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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수업 -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김헌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4월
평점 :
나와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9가지 질문
문명의 근원 그리스 로마로 꿰뚫는 놀라운 통찰
'답은 틀릴 수 있지만 질문은 틀리지 않는다!'
표지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일상적일 수 있는 바닷가 풍경을 이렇게 살짝 양끝을 접어놓은 것만으로도 완전히 새롭게 보였다.
질문도 아마 그럴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듯 살고 있는 생활 속에 문득 던져본 하나의 질문이 삶 전체를 되짚어 보게 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질문들 9가지를 담고 있다.
저자는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후 교사로 십년 근무하다 같은 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직업을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다. 서양고대철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지금은 서양고전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 학교에서 뿐만 아니라 다양한 매체에서 그리스로마 신화, 비극, 역사, 철학을 녹여낸 강의를 하고, 쉽게 풀어쓴 대중서롤 쓰는 등 활발하게 활동중 이시다.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어 보이는데, 대학신입생이나 사회초년생에게 선물해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은 질문한다는 것과 비슷한 것 같아서.
질문하며 살라고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사사건건 묻고 따지라는 뜻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많은 질문을 던질 필요는 없습니다. 굵직한 질문들을 끝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반복해서 계속 물으며 자신의 답을 검토해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질문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질문이 많다는 건, 단순히 질문의 개수가 아니라 굵직한 질문을 포기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계속 던진 횟수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p. 14)
무작정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살다보면 그저 무작정인듯 살게 되곤 한다. 저자는 '질문'하는 삶을 강조한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때 수많은 질문들을 던지며 자랐다. 자랄 수록 질문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어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면 질문은 까맣고 잊어버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 삶을 관통하는 질문 몇개쯤 갖고 산다는 것은 내 삶의 방향을 확정해놓은 듯한 해답 몇가지를 갖고 사는 것보다 훨씬 나은 선택을 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할법한 거의 모든 질문은 고대인들이 이미 많이 던져놓았기 때문에 삶에 질문하기 시작하면 고전과의 연결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그래서 서양고전을 공부한 저자가 고대그리스로마를 관통하는 조언들을 해주고 있는 것을 읽다보면 그 필연성을 조금은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0 들어가기 전에 - 어떻게 질문할 것인가? > 팩트 체크부터 에포케 까지
플라톤은 그러한 국가를 '칼리폴리스(Kalipolis)'라고 표현했어요. 폴리스polis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를 말합니다. 앞에 붙은 칼리Kali는 아름답다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상적인 국가를 강국이나 부국, 정의실현국가라는 식으로 부르지 않고 '아름다운 국가'라고 했던 거에요. 그리스인들이 추구했던 아름다움이란 단순히 외적인 미美와는 다릅니다. 어떻게 보면 이익이나 윤리보다 더 상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p. 34)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프로네시스(phronesis)라는 말이 나오는데요, 이는 '실천적 지혜'라는 뜻으로, 지식을 의미하는 에피스테메(episteme), 참된 지혜 혹은 성스러운 지혜를 의미하는 소피아(sophia)와는 결이 다른 개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좋은 삶을 사는 것에 관하여 잘 숙고하는 사람'이 실천적 지혜가 있는 현명한 사람이라고 설명했습니다. (p. 37)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에 비해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같은 시기에 퓌론이라는 사람이 이끈 '회의학파'가 있었습니다. 회의론자들은 '에포케(epoche)'라는 걸 강조했는데요, 이 에포케라는 말은 '판단 중지'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고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겁니다. (p. 38)
그리스 고전을 읽다보면 원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가 번역되면서 잘 전달되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그럴때마다 원문 자체로 읽지 못하는 나의 모자란 능력에 아쉽기도 하지만, 이런저런 책들에서 원어가 가졌던 뜻을 발견할 때마다 더욱 반가운 마음이 들곤 한다. 아 이런뜻이었구나 하며 새삼스러운 깨달음을 얻곤 한다. 플라톤의 국가 가 칼리폴리스 였구나... 아름다운 국가 라... 굉장히 고대그리스인적인 표현이다!
저자가 중요시하는 '에포케' 도 신선했다. 지지부진하고 회의스러운 회의론이 아니라 '판단중지' 라는 보류개념은 신중해 보였다. 회의스러운게 아니라! ㅎㅎ
1 첫 번째 문 - 나는 누구인가? > 세상을 향한 질문의 시작
꿈은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그 결핍이 주는 아픔과 그 아픔을 이겨내려는 몸부림에서 자연스럽게 피어나지요. 하지만 다른 생각할 필요 없다고 말하고 부족한 것도 없다 말하면서 무슨 꿈을 꾸라는 건가요?(p. 47)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도 섣불리 답을 내리며 단정하고 확신하기에 앞서 끊임없이 판단을 중지하는 '에포케'가 필요합니다. 판단을 중지하고, 다시 한번 묻도 확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나'의 진짜 모습을, 의식하지 않은 부분까지도 생각하며 살 수 있을 것입니다. (p. 73)
꿈은 결핍에서 온다.. 잊고 있었다. 요즘 꿈이 없다는 아이들이 많지 않은가...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줬는데 왜 너는 꿈이 없냐고 말할 게 아니다. 부족한게 없어서 꿈을 꿀 수 없는 것이다. 꿈은 스스로의 성장동력이다. 타인이 갖추어준 것들로만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동력 찾기란 오히려 어려울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은 '너 자신을 알라'는 격언을 바로 떠올리게 한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 격언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 아니라 델피 신전 입구에 새겨져 있던 말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 말의 핵심을 늘 중요시했다. 저자는 이 격언과 더불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해주며 '너 자신을 안다고 착각하지 말라' 는 격언을 남긴다. 저자의 말처럼, 내가 누구인지 알려는 과정중에 '에포케' 는 꼭 필요한 자세인 듯 하다.
2 두 번째 문 - 인간답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 세상에 새겨 넣는 나의 무늬
소크라테스는 아무 이야기나 들려주면 안 된다고 말해요. 시인들을 잘 감독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는 사람들만 남기고 거짓을 쓰는 자들은 쫓아내고자 합니다. 그들이 쓴 것들은 가르쳐서도 안 된대요. 그러면서 언급하는 대표적인 시인들이 바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서슬 퍼렇게 이야기해요. 내가 그분들을 존경하긴 하는데 애들한테는 그들이 지은 이야기를 가르치면 안 돼, 라고 말이지요.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그들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신들이 너무 못된 거예요. 도대체 그리스 신들의 역사라는 게 불량하기 짝이 없어요. 이런 이야기들이 사회 곳곳에 퍼지면 가정에도 사회에도 국가에도 질서가 잡힐 수 없다고 소크라테스는 끌탕이었어요. 당연히 헤시오도스의 시를 가르치지 말라고 금지한 거죠. 소크라테스는 진실 같은 거짓말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어지럽힐까 봐 걱정이었던 거겠지요. 도덕성이라곤 없는 것 같은 이야기들도 알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걸까요?(p. 86~88)
플라톤이 '국가' 라는 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한 위 이야기는 이 책의 말미에 다시 등장하면서 플라톤의 걱정을 불식시킨다.
신과 이성, 무의식을 거쳐 현대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시대마다 장소마다 사람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달랐고, 그들 중에 어떤 것도 정답이라고 딸 잘라 말하긴 어렵지만, 그 질문만은 결코 틀리지 않고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본능을 해결하는 것만으로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없는 존재로서 인간다움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p. 99)
인간적인 삶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지금까지 내가 만들어온 발자국의 궤적을 돌아보고, 얼마나 인간적인 삶을 살았나를 물어보십시오. 만족스럽지 않다며 지난 날을 후회하고 과거를 지우려고 하기보다는, 앞으로 어떤 길을 만들며 어떤 자취를 남기고 갈 것인지를 꿈꿀 수 있는 힘으로 바꿔보십시오. 그것을 고민할 때 비로소 우리는 더욱 인간다워질 것입니다. (p. 103)
저자가 알려주는 헤시오도스의 고전속 신들의 이야기는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한다. 신화는 인간적이지 못한 설화들을 통해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나는 그런 모습들과 얼마나 다른가? 얼마나 다를 것인가?
3 세 번째 문 -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토록 치열하게 사는가 > 삶과 죽음의 아이러니
세익스피어의 <햄릿>의 유명한 구절인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원문은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이므로 그대로 번역하자면 '있음이냐 있지 않음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어야 해요. 세익스피어는 '삶과 죽음' 보다도 더 깊은 문제가 '존재와 무' 라는 것을 드러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p. 110)
세익스피어는 그리스 고전을 참 알차게 응용했구나 싶다. 그리스고전을 읽기전에는 세익스피어의 모든 작품들이 순수 창작물인줄 알고 그는 천재구나 싶었다. 하지만 그의 대부분의 작품은 그리스고전에서 차용 이나 응용 등 으로 활용한 것들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극적으로 잘 쓰긴 했지만 그래도 감흥이 전과 같진 않았더랬다.
여하튼, 저자가 파르메니데스와 연결지어 말해주는 햄릿의 유명한 문장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었다. 정말 그랬다.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었네?! !!!
칼륍소는 그리스 말로 '가리는 자'라는 뜻입니다. 칼륍소와 같이 산다면 오뒷세우스는 감춰집니다. 오귀기아섬에서는 행복할지 모르지만, 인간 세상에서는 완전히 잊히는 것이지요. 오뒷세우스가 칼륍소의 곁을 벗어난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망각에서 벗어나 기억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오뒷세우스는 아킬레우스와 같은 선택을 한 거에요. 영원히 기억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말이지요. (p. 128)
고전은 우리에게 정다블 알려주지 않습니다. 하지만 귀중한 실마리를 제공하지요.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 는 우리가 인생의 기로에 섰을 때 치욕적인 행동 대신 아름다운 성취를 추구하게 하며, 현재의 안락함에 안주하기보다는 고난을 헤쳐 나가도록 이끌어줄 것입니다. '살아가는 힘'을 주는 셈이지이요. (p. 132)
삶과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인간임을 인지한 순간부터 내내 이어여오는 최대의 질문이자 난관이 아닐까 싶다. 저자가 알려주는 '일리아스' 와 '오뒷세이아' 이야기는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는 속담을 떠올리게도 한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명예' 는 생물학적 목숨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이러한 판단기준은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기에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은 인간이라면 내내 하게 되는 원초적 질문인지도 모르겠다.
4 네 번째 문 - 어떻게 살아야 만족스럽고 행복할 수 있을까? > 인생이라는 영화에서 멋진 주인공이 되기 위해
나는 내 인생의 시인이고 주인공임을 어느 순간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나의 이야기와 역사를, 그리고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사람임을 부디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p. 157)
오비디우스 시를 예로 들어 저자는 진정한 주인공으로 사는 삶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는 지금 읽어도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 책인데... 살아있는 동안 주인공으로 사느냐 죽은 이후에 주인공으로 남느냐 하는 것은 다시 한번 앞에서의 질문을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5 다섯 번째 문 - 세상의 한 조각으로서 나는 무엇일 수 있을까? > 개인은 미약하나 시민은 강하다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그걸 딛고 일어설 힘을 낼 수 있는 때인 것이지요. (p. 169)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을 자각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가 되리라 긍정적으로 보게 됩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영이나 계층, 세대를 불문하고 대다수 시민에게 판단력이 생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역시 안 될 거라며 자조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p. 183)
아테엔 아고라가 있었고, 로마엔 포럼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에겐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촛불 가득한 광장이 있다. 나에서 출발한 질문은 어느새 사회를 향한 질문으로 확장되게 된다.
6 여섯 번째 문 - 변화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교육에 대하여
저는 다음 세대에게 사다리를 놓아주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다리의 용도는 그 위에 이르는 것입니다. 어느 지점으로 가기 위한 것이죠. 교육자는 사다리를 줘야 해요. 그러면 학생들은 사다리를 끌어서 타고 올라갈 것이고, 그게 필요하지 않다면 그냥 버릴 수도 있을 거에요. 버려질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최대한 튼튼하고 좋은 사다리를 주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걸 통해 더 좋은 곳으로 향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붙들고 말이지요. (p. 203)
저자는 교사였다고 교수로 계속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프랑스 유학시절 경험한 그곳의 교육지침은 지금의 우리 교육현실에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었다. 어느 것이 더 좋다 판단하기 보다는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되새겨 보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7 일곱 번째 문 - 평범한 우리들의 이야기는 역사가 될 수 있을까? > 역사의 발전을 위해 우리가 넘어야 할 것
그리스 신화는 기존의 틀을 부수고 뛰쳐나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에게 본능적으로 있는 자유이 욕망을 자극하면서 말이죠. 어떻게 보면 그런 가르침이 그리스가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던 힘 같기도 합니다. 바로 그 힘이 로마로 이어지고, 서구 세계에 퍼져서 그들이 근대를 이루면서 어느 순간 폭발하는 것처럼 굉장히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리스 문명의 영향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아이들에게 모험심을 강조합니다. (p. 233)
저자는 카오스에서 시작한 그리스 신화를 가이아, 타르타로스, 에로스 에서 제우스 까지의 '친부살해전통'에 숨어있던 의미를 찾고자 한다. 틀을 부순다는 은 늘 틀을 지키려는 보수와 틀을 부수려는 진보사이의 경계선을 긋게 한다. 하지만 이 경계선은 세대를 반복하며 유지되는 역사의 흐름이기도 하다. 세대차이를 느낀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 스스로가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자각일 수 있지 않을까.
새로운 세대가 강요로 느끼는 기성의 틀은 기성세대가 어렸을 때 그 이전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것이었음을 기억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가 기존의 틀을 깨고 만들어낸 새로운 틀은 그 이후에 태어날 새로운 세대에게는 낡은 것이 된다는 것도 또한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이런 역사의 흐름을 또렷하게 인식하고 생생하게 상상한다면, 청년들은 기성세대의 틀을 깨고 나오려고 도전하면서도, 그것을 만들려고 혼신의 힘을 다했던 어른들에게 존경의 표하는 기품 있는 태도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유와 아량의 품격을 갖춘 어른과 패기 있으면서도 존경심을 잃지 않는 기품 있는 청년 사이의 맞대결은 얼마나 건강하고 아름다운 가요. (p. 241)
저자가 말하는 이 건강한 두 세대의 모습을 꿈꾸어 본다.
8 여덟 번째 문 - 타인을 이해하는 일은 가능한가? > 갈등을 넘어 화합으로 가는 길
비극이 아테네 시민들에게 욕망의 절제라는 메시지를 던졌다면, 축제는 일정 시기마다 각계각층의 욕망을 분출시켜주었던 거예요. 이것이 사회 갈등을 해소해나가기 위한 그들만의 방식이었습니다. (p. 269)
한 사람 안에 누적된 이야기는 곧 그 사람의 세계가 됩니다. 이야기를 공유한다는 건 결국 같은 세계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도 가까이 묶어주는 힘이 되지요. (p. 282)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메데이아'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타인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말해준다. 하지만 그러한 비극을 제의와 함께 공유했던 그리스인들이 올릭픽 같은 축제를 통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었는지도 이야기한다. '나' 와 '너' 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로 묶인다는 것은 이야기를 공감한다는 것이다. 역사를 함께 안다는 것이다.
9 아홉 번째 문 - 잘 적응하려면 무엇을 공부해야 하는가? > 고전과 인생의 상관관계
고전은 영어로 클래식(classic)이라고 합니다. 클래식은 라틴어 클라시쿠스(classicus)라는 말에서 유래했어요. 클라시쿠스는 '클라시스classis'와 '쿠스cus'가 결합된 말인데, 이중 쿠스는 '~한 사람'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쿠스 앞에 있는 클라시스 라는 말은 원래 '무리' 혹은 '계급'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노예, 평민, 기사, 귀족 계급이 있다면 그 각각의 계급이 모두 하나의 클라시스인 겁니다. 특정한 사람들의 무리인 거죠. 로마시대에 클라시쿠스는 좀 더 특정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즉 '함대'를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클라시쿠스 라고 한 것이죠. 로마에서 클라시쿠스란 함대를 내놓을 수 있는 부자 계급을 의미했습니다. 반대로 전쟁이 났을 때 국가에 자식밖에 내놓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프롤레타리우스(proletarius)'라고 불렸지요. '프롤레스proles'가 라틴어로 '자식'이거든요. 클라시쿠스라는 명칭을 받을 수 있는 클라시스는 주로 귀족 계급이었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지요. 이런 이유로 클라시쿠스는 '클라시스 중의 클라시스로, 모두가 선망하는 계급에 속하는 사람' 이라는 뜻을 갖데 되었어요. 클라시쿠스는 최고 수준의 지위이자 능력이었고, 거기에 맞는 자격과 품격을 갖추어야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보여주는 모든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하나의 모범이요 지표가 되었어요. 이와 같은 이유로 클라시쿠스라고 하면 어떤 분야에서 최고 수준임을 뜻합니다. 가장 높은 클라시스에 있는 것, 바라보는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무엇, 감탄을 자아내는 탁월한 그 무엇, 그것이 바로 클라시쿠스, 클라식, 고전의 핵심입니다. (p. 291~293)
아무나 될 수 없었던 선망의 대상인 클라시쿠스, 하지만 지금은 누구나 접할 수 있게 된 다양한 분야의 클라식 즉 고전들, 그러니 그 영광을 마다할 이유가 무어 있겠는가? ^^ 인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깊이를 더해주는 고전을 함께 한다면 더욱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라는 저자의 조언에 크게 고개 끄덕여보며, 오늘도 나는 책을 덮자마자 또다른 책을 골라본다. 자신들을 읽어보라며 슬쩍슬쩍 힌트를 주는 책들이 참 많은 세상 아닌가.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