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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평점 :
'르네상스적 인간이라고 불리는 다 빈치야말로 우리가 풀고 싶은 궁극의 미스터리다' 라는 이다혜 작가의 추천사처럼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이름은 이름 그자체로 이미 상상의 세계로 이끄는 힘을 지녔다. 그러니 다 빈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라는 이 작품에 혹 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이탈리아 소설가로 범죄소설에서 재능을 발휘 중인 작가의 작품이라서 그런지 한편의 범죄드라마를 보는듯 촘촘한 구성이 탁월했다.
소설을 시작하기에 앞서 스포르차 가문의 가계도가 나오고 등장인물들 한명한명을 세심하게 설명해주는 데도 이름이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비슷비슷한 중세 이탈리아의 이름은 정말이지 여전히 외워지지 않는다;;;
10년 전,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사석포를 개발하고, 지하로 강과 해자를 파고, 난공불락의 성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긴 편지를 갖고 루도비코 일 모로 앞에 나타났다. 그 편지의 제일 아래쪽에 그는 자신이 그림도 좀 그린다고 덧붙였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다 빈치는 그가 직접 발명한 리라 다 브라치오를 연주하는 음악가로서의 능력 때문에 밀라노로 불려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히 하나의 문장이 루도비코 일 모로의 머리에 깊이 박혔다.
저는 각하의 아버님에 대한 행복한 기억과 빛나는 스포르차 가문의 불멸의 명성, 영원한 영예를 기리는 청동 말을 만들겠습니다. (p. 47)
1493년 가을 레오나르도는 스포르차 가문의 밀라노에서 섭정 중인 루도비코의 후원아래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 프로젝트 중에는 10년전 편지에서 호언장담했던 청동말 조각상 제작도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10년째 진척이 보이지 않는 이 청동말에 대해 루도비코의 인내심은 바닥나고 있었다.
프랑스군에는 달마티아인이나 네덜란드인 용병이 없었다. 사실 용병이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들은 언어와 목적을 공유하고 샤를8세에 대한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강력한 병사들 집단이었다. 두번째로 이탈리아의 용병 대장들이 세련되어지고 그들의 아들들이 어떤 경우에는 귀족이나 외교관이 되었던 반면, 당시 프라으에서는 사회적 승격이 전혀 불가능해 프랑스 병사들은 계속해서 병사들이었다. 다른 사람의 백성들과 마주하면 그들을 죽이고 그걸 통치자에게 내세우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p. 56)
로마제국이 무너지고 이탈리아는 도시들로 쪼개진채 여전히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로마제국때부터 들여온 용병은 이제 완전히 이탈리아 곳곳에 자리잡아 자체군대는 없다시피 할 정도였다. 그리고 소소한 전쟁은 신분도 뒤집었다. 로마가 무너지고 천년 후의 이탈리아 한 도시국가인 밀라노 이야기를 읽다보니 로마제국쇠망사의 일부가 떠오른다. 그리고 여전히 안타깝다.... 여하튼, 그에 비해 프랑스는 자신들의 군대가 있었고 무엇보다 대포가 있었다. 전쟁에 무지하고 무능한 프랑스왕은 나폴리 침공을 계획중이었고 밀라노의 루도비코는 그 자금을 빌려주고 있었다.
"제가 왜 미사에 참석해야 합니까? 전도사가 복음서에 쓰여 있는 내용을 읽는다면 가겠어요. 하지만 제 귀에 들리는 건 전도사들이 자기 머릿속의 망상을 신의 뜻이라고 착각하고 떠드는 소리뿐이에요. 피렌체의 사보나롤라 수사나 이곳 밀라노의 지오아키노 수사처럼요" (p. 85)
소조는 확실히 그림보다 쉽다. 3차원으로 만드니까 보고 느끼는 것을 그대로 복제하기만 하면 된다. 고대 그리스인들의 조각상은 장엄한 반면 그림은 우스꽝스러운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3차원으로 만드는 것이 더 쉬우니까, 안 그런가? 하지만 2차원으로 만들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음영법과 원근법을 알아야 한다. (p. 88)
다 빈치는 여러 면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선구적 면이 있었다. 물론 이 책은 소설이고 다빈치가 종교에 대해 저렇게 말했다고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저런 기록에서 다빈치가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지 않았으니 작가가 이렇게 쓴 것이 아닐까?
소조와 그림에 대한 생각은 아하~! 싶었다. 고대그리스와 고대로마조각을 보며 그저 감탄만 했었는데... 회화보다 조각이 발달했던 이유를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었구나!
"별에서 아주 많은 걸 읽으실 수 있으니 참 좋으시겠습니다. 마지스트로 암즈로지오. 저에게는 별이 북쪽 방향을 알려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거든요"
"당신의 관찰은 그저 필멸의 존재인 육체만을 고려할 뿐이지만, 나는 영원의 첫 번째이자 가장 분명한 현현인 별을 고려하오. 당신이 육체에서 본 걸 내가 별에서 본 것과 비교하려 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p. 133)
그림값도 못받고 청동말 주조도 못하고 이런저런 답답한 상황속에 있던 다빈치에게 시체검안을 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갑자기 성안 뜰에서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그런데 루도비코의 절대적 신뢰를 얻던 점성술사는 질병으로 인한 죽음이라 하고 해부학적 지식이 있던 다빈치는 살해라고 상반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이런 다빈치의 입장은 그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고 있던 루도비코에게 또하나의 의심을 제공하게 된다.
프랑스왕이 보낸 사절단, 서로의 이익을 계산해야 하는 정치적 관계, 갑자기 등장한 시체, 가짜 신용장, 위조 화폐, 그리고 또다른 죽음, 거기에 종교적 음모까지 해결될듯 해결될듯 꼬리를 물고 다른 사건으로 연결되는 이야기의 흐름은 다빈치 라는 인물의 매력에 더해 범인을 추적해나가는 묘미가 있었다. 다빈치는 추리에도 천재성을 발휘한다.
"우리는 그분이 모든 것의 척도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측정하기 위해서는, 그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뭔가로 그걸 사야만 합니다. 그걸 측정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통화가 필요해요. 그래야 그 가치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걸 측정할 유일하게 정당한 통화는 바로 신이에요!" (p. 308)
"우리는 자라면서 세상의 모든 동물을 추월하고 지배하게 되고, 그래서 태생이 아니라 자라고 배우는 것을 우리가 인간의 척도로 삼는 것입니다. 사람은 자연과 다른 사람들을 관찰함으로써 배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믿는 것,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가 예상하는 것을 비교해보지 않으면 사람의 지성과 판단력이 건전하게 자라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자연 그 자체를 척도로 삼아 자신을 비교하는 것뿐입니다. 사람과 달리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요" (p. 346)
서로의 가치판단 기준이 다를때 사람은 어느 정도의 사건까지 벌일 수 있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파멸시키기 위한 척도는 과연 필요한 것일까?
역사적 인물을 소재로 삼았으나 역사서가 아니라 소설인 이 작품을 읽다보면 당연히 그 시대를 상상하게 된다. 때로는 실재이고 때로는 허구인 장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모아지니 더 재미있게 읽혀졌다. 셜록 홈즈의 추리소설 한편을 읽고난 기분이 드는 깔끔한 사건 해결에 왠지 다빈치가 또다른 사건을 해결하는 다음 작품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고 싶어진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