한 질문의 시작

꿈은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결핍이 주는 아픔과 그 아픔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지요. 하지만 다른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부족한 것도 없다 말하면서 무슨 꿈을 꾸라는 건가요?(p. 47)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도 섣불리 답을 내리며 단정하고 확신하기에 앞서 끊임없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가 필요합니다. 판단을 중지하고, 다시 한번 묻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진짜 모습을, 의식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p. 73)

 

꿈은 결핍에서 온다.. 잊고 있었다. 요즘 꿈이 없다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줬는데 왜 너는 꿈이 없냐고 말할 게 아니다. 부족한게 없어서 꿈을 꿀 수 없는 것이다. 꿈은 스스로의 성장동력이다. 타인이 갖추어준 것들로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동력 찾기란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격언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델피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던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말의 핵심을 늘 중요시했다. 저자는 이 격언과 더불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해주며 '너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 는 격언을 남긴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누구인지 알려는 과정중에 '에포케' 는 꼭 필요한 자세인 듯 하다.

2 두 번째 문 - 인간답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 세상에 새겨 넣는 나의 무늬

소크라테스는 아무 이야기나 들려주면 안 된다고 말해요. 시인들을 잘 감독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만 남기고 거짓을 쓰는 자들은 쫓아내고자 합니다. 그들이 쓴 것들은 가르쳐서도 안 된대요. 그러면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시인들이 바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서슬 퍼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그분들을 존경하긴 하는데 애들한테는 그들이 지은 이야기를 가르치면 안 돼, 라고 말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들이 너무 못된 거예요. 도대체 그리스 신들의 역사라는 게 불량하기 짝이 없어요. 이런 이야기들이 사회 곳곳에 퍼지면 가정에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질서가 잡힐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끌탕이었어요. 당연히 헤시오도스의 시를 가르치지 말라고 금지한 거죠. 소크라테스는 진실 같은 거짓말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어지럽힐까 봐 걱정이었던 거겠지요. 도덕성이라곤 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p. 86~88)

플라톤이 '국가' 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한 위 이야기는 이 책의 말미에 다시 등장하면서 플라톤의 걱정을 불식시킨다.

신과 이성, 무의식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시대마다 장소마다 사람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고, 그들 중에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딸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 질문만은 결코 틀리지 않고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는 존재로서 인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p. 99)

인간적인 삶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발자국의 궤적을 돌아보고,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살았나를 물어보십시오. 만족스럽지 않다며 지난 날을 후회하고 과거를 지우려고 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떤 길을 만들며 어떤 자취를 남기고 갈 것인지를 꿈꿀 수 있는 힘으로 바꿔보십시오. 그것을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질 것입니다. (p. 103)

 

저자가 알려주는 헤시오도스의 고전속 신들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한다. 신화는 인간적이지 못한 설화들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그런 모습들과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다를 것인가?

3 세 번째 문 -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가 >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유명한 구절인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문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므로 그대로 번역하자면 '있음이냐 있지 않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어야 해요. 세익스피어는 '삶과 죽음' 보다도 더 깊은 문제가 '존재와 무' 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p. 110)

세익스피어는 그리스 고전을 참 알차게 응용했구나 싶다. 그리스고전을 읽기전에는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이 순수 창작물인줄 알고 그는 천재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리스고전에서 차용 이나 응용 등 으로 활용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극적으로 잘 쓰긴 했지만 그래도 감흥이 전과 같진 않았더랬다.

여하튼, 저자가 파르메니데스와 연결지어 말해주는 햄릿의 유명한 문장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정말 그랬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었네?! !!!

칼륍소는 그리스 말로 '가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칼륍소와 같이 산다면 오뒷세우스는 감춰집니다. 오귀기아섬에서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완전히 잊히는 것이지요. 오뒷세우스가 칼륍소의 곁을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망각에서 벗어나 기억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뒷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선택을 한 거에요.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p. 128)

고전은 우리에게 정다블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지요.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 는 우리가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치욕적인 행동 대신 아름다운 성취를 추구하게 하며, 현재의 안락함에 안주하기보다는 고난을 헤쳐 나가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살아가는 힘'을 주는 셈이지이요. (p. 132)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임을 인지한 순간부터 내내 이어여오는 최대의 질문이자 난관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알려주는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 이야기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을 떠올리게도 한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명예' 는 생물학적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이러한 판단기준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라면 내내 하게 되는 원초적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4 네 번째 문 -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을까? >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멋진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는 내 인생의 시인이고 주인공임을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와 역사를, 그리고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임을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p. 157)

오비디우스 시를 예로 들어 저자는 진정한 주인공으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는 지금 읽어도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책인데... 살아있는 동안 주인공으로 사느냐 죽은 이후에 주인공으로 남느냐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앞에서의 질문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5 다섯 번째 문 -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 > 개인은 미약하나 시민은 강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그걸 딛고 일어설 힘을 낼 수 있는 때인 것이지요. (p. 169)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자각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영이나 계층, 세대를 불문하고 대다수 시민에게 판단력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시 안 될 거라며 자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p. 183)

 

아테엔 아고라가 있었고, 로마엔 포럼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촛불 가득한 광장이 있다. 나에서 출발한 질문은 어느새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확장되게 된다.

6 여섯 번째 문 -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교육에 대하여

저는 다음 세대에게 사다리를 놓아주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다리의 용도는 그 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어느 지점으로 가기 위한 것이죠. 교육자는 사다리를 줘야 해요. 그러면 학생들은 사다리를 끌어서 타고 올라갈 것이고, 그게 필요하지 않다면 그냥 버릴 수도 있을 거에요. 버려질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최대한 튼튼하고 좋은 사다리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걸 통해 더 좋은 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붙들고 말이지요. (p. 203)

저자는 교사였다고 교수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시절 경험한 그곳의 교육지침은 지금의 우리 교육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좋다 판단하기 보다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7 일곱 번째 문 -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있을까? > 역사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넘어야 할 것

그리스 신화는 기존의 틀을 부수고 뛰쳐나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있는 자유이 욕망을 자극하면서 말이죠. 어떻게 보면 그런 가르침이 그리스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힘 같기도 합니다. 바로 그 힘이 로마로 이어지고, 서구 세계에 퍼져서 그들이 근대를 이루면서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것처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스 문명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모험심을 강조합니다. (p. 233)

저자는 카오스에서 시작한 그리스 신화를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 에서 제우스 까지의 '친부살해전통'에 숨어있던 의미를 찾고자 한다. 틀을 부순다는 은 늘 틀을 지키려는 보수와 틀을 부수려는 진보사이의 경계선을 긋게 한다. 하지만 이 경계선은 세대를 반복하며 유지되는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자각일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대가 강요로 느끼는 기성의 틀은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그 이전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기존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틀은 그 이후에 태어날 새로운 세대에게는 낡은 것이 된다는 것도 또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생생하게 상상한다면,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틀을 깨고 나오려고 도전하면서도, 그것을 만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어른들에게 존경의 표하는 기품 있는 태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유와 아량의 품격을 갖춘 어른과 패기 있으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기품 있는 청년 사이의 맞대결은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요. (p. 241)

저자가 말하는 이 건강한 두 세대의 모습을 꿈꾸어 본다.

8 여덟 번째 문 -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가는 길

비극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욕망의 절제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면, 축제는 일정 시기마다 각계각층의 욕망을 분출시켜주었던 거예요. 이것이 사회 갈등을 해소해나가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었습니다. (p. 269)

한 사람 안에 누적된 이야기는 곧 그 사람의 세계가 됩니다.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건 결국 같은 세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가까이 묶어주는 힘이 되지요. (p. 282)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을 제의와 함께 공유했던 그리스인들이 올릭픽 같은 축제를 통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도 이야기한다. '나' 와 '너'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로 묶인다는 것은 이야기를 공감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함께 안다는 것이다.

9 아홉 번째 문 - 잘 적응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 고전과 인생의 상관관계

고전은 영어로 클래식(classic)이라고 합니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라는 말에서 유래했어요. 클라시쿠스는 '클라시스classis'와 '쿠스cus'가 결합된 말인데, 이중 쿠스는 '~한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쿠스 앞에 있는 클라시스 라는 말은 원래 '무리' 혹은 '계급'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 평민, 기사, 귀족 계급이 있다면 그 각각의 계급이 모두 하나의 클라시스인 겁니다.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인 거죠. 로마시대에 클라시쿠스는 좀 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함대'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클라시쿠스 라고 한 것이죠. 로마에서 클라시쿠스란 함대를 내놓을 수 있는 부자 계급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전쟁이 났을 때 국가에 자식밖에 내놓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렸지요. '프롤레스proles'가 라틴어로 '자식'이거든요. 클라시쿠스라는 명칭을 받을 수 있는 클라시스는 주로 귀족 계급이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클라시쿠스는 '클라시스 중의 클라시스로, 모두가 선망하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갖데 되었어요. 클라시쿠스는 최고 수준의 지위이자 능력이었고, 거기에 맞는 자격과 품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요 지표가 되었어요. 이와 같은 이유로 클라시쿠스라고 하면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임을 뜻합니다. 가장 높은 클라시스에 있는 것, 바라보는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 감탄을 자아내는 탁월한 그 무엇, 그것이 바로 클라시쿠스, 클라식, 고전의 핵심입니다. (p. 291~293)

아무나 될 수 없었던 선망의 대상인 클라시쿠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된 다양한 분야의 클라식 즉 고전들, 그러니 그 영광을 마다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 인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깊이를 더해주는 고전을 함께 한다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조언에 크게 고개 끄덕여보며, 오늘도 나는 책을 덮자마자 또다른 책을 골라본다. 자신들을 읽어보라며 슬쩍슬쩍 힌트를 주는 책들이 참 많은 세상 아닌가.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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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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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불리는 다 빈치야말로 우리가 풀고 싶은 궁극의 미스터리다' 라는 이다혜 작가의 추천사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름은 이름 그자체로 이미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지녔다. 그러니 다 빈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는 이 작품에 혹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이탈리아 소설가로 범죄소설에서 재능을 발휘 중인 작가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한편의 범죄드라마를 보는듯 촘촘한 구성이 탁월했다.

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포르차 가문의 가계도가 나오고 등장인물들 한명한명을 세심하게 설명해주는 데도 이름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비슷비슷한 중세 이탈리아의 이름은 정말이지 여전히 외워지지 않는다;;;

10년 전,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사석포를 개발하고, 지하로 강과 해자를 파고,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긴 편지를 갖고 루도비코 일 모로 앞에 나타났다. 그 편지의 제일 아래쪽에 그는 자신이 그림도 좀 그린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 빈치는 그가 직접 발명한 리라 다 브라치오를 연주하는 음악가로서의 능력 때문에 밀라노로 불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히 하나의 문장이 루도비코 일 모로의 머리에 깊이 박혔다.

저는 각하의 아버님에 대한 행복한 기억과 빛나는 스포르차 가문의 불멸의 명성, 영원한 영예를 기리는 청동 말을 만들겠습니다. (p. 47)

 

1493년 가을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에서 섭정 중인 루도비코의 후원아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 프로젝트 중에는 10년전 편지에서 호언장담했던 청동말 조각상 제작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10년째 진척이 보이지 않는 이 청동말에 대해 루도비코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있었다.

프랑스군에는 달마티아인이나 네덜란드인 용병이 없었다. 사실 용병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언어와 목적을 공유하고 샤를8세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강력한 병사들 집단이었다. 두번째로 이탈리아의 용병 대장들이 세련되어지고 그들의 아들들이 어떤 경우에는 귀족이나 외교관이 되었던 반면, 당시 프라으에서는 사회적 승격이 전혀 불가능해 프랑스 병사들은 계속해서 병사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백성들과 마주하면 그들을 죽이고 그걸 통치자에게 내세우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p. 56)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이탈리아는 도시들로 쪼개진채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로마제국때부터 들여온 용병은 이제 완전히 이탈리아 곳곳에 자리잡아 자체군대는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소소한 전쟁은 신분도 뒤집었다. 로마가 무너지고 천년 후의 이탈리아 한 도시국가인 밀라노 이야기를 읽다보니 로마제국쇠망사의 일부가 떠오른다. 그리고 여전히 안타깝다.... 여하튼, 그에 비해 프랑스는 자신들의 군대가 있었고 무엇보다 대포가 있었다. 전쟁에 무지하고 무능한 프랑스왕은 나폴리 침공을 계획중이었고 밀라노의 루도비코는 그 자금을 빌려주고 있었다.

"제가 왜 미사에 참석해야 합니까? 전도사가 복음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는다면 가겠어요. 하지만 제 귀에 들리는 건 전도사들이 자기 머릿속의 망상을 신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떠드는 소리뿐이에요.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수사나 이곳 밀라노의 지오아키노 수사처럼요" (p. 85)

소조는 확실히 그림보다 쉽다. 3차원으로 만드니까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복제하기만 하면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조각상은 장엄한 반면 그림은 우스꽝스러운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3차원으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우니까, 안 그런가? 하지만 2차원으로 만들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음영법과 원근법을 알아야 한다. (p. 88)

 

다 빈치는 여러 면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선구적 면이 있었다. 물론 이 책은 소설이고 다빈치가 종교에 대해 저렇게 말했다고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저런 기록에서 다빈치가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작가가 이렇게 쓴 것이 아닐까?

소조와 그림에 대한 생각은 아하~! 싶었다. 고대그리스와 고대로마조각을 보며 그저 감탄만 했었는데... 회화보다 조각이 발달했던 이유를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구나!

"별에서 아주 많은 걸 읽으실 수 있으니 참 좋으시겠습니다. 마지스트로 암즈로지오. 저에게는 별이 북쪽 방향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거든요"

"당신의 관찰은 그저 필멸의 존재인 육체만을 고려할 뿐이지만, 나는 영원의 첫 번째이자 가장 분명한 현현인 별을 고려하오. 당신이 육체에서 본 걸 내가 별에서 본 것과 비교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p. 133)

 

그림값도 못받고 청동말 주조도 못하고 이런저런 답답한 상황속에 있던 다빈치에게 시체검안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갑자기 성안 뜰에서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루도비코의 절대적 신뢰를 얻던 점성술사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라 하고 해부학적 지식이 있던 다빈치는 살해라고 상반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런 다빈치의 입장은 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던 루도비코에게 또하나의 의심을 제공하게 된다.

프랑스왕이 보낸 사절단,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야 하는 정치적 관계, 갑자기 등장한 시체, 가짜 신용장, 위조 화폐, 그리고 또다른 죽음, 거기에 종교적 음모까지 해결될듯 해결될듯 꼬리를 물고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다빈치 라는 인물의 매력에 더해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묘미가 있었다. 다빈치는 추리에도 천재성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의 척도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뭔가로 그걸 사야만 합니다. 그걸 측정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통화가 필요해요. 그래야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걸 측정할 유일하게 정당한 통화는 바로 신이에요!" (p. 308)

"우리는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동물을 추월하고 지배하게 되고, 그래서 태생이 아니라 자라고 배우는 것을 우리가 인간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과 다른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믿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예상하는 것을 비교해보지 않으면 사람의 지성과 판단력이 건전하게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 그 자체를 척도로 삼아 자신을 비교하는 것뿐입니다. 사람과 달리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p. 346)

 

서로의 가치판단 기준이 다를때 사람은 어느 정도의 사건까지 벌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한 척도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삼았으나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인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히 그 시대를 상상하게 된다. 때로는 실재이고 때로는 허구인 장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니 더 재미있게 읽혀졌다. 셜록 홈즈의 추리소설 한편을 읽고난 기분이 드는 깔끔한 사건 해결에 왠지 다빈치가 또다른 사건을 해결하는 다음 작품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어진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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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기술 -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5가지 삶의 원칙
스벤 브링크만 지음, 강경이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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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과 심리학에서 배우는 내려놓는 삶의 즐거움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5가지 삶의 원칙

 

 

덴마크에서 가장 신뢰받는 대중 철학자이자 심리학자라는 저자가 쓴 이 책은 언뜻 자기계발서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 거나 5가지 삶의 원칙이라거나 하는 식의 내용 때문이기도 하고 'THE JOY OF MISSING OUT' 라는 원제는 '내려놓는 것의 즐거움 이랄 수 있을 것인데 '절제의 기술'이라는 어떤 기술을 알려주는 듯한 한국어판 제목때문이기도 하다. 여하튼 200여 페이지의 작고 얇은 이 책은 비교적 빨리 읽히는 책이었다.

현대 심리학은 주로 개인이 자기 통제력을 발휘하는 맥락에서 절제를 다룬다. 물론 이러한 심리적 접근법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좀 더 다양한 측면을 함께 다룬다. 바로 심리학과 철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이라는 관점을 통해 유혹의 시대를 이기는 다섯 가지 삶의 원칙을 소개하려 한다.(p. 18)

절제라는 단어는 개인적인 욕망억제적 느낌을 준다. 그래서 절제의 기술이라 하면 개인적 마음수련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하지만 저자가 말하는 절제는 개인적인 측면이 아니었다. 저자의 포부대로 철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이라는 다양한 분야가 응축되기엔 전개되는 내용이 짧아서 제대로 느낄수는 없었지만 여하튼, 중요한것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공동체적 차원을 중요시 여긴 다는 것이다.

첫 번째 원칙은 '선택지 줄이기'이다. 이 원칙은 심리적 관점에서 자기 통제력을 구체적으로 발휘하는 법과 연결된다. 우리 마음에는 '쾌락 쳇바퀴'라는 비극적 시스템이 있다. 새로운 쾌락이나 더 나은 선택지를 찾는 대신, 선택지를 줄이면 된다.

두 번째 원칙은 '진짜 원하는 것 하나만 바라기' 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마음의 순결함은 단 한가지만 바라는 거이다' 라고 말했다.

세 번째 원칙은 '감사하고 기뻐하기' 이다. 윤리적 관점에서 타인과 맺는 관계를 다룬다. 특히 절제(소프로시네)를 윤리적 삶의 핵심 요소로 보았던 고대 그리스 철학의 덕 개념과도 연결된다.

네 번째 원칙은 '단순하게 살기' 이다. 절제의 사회적, 정치적 측면을 다룬다.

다섯 번째 원칙은 '기쁜 마음으로 뒤처지기'이다. 미학적 관점에서 절제는 단순하며, 그렇기에 아름답다. (p. 18~21)

 

저자가 제시하는 다섯 가지 원칙이 다섯 가지 분야에서 도출되었다. 이제 하나하나 살펴볼 차례다.

원칙1> 선택지 줄이기 - 내 삶의 한계에 대해 깨달을 심리적 준비

연구자들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추상적 개념의 자기 절제만이 아니라, 세상과 타인에 대한 신뢰라는 결론을 내렸다. 달리 말해 자기 절제 능력이란 오롯이 개인의 의지에 달린 인격 특성이라기보다는 상황과 환경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 새로운 실험은 미셸이 했던 첫 번째 실험의 가치를 떨어뜨렸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의미를 덧붙였다. 한 개인의 성공은 개인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차원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내면적 심리 특징만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나 양육 환경 등 그를 둘러싼 여러 조건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이다. (p. 32)

마시멜로 실험은 유명해서 많이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 심리학자가 마시멜로를 주는 어른의 조건에 변화를 주었다. 신뢰할만한 어른인가 아닌가에 따라 아이들의 마시멜로 인내 결과는 유의미하게 달라졌다. 마시멜로를 기다린다는 것은 개인적인 절제 뿐만 아니라 마시멜로를 제시하는 어른 즉 환경에 의해서도 크게 좌우되었다. 드라마의 반전 결과를 본듯 이 실험의 결과는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다.

기본적으로 덴마크가 이룬 높은 수준의 평등과 복지, 타인에 대한 신뢰가 높은 행복지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언급한 삶에 대한 낮은 기대 역시 꽤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북유럽에는 '얀테의 법칙'이라는 게 있다. 얀테의 법칙은 간단히 말해 '내가 대체 뭐라고?'라는 태도를 바탕으로 한다. 자기 분수를 잘 알고 자만하지 말아야 하며, 성공에만 목매는 일은 다소 천박하다고 여기는 생각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이러한 얀테의 법칙과 삶에 대한 낮은 기대 덕에 덴마크 사람은 다른 나라 사람보다 실망과 실패를 잘 견디는 것 같다. (p. 47)

사계절이 뚜렷하다기 보다 늘 추위가 긴 나라, 좁은 땅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서 거친 삶을 살아야 했던 민족, 덴마크 사람들이 '얀테의 법칙'을 체득하게 된 원인이었을까? 그런데 왜 한국 사람들은 '내게 어떻게 이래?' 라는 태도를 바탕으로 갖게 되었을까;;;

트럼프는 특히 '나는 패배를 믿지 않는다'라는 장(노먼 빈센트 필이 쓴 <긍정적 사고의 힘 이라는 책 에서)을 열렬히 사랑한 나머지, 자신이 패배할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듯하다. 2016년 미국 대선 당시, 그는 자신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패할 경우 그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약속하는 일조차 당당하게 거부했으니 말이다. 민주적인 절차와 제도를 전혀 신뢰하지 않는 끔찍한 태도였다. (p. 50)

트럼프가 필의 긍정적 사고에서 배운 것은 일종의 자기기만이다. 긍정적 사고를 통해 자신만을 위한 또 하나의 현실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p. 51)

 

트럼프는 거의 세계적인 공공의 적이 된 것 같다. ㅎㅎ 정치분석 책은 물론이고 이런 심리·철학서 뿐만아니라 소설에서까지도 요즘 읽는 책마다 자꾸자꾸 등장한다. 그리고 항상 욕을 먹는다. 아주 오~래 살건가 보다. ㅎ

행복은 누구에게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타인들에게 올바르게 매여 있는 상태다. (p. 54)

우리가 쉴 새 없는 유혹의 문화 속에서 사는 한, 그런 개인적인 노력은 대부분 실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앞으로 이 책에서 계속해서 다룰 주제다. (p. 62)

 

원칙2> 진짜 원하는 것 하나만 바라기 - 더 많이 경험하지 않아도 되는 실존적 이유

덴마크 시인 피트 헤인의 시 < 다 바라지 말아야 한다>

다 바라지 말아야 한다.

너는 그저 한 부분일 뿐.

너는 세상 속 한 세상만을 소유한다.

'그 세상'을 온전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 길과 하나가 되어라.

다른 길들은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늘 돌아온다.

문제로부터 숨지 마라.

바로 지금 여기에서 그 문제에 맞서라.

유한함이야말로

세상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네가 존재하고, 행동하고, 겪어야 하는 것은

바로 '지금' 이다.

그게 유한함이다.

우리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 (p. 68)

 

때로는 길고 자세한 설명보다 짧고 끊어지는 시 한편이 더 깊게 공감이 되곤 한다.

키르케고르는 종교 사상이기에, 선 또는 순결한 마음을 보증하는 존재가 신이라고 말한다. '선은 그 자체로 보상이다. 맞다. 그것은 언제나 틀림없는 말이다. 그만큼 확실한 것이 없다. 신이 있다는 사실만큼이나 확실하다. 왜냐하면 선한 일을 추구하는 것이 그 자체로 보상이라는 말과 신이 존재한다는 말은 결국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키르케고르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 그 자체로 보상이자 목적이라는 생각과 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서로 연결한다. 우리는 그가 말하는 신의 개념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키르케고르가 우리 사회에 점점 널리 퍼지는 도구화 현상을 날카롭게 비판한 것만은 틀림없다는 점이다. (p. 74)

키르케고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면 우리의 마음 너머엔 더 큰 세상이 있으며, 그 세상에서는 사적인 소망과 취향과는 관계 없이 객관적으로 좋거나 나쁜 것만이 있다는 진실을 깨닫게 된다. (p. 96)

 

키르케고르의 사상을 읽어본 적은 없다. 그리고 종교사상가 라는 점에서 그의 책을 읽어도 다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저자가 전달해주고 하는 점은 알것도 같다. 삶의 방향이나 의미를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다른 객관적인 차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

원칙3> 기뻐하고 감사하기 - 경제학이 알지 못하는 인간의 윤리적 가능성

키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백합과 새를 스승으로 삼아 무어보다 침묵을, 말을 삼가는 법을 배우라고 간청한다. 우리가 침묵의 기술을 배워야 하는 이유는 우리에게 말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다면 침묵을 배울 이유가 없다. 침묵을 배울 때 비로소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p. 111)

절제도 지나치면 해롭다. 절제가 신성불가침 원칙이나 금욕이 되면 절제하는 사람 자신뿐 아니라 주변 사람에게도 견디기 힘든 일이 되고 만다. 그러니 절제도 절제해야 한다는 것을 늘 기억하자! (p. 129)

윤리는 추상적이고 지적인 게임이 아니라 실천적 모험이다. 행동의 문제다. 그리고 그 행동을 절제하는 문제다. 윤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해주는 절제라는 품성을 갖추려면 건강하게 잘 가꾸어진 감정이 필요하다. (p. 130)

 

욕망은 경제와 밀접하다. 경제가 만들어낸 산물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것을 선택하게 하고 욕망을 부추긴다. 저자는 경제에 휘둘리지 말것을 조언한다. 그렇다고 욕망을 억누르라는 것은 아니다. 윤리는 왠지 종교적 철학적 금욕적 느낌을 주지만 저자는 윤리적 절제를 건강한 품성에서 찾고자 한다. 건강한 품성은 스스로 알아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일관되게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다.

원칙4> 단순하게 살기 -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정치적 결정

지구상 가장 부유하고 가장 안전한 나라에서, 비교적 부족한 것 없이 살아가는 나 같은 사람이 이런 주장을 펼치는 건 다소 위선적인 일이 아닐까? 욕망을 좇는 대신 절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려 드는 엘리트주의적이고 특권적인 태도가 아닐까?누군가는 '부족한 게 없는 당신 같은 사람들이야 그럴 수 있겠지!''라고 비난하지 않을까? 물론 타당한 반응이다. (p. 150)

솔직하다. 이런저런 수치에서 선두권을 차지하고 있는 북유럽 나라 덴마크에서 교수로 살면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사는 저자에게 누군가 이런 질문들을 할법 하지 않은가? 저자가 먼저 이 의문점을 인정하고 함께 생각해보자는 태도에서 나는 왠지 여유감을 느꼈다. 뭔가 많이 가져서 느껴지는 여유감이 아닌 다른. 그리고 저자는 곧바로 답을 찾는다.

이 책에서 나는 개인이 절제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는지를 주로 다루었다. 하지만 이런 논의는 개인적 차원뿐 아니라 집단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사실 중대한 결정은 집단적 차원에서 내려지기 때문이다. (p. 153)

저자는 지속적으로 자신이 가진 개인적 조건들이 아닌 다른 것을 보도록 유도한다. 개인적 절제는 스스로에게 좌절감을 안겨줄 때가 많지만 시스템적 절제는 다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은 개인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구글에서 '단순하게 살기'를 검색했는데, 대부분 스칸디나비아풍 가구를 파는 웹사이트나 실내 디자인 웹사이트로 연결되었다. 잠시 그 사이트를 둘러본 결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바로 단순하게 살려면 매우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p. 161)

재밌지 않은가? 단순하게 살기 위해 매우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자본주의 하에서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 잘못 받아들여서 일수 있지 않을까? 절제와 검소를 추구하는 단순하게 살기 운동이 왜 하나의 유행처럼 번진 것일까?

2300년 전쯤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무척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바로 '경제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고 말이다. 철학자 제롬 시걸과 아리스토텔레스 두 사람 모두 경제의 목적이 점점 더 많은 것을 갖는 데 있지 않다고 답한다. 오히려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경제적 어려움에서 우리를 해방하는 데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가 경제를 이야기할 때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p. 162)

고대 철학은 현대인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근본적 질문들을 먼저 선점했다. 하지만 그 근본적 질문들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계속 새로운 답을 찾아낼 뿐 정답은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경제가 발달할수록 개인적 소비선택만 늘어나는 것 같다. 그러니 단순하게 사는 것도 뭔가 새로운 것을 더 사는 것으로 종결되기 쉽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산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저자는 '공동체의 삶을 책임지는 적극적 자유'를 말한다.

절제의 기술은 어떤 의미에서는 단순하게 살기 운동의 핵심 요소이기도 하다. 단순하게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하지만 현실에서 단순하게 살기 운동은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었다. 단순하게 살기란 절대 단순하지 않다. 정말 단순하게 살려면, 개인이 상당한 경제적, 문화적 자원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내려놓아야 할지 제대로 알려면, 토론을 하거나 민주적인 제도를 활용해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인 삶 역시 타인이나 사회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유념하자. 개인과 집단을 이분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 둘은 사실상 상호 의존하고 있다. (p. 167)

우리 아아들이 절제의 기술을 터득하기 위해서도 적절한 교육이 필요하다. 누구도 저절로 절제의 기술을 터득하지는 못한다. (p. 169)

적극적 자유를 누리려면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요하고, 개인적으로도 통찰력과 비판 능력을 갖춰야 한다. 또한, 자유는 연대 의식도 포함한다. 사실 연대 의식이야말로 이 책에서 다루는 주요 주제다. 절제의 기술은 더 힘든 상황에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내 앞에 놓인 무언가를 기쁘게 내려놓는 마음이다. (p. 170)

 

원칙5> 기쁜 마음으로 뒤처지기 - 일상이 즐거워지는 삶의 미학적 형식

혹시 '조모 JOMO, Joy Of Missimg Out'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가? 오늘날 널리 퍼진 유행어인 '포모 FOMO, Fear Of Missing Out'의 반대말이다. 우리는 내려놓는 일과 뒤처지는 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p. 176)

내려놓음, 지금, 여기 를 강조하는 저자의 글을 읽다보면 같은 것을 강조하시는 법륜스님이 자꾸 생각난다. 저자의 원칙들은 불교적 분위기를 풍기기도 하지만 저자는 그럴까봐 끊임없이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얼마든지 계속 원해도 된다고 유혹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무언가를 기꺼이 내려놓는 절제력을 기르고 의지력을 키우는 일이 가능할까? 아마 몇몇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간접적인 방식이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개인적 차원에서 의지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제도와 조직, 기술, 가족 등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문화적 환경을 새롭게 바꾸는 것이다. (p. 187)

환경을 바꾸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 정치적인 선택들도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회적, 문화적 환경은 개인들의 선택이 모여 만들어진다. 자연스러운 분위기 같은 거랄까.

개인은 수많은 선택지를 손에 쥔 소비자가 되어 제공된 메뉴에서 이것저것 선택해 삶을 조립한다. 그 결과 그냥 자연적으로 의례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은 이제 거의 없다.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오늘날처럼 의례의 영향력이 줄어든 현상으로 인해, 개인이 생애 전환기에 잘 대처하도록 돕는 사회적, 심리적 토대를 잃어버린 건 아닌지 묻는다. (p. 189)

사회의 탈 의례화는 바꿔 말하면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유대가 약해졌다는 의미다. 철학자 앤서니 홀리웨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례를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보편적인 도덕 가치라고 주장한다. 물론 모든 의례에 도덕적인 가치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의례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사회여야 도덕성도 발달할 수 있다는 말이다. (p. 190)

오늘날 많은 사람이 혁신과 파괴에서 희망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혁신이나 파괴는 우리 삶의 모든 형식과 한계를 없앨 뿐이다. 삶에 도움이 되는 혁신적 사고를 하려면 우리가 사는 시대와 장소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p. 194)

개인들에게 자기 앞날을 위해 마시멜로를 쌓아두라고 가르치는 대신, 주변 사람과 마시멜로를 나누어 갖는 행동을 권장하고 보상을 해줘야 한다. (p. 198)

절제의 기술을 배우는 일은 단지 공허한 금욕주의를 연습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모두 충분히 행복과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p. 200)

 

 

한명한명의 개인들이 자기자신만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판단한다면 당연히 공동체적 삶은 지양될 것이다. 한명한명의 개인들이 건강한 품성을 갖고 적극적 시민의식을 함양하여 함께살기 위한 절제를 할 수 있을때 그야말로 이상적인 공동체적 삶은 지향될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개인들이 어떻게 해야 많아질 수 있을까... 자각? 교육? 둘다 필요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가능할까?... 가능해지면 좋겠다!

ps. 표지그림을 아무리 봐도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나는 자꾸 '마라의 죽음'이라는 그림이 떠올라서 책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어 개인적으로 좀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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