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뜨기 마을 - 전태일 50주기 기념 안재성 소설집
안재성 지음 / 목선재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는 소설로 작가의 작품을 처음 접했었다.

6.25를 배경으로 비전향 장기수였던 실존인물의 수기를 바탕으로 소설화한 작품이었는데, 제목그대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삶을 살다간 인물의 삶이 너무 드라마틱해서 한국현대사속 보이지 않았던 장면을 또하나 알게 해준 소설이었다.

그 뒤로 작가의 이름을 계속 기억하고 있었다. 새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됐을때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 작품을 통해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곳을 지속해서 살펴보고 작품화하는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나마저 다른 곳을 볼 수는 없게 되버렸기에...

이 책은 지난 100년 한국의 놀라운 변화를 주도했던, 그러나 주목받지도 존중받지도 못한 민초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단편소설들로 이뤄졌다. 2년간 시사월간지 <시대>에 연재되었던 작품들로, 대부분 본인이나 유족의 직접증언을 토대로 썼다. 따라서 소설의 등장인물과 사건의 줄거리는 모두 실제사실에 바탕을 두었으며 가독성과 익명성을 위해 약간의 각색만을 거쳤다. (작가의 말 中)

이 책 또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저자의 이력을 잠시 찾아보니 노동운동을 오래했었고 지금은 글쓰기에 전념하고 있는 듯 하다. 제2회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전태일 50주년 기념 소설집'을 엮은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여전히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과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위해 싸우는 정의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는 저자 자신의 소개글을 보니 더더욱 작품의 무게감이 진하게 전해져왔다.

그렇다. 무게감... 읽는 내내 잠깐씩 숨을 몰아쉬어야 할만큼 각각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무게감이 상당했다.

1부에서는 일제치하부터 분단까지의 노동현장을

<이천의 모스크바> 에서는 6.25 전후 한 마을에서 벌어졌던 엎치락뒤치락 하는 진영의 갈등을 농부의 시선으로

<두발자전거> 에서는 일제치하 노동운동의 태동과 해방후의 갈등을 방직공장 여공의 시선으로

<달뜨기 마을> 에서는 결혼 후 세상과 사상에 눈을 떠 여맹위원장까지 활동했던 여성의 시선으로

2부에서는 80년대를 전후한 노동현장을

<첫사랑 순희를 찾아서> 에서는 분단 후 혼란스럽던 정치상황을 첫사랑과 엮어 회상하는 노신사의 시선으로

<팬데믹의 날> 에서는 노동운동에 앞장서서 노동자로 한평생 투쟁하는 도중 5.18을 경험했던 여성의 시선으로

<37년 만에 맞춘 퍼즐> 에서는 원풍모방의 여공으로 성장한 노동의식을 여전히 실천중인 여성의 시선으로

3부에서는 불과 몇년 전 혹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노동현장을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에서는 성진노조원들과 창조컨설팅의 노조파괴작업으로 인한 투쟁의 현장을 겪어낸 노조원의 시선으로

<스무 명의 성난 여자들> 에서는 네임텍 이라는 스티커 회사에서 무시와 멸시 속에 꿋꿋이 복직 투쟁을 하고 있는 노조원의 시선으로

<캐디라 불러주세요> 에서는 정식직원이 아니기에 정식노조도 제대로 만들 수 없었던 캐디 노조원의 시선으로

풀어내고 있었다.

한편한편 읽어갈 때마다 허구가 아닌 실화라는 것을 알기에 하나하나 전부다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소설들이었다.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다가도

변화한 시대만큼 새로운 형태의 착취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이기에 다시 마음이 무거워지기 일쑤였다.

하지만 지푸라기를 쥐던 손으로 계란을 던져 바위를 치다가 돌멩이로 벽을 부수는가 싶더니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를 조금씩 인정받아 가는 현실은 그래도 조금은 나아진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노동자가 등장한 이후 쌓였던 50년 억압이 전태일 을 계기로 터진지 다시 50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도 50년 뒤엔 지금보다 더 가벼운 마음으로 전태일 100주기 기념 소설집을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꼭 그렇게 되길 희망해본다.

나보다 서너 살이나 더 먹었을까, 아주 젊은 검사가 나를 보고는 반말로 이러는 거야.

"고생 많이 했다. 집에 가서 부모님 잘 모시고 농사 잘 지어라"

훈계를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펑 터지는 거라. 저 사람들은 저리 잘나서 남을 때리고 훈계하는데, 나는 하찮고 못나서 여기 붙들려 와서 이런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펑 터져. 내가 무슨 학교 공부를 했어. 집에 전답이 있어? 배운 것도 하나 없고, 가진 것도 하나 없는 알뜰한 가난뱅이라. 그래도 평생 처음 내 주관대로 옳은 일이라 싶어 나섰던 건데, 모질게 두들겨 맞고 수모를 당하고 나니, 진짜 분하고 서럽더라고. (p. 18 - 이천의 모스크바 中)

 

 

지도부도, 선동가도 없는 시위였어. 계엄군에게 잡히면 피투성이가 되게 두들겨 맞고 팬티만 입힌 채 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지는 판이야. 어느 누가 감히 목숨을 버리라고 선동을 할 수 있겠어? 선동가는 아무도 없었어. 모든 게 자발적이었어. 시위에 참여한 모두가 자기 운명의 주인이었어. (p. 149)

이길 줄 알면서 싸우는 건 용기가 아니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모두들 나선 거야. 수많은 민란들과 동학난, 삼일운동도 그렇게 일어난 거 아니야?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불의한 권력 앞에 목숨 던져 싸우는 것, 그게 바로 인간의 위대함이라고 나는 믿어. (p. 153 - 팬데믹의 날 中)

 

 

"노동조합은 단순히 월급 몇 푼 올리는 단체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게 노동조합이죠. 자기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학교나 부모는 가르쳐 주지 않지요. 하지만 노동조합을 가르쳐줍니다. 노동조합의 힘으로 공동체가 되어 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겁니다. 세상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p 211 - 37년 만에 맞춘 퍼즐 中)

"우리는 그동안 지는 싸움만 했어요. 거의 항상 졌어요. 그래서 지는 것이 곧 승리하는 것이라고 거짓으로 위로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이번에는 승리했네요.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도무지 믿기 어려운 승리를 한 거죠. 제가 만일 이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면 다들 소설이니까 거짓말이라고 하겠죠. 소설보다 현실이 더 거짓말 같다고 할까, 저는 지금도 우리의 승리가 믿어지지를 않네요" (p. 253 - 그들은 성자를 보았다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