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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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초, 에피쿠로스의 현존 원고 전체8편 그리스어 완역

어떤 욕망에도 흔들림 없이 살게 하는 '아타락시아'를 누리는 길

내용은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학창시절 외우기에 나름 소질있었던 사람이라면 자동반사처럼 외워진 개념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에피쿠로스 하면 쾌락주의 라는 댓구가 아닐까 싶다. '쾌락'이라는 어감상 쾌락주의라고 하면 왠지 방탕스럽고 타락적인 어떤 욕망을 탐닉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데 '쾌락주의'만큼 잘못 번역된 사례가 또 있을까;;;; <서양의 노자, 에피쿠로스를 통해 배우는 평정심을 통해 행복에 이르는 길> 이라는 뒷표지의 문구처럼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사실 스스로의 마음을 수련하고 단련하여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수도의 과정과 비슷하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은 완전한 평정심 '아타락시아'를 추구하기에 '쾌락'이라는 어감이 주는 느낌과는 너무 상반되는 철학인 것이다.

'쾌락주의'를 통해 진정한 행복은 방탕과 욕망 충족이 아니라 모든 정신적·육체적 고통으로부터 해방에 있음을 강조하여 자연주의 철학과 마음돌봄 조류의 선구자가 되었고, 관찰과 추론에 대한 확고한 주장으로 과학적 사고법의 시조로 인정받는다. 그는 이후 500년 동안 지중해에서 가장 존경받으면서도 동시에 가장 경멸받는 철학자였다. 에피쿠로스학파는 600년 정도 지속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현대의 자연철학과 평등주의, 미니멀리즘 사상에도 정신적 배경이 되어주는 등 그영향력은 여전히 견고하다. (책 앞날개 내용 中)

책의 앞날개에서 에피쿠로스의 생애와 그의 철학을 간략하게 잘 정리해놓았는데, 그 소개글 중 '그의 학교는 고대 그리스 철학 학파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여성을 받아들인 최초의 학교였다.' 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철학이 당대에 존경과 경멸을 동시에 받게 된 이유는 여성도 평등하게 대했다는 선구자적 마인드 때문이기도 했다.

사상은 시대와 떼어놓을 수 없는 법, 에피쿠로스의 생애는 고대그리스가 마케도니아에 망하고 권력의 부재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살았기에 그의 철학은 그러한 혼란에서 완전한 평정심을 추구하게 되었고, 나름 융성하게 퍼져나가던 그의 철학이 쇠락한 시기는 기독교의 전파로 개인의 철학이 아닌 공동체적 종교가 자리잡아가면서 부터였다. 에피쿠로스는 신을 부정한 것은 아니지만 종교화되는 신에 대해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 모든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에피쿠로스에게는 모든 사람에 대한 인간애가 있었다는 것이다. (p. 20)

이제 나는 에피쿠로스의 모든 철학이 집약된 그의 세 편의 편지를 제시하여, 그가 이 저작들을 통해 무엇을 생각하고 가르쳤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나는 그의 [주요 가르침들]과 그가 한 말 중에서 인용할 가치가 가장 높은 것들을 선별해 제시함으로써, 당신이 에피쿠로스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알고 판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에피쿠로스 철학은 규범론, 자연학, 윤리학 이렇게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p. 35)

고대 철학자들의 저서가 온전히 전해지는 경우가 거의 없는 것처럼 에피쿠로스의 직접 저술한 저서도 전해지는 것이 없다. 이 책은 에피쿠로스 사후 약 500여년이 지난 시점의 로마시대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가 쓰고 정리한 글을 원전완역한 책이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느낌이 쾌락과 고통, 이렇게 두 가지라고 말한다. 느낌은 모든 살아 있는 것에서 생기는데, 본성에 고유한 것은 쾌락을 낳고, 본성에 이질적인 것은 고통을 낳는다. 쾌락과 고통에 근거해 선택과 회피가 결정된다. 탐구하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은 실제와 관련되고, 어떤 것은 단지 말과 관련된다. 이것이 철학의 구분과 진리의 기준에 관한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의 기본 입장이다.

주석> 고대 그리스인들은 본성에 고유한 것을 아가토스' 즉 '좋은 것' 또는 '선'이라고 하고, 본성에 이질적인 것을 '카코스' 즉 '나쁜 것' 또는 '악'이라고 했다. 이렇게 그들에게는 자연학과 윤리학이 서로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이 '선'이나 '악'이라고 말했을 때 윤리적인 관점에서만 보아서는 안 된다. (p. 39)

역자 박문재의 현대지성 클래식 그리스어원전완역본을 여러 권 읽었기에 이번 책에서도 믿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역시나 주석과 해제가 탄탄해서 읽기 좋았다. 책을 읽는 내내 '쾌락'이라는 단어를 쾌락이 아닌 다른 단어로 읽을 때 좀더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이해되어지는 면이 있었다. 쾌락이라기 보다는 즐거움 이나 만족 같은 단어 말이다. 어찌되었든 에피쿠로스 철학에서 쾌락은 고통의 반대어다. 이 점만이라도 주지하고 있으면 쾌락의 오해에 덜 빠질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완전한 축복과 불멸을 누리는 어떤 존재가 천체들의 운동,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천체가 뜨고 지는 것을 비롯한 유사한 현상들을 이제까지도 정하고 주관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주석-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론적 사고에 젖어 이 모든 천체 운동과 현상을 신이 주관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완전한 축복'과 '불멸'이라는 본성을 지닌 신들은 이런 일들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 (p. 67)

우리는 이것(천체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신적 존재를 끌어들여서는 안 되고, 신적 존재를 이런 일로부터 해방시켜 완전한 행복의 상태에 있게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천체 현상의 원인에 관한 모든 탐구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p. 84)

천체 현상은 여러 방식으로 설명해야 하므로 오직 한 가지 원인만을 고집하는 것은 미친 짓인데도, 생각없는 천문학을 신봉하는 자들은 이런 천체 현상에 공허하고 헛된 오직 한 가지 원인만 제시하며, 신적인 존재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운다. (p. 94)

신은 불멸하고 축복받는 행복한 존재라는 사실을 훼손하지 않는 것만 모두 신에게 속한다고 생각하라. 신들은 존재하고, 신들에 대한 지식은 분명하다. 하지만 신들은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p. 108)

고대에는 인간이 밝혀내지 못한 자연현상들에 대해 신적 존재를 대입시킴으로써 설명하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사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기원전에 이미 에피쿠로스는 그러한 사고방식의 문제점과 한계를 지적했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이 자연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이 실제 보고듣고느끼는 현상들에 대한 제대로 된 이해만이 참된 깨달음을 얻게할 수 있었다. 미신적이고 신화적으로 절대존재에 대한 믿음이나 불안 보다 제대로 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로운 마음을 추구하는 것,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지금 봐도 굉장히 혁신적인 면이 있어 보였다.

에피쿠로스가 추구하던 쾌락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소박한 생활은 금욕이 아나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엇다. 따라서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불교의 수련이나 도교의 무위를 생각나게 하기도 해서 고대철학들의 여러 사조들 중 분명 차별성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이후의 철학은 극한의 금욕주의나 극한의 종교주의적 철학만 남은 것을 보면 '평화'를 추구한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참 어려운 일같다. 여하튼,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마음대로 누리는 방탕한 쾌락이 아니라는 점만 제대로 알고 있어도 좋을 것 같다.

이 얇은 책에서 소개하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듬성듬성하다. 원전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남은 자료들을 완역한다고 해서 그 철학이 메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자는 해제에서 고대 그리스의 철학들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대해 짧지만 명쾌하게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여기서 '쾌락'은 '고통'의 반대말로 '즐거움'으로 번역해도 되는 단어이고, 실제로 에피쿠로스는 방탕한 쾌락은 참된 쾌락이 아니라도 단호하게 말했으므로, 우리말에서 부정적인 어감을 보이는 '쾌락'이 적절한 번역이라고 할 수는 없다. 게다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대체로 인간의 '행복'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로 삼았다는 점에서, 에피쿠로스가 행복을 쾌락(즐거움)과 연결한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는 없다. (p. 170)

책의 이해를 돕는 그 다양한 설명들 중에서도 나는 초반의 위 구절이 그간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받아온 오해를 날리는 데 가장 중요한 내용이 아닐까 싶다. 그 쾌락이 그 쾌락이 아니라는 말이다. 내가 정말 안타까워서 자꾸 이 쾌락에 대한 오해를 얘기하게 된다;;;

에피쿠로스는 본성적인 욕망의 적절한 충족을 통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아포니아), 다른 한편으로는 감각에 따른 참된 지식으로 모든 거짓된 판단으로부터 해방됨으로써 '아타락시아'(마음에 소란이 없는 평정한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함으로써 견유학파가 지향하는 금욕 생활과 고행은 본성적인 것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p. 187)

에피쿠로스 학파는 600년 정도 지속했고, 그가 죽은 후에도 그의 철학은 거의 그대로 보존되었다. (p. 192) 에피쿠로스 철학은 그리스본토를 넘어 지중해 세계 전체로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중략) 하지만 기원후 1~2세기에는 로마의 전통적인 가치에 더 부합했던 스토아학파 철학에 밀려 쇠퇴하기 시작했고, 기원후 3세기 이후에는 기독교가 로마 전역에 확산되면서 급속한 쇠락의 길을 걷다가, 기원후 5세기에는 거의 소멸되었다. (p. 193)

에피쿠로스는 천체 현상에 관한 이전 자연철학자들의 여러 설명 중에서 어느 것이 옳거나 가장 나은지를 판단하지 않고, 오로지 이 유추에 따른 판단에 비추어 부적합한 것이 아니라면 모두 그대로 채택해 제시한다. 천체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피쿠로스 철학의 중심은 자연학이 아니며, 원자론적 세계관과 인식론에 입각한 윤리학이라고 할 수 있다. (p. 196)

고대의 문헌들이 오랜 세월 보관되어져 오는 과정에 이런저런 선택들이 있었을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그 많았다는 책들이 단 한권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것은 과거 어떤 시대의 철학들과 상충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더욱 안타까울 뿐인데... 생활방식과 신과 종교를 떠나 그저 '철학'으로서 받아들여지고 유지계승되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미련을 가져본다. 그랬더라면 사람들의 본성이 좀더 착해지지 않았을까 싶다는;;;; 그래서인지 '철학'을 해야 한다는 에피쿠로스의 조언이 이 책을 읽는 내내, 읽고 나서 가장 내 마음에 남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철학할 나이가 아직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났다고 하는 것은 아직 행복할 나이가 되지 않았다거나 이미 지났다고 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젊었든 늙었든 철학을 해야 한다.

행복하다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고, 행복하지 않다면 행복하기 위해 모든 것을 할 것이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것을 해야 한다.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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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전쟁 -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임용한의 시간순삭 전쟁사 2
임용한.조현영 지음 / 레드리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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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례에 걸쳐 벌어지며 승자와 패자가 끊임없이 뒤바뀐 중동전쟁.

이스라엘은 어떻게 결국 승리를 거머쥐었을까?

중동국가들은 왜 패배했을까?

그리고 이 전쟁은 무엇을 남겼을까?

임용한이 말하는 중동전쟁의 본질!

이런저런 세계사책을 읽으며 항상 느꼈던 건 우리가 알았던 세계사는 세계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사엔 다른 지역보다도 특히나 중동지역의 역사가 너무나 빈약했다. 현대사의 주인공은 서쪽인지 몰라도 문명의 태동은 동쪽에서 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 동쪽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서쪽보다는 동쪽의 역사에 제대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중동 전쟁'이라는 제목부터 '토크멘터리 전쟁사, 차이나는 클라스 출연' 이라는 홍보문구까지 이 책은 역사에 관심있는 나로서는 궁금해지는 책이었다. 그런데 저자의 이력을 보니 한국사 전공이다. 음? 그래 뭐 역사로 이어져 이어져 중동사에 세계사까지 섭렵했을 수 있지... 그런데 중동전쟁이 알고보니 이스라엘이 일으킨 전쟁을 말하는 거였다. 음? 내가 생각한 중동이 그 중동이 아니었네;;; 그래 뭐 그래도 중동지역에서 여전히 가장 첨예한 분쟁지역이니 알아두면 좋을 전쟁사겠지...;;;

저자는 본문을 시작하기에 앞서 '작가의 말'에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 아니다. 기록을 남기는 자가 역사의 승자다. (p. 5)' 라고 말하며 자료수집 당시 이스라엘 쪽 자료 외에 다른 자료들은 그닥 많지 않아 본의아니게 분량을 양쪽 공정하게 할당하는 것은 불가능했음을 밝힌다.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이른바 중동전쟁의 시기는 1948~1973년 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가 봤을때, 어떤 전쟁사...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건국기에 가까웠다. 뭐.. 이스라엘이 그들이 일으킨 전쟁을 바탕으로 국가를 건설했으니 그게그거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룸멜의 시선을 따라 동쪽으로 500킬러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한적한 이집트군 진지. 중위 가말 압델 나세르는 고요하고 황량한 사막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어. 아무것도......" 나세르 중위는 마음 속으로 타는 분노를 삭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룸멜의 등장으로 제2차 세계대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전투가 북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정작 그 땅의 주인인 이집트군은 할 일이 없었다.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영국은 이집트 정예 사단의 무장을 해제하고 병력을 후방으로 돌렸다. (p. 13)

일면 소설처럼 시작되는 이 책은 전쟁사 책이지만 종종 이런 식의 서술을 함으로써 가독성을 높여주곤 한다. 하지만 문제는, 앞뒤 정황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배경지식 없이 본문 자체만으론 서사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외국인 이름은 이름만으론 어느 나라 사람인지 알 수 없었고 세계대전의 양상이 어떤 상황이었던건지 설명이 없기에 소설 속 화자처럼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레이션을 공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게 첫 장이다. 생선을 먹었는데 머리도 꼬리도 없이 몸통 한가운데만 먹어서 무슨 생선인지 알 수 없는 상태의 시작이었달까.

팔레스타인, 성경에는 '가나안, 비옥한 초승달 지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언급된 이곳은 이집트와 시리아 사이에 지중해 연안을 따라 가늘게 뻗어 있는 지대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말은 '농사가 신통치 않아 유목으로 살아가는 지대'라는 뜻이기도 하다. 말처럼 비옥한 지대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북부의 레바논과 시리아처럼 무역으로 부를 쌓는 도시도 없었다. (p. 21)

유대인을 유대인으로 만든 특별한 조항은 바로 '토지 소유 금지'였다. 이것이 유대인을 영원한 이방인으로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p. 23)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좋은 의미인줄 알았더니 저렇게 해석하면 또 꼭 그렇지만도 않아보여서 신선하게 다가왔다. 유대인의 계율에 토지소유금지 조항이 있어서 디아스포라가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그런데,

오스만제국이 지배하던 팔레스타인은 제국 지배령 중에서도 가장 낙후하고 가난한 곳이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 지주들에게 토지를 매입하고 자그만한 정착촌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p. 28)

가난한 팔레스타인 농부들은 대부분 아랍인 지주의 소작인으로 살았다. 조상 대대로 땅에 뿌리를 두고 살아가는 이 불쌍한 농부들은 자신들이 이 땅에 대해 법적 소유권이 없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니, 굳이 인식하려 하지 않았다. 수천 년 동안 이 땅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았고, 등기상의 소유주가 누구든 땅을 갈고 소출을 먹는 사람들은 자신들이었다. 이거이 농부의 마음이고 농부식의 소유권이었다. (p. 49)

유목으로 살아가는 땅이라더니 토지소유를 할 수 없는 유대인이라더니,

농부로 살아온 팔레스타이인들이 아랍인들에게 땅을 사들인 유대인들에게 밀려났단다.

이 간극에 대한 부연 설명은 없다. 역사는 사실 자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객관적 사실만 전달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시작부터 이 책은 객관적역사를 사실 그대로 연대기적으로 제시하는 서술을 선택하지 않았다.

게다가 저자는 간혹 지나친 사견을 피력해서 읽는 이를 좀 거북하게 만들때가 있는데, 예를들어, 유대인들에게 국가건설이라는 로망을 심어주었던 헤르츨 가문의 비극을 다루면서 일찍 세상을 떠난 헤르츨의 아들을 보호하러 나선 프로이트에 대해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의 개척자이긴 하지만 허황된 이론을 내놓기 일쑤였다. 수제자인 융도 프로이트의 집요한 엉터리 해석에 질려 영원히 그를 떠났다. (p. 36)' 라는 표현은 특히나 거슬렸다. 개인적으로 프로이트를 존경하고 있고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배경을 다른 책으로 이미 알고 있던 나로서는 저런 문장은 왜곡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이 전쟁사를 서술함에 있어 좀더 자연스러운 맥락적 보충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았을까?

이러한 아쉬움은 본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전쟁사를 훑어감에 있어서도 또한번 느껴졌는데, 연대기적 서술을 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이스라엘쪽에서 다시 아랍쪽에서 서술하다보니 중복되는 경우가 있을 수밖에 없는 건 알지만 그 앞뒤 설명이나 연결에 대한 설명이 없어서 읽다보면 어?아까읽은것같은데? 하는 부분들이 자꾸 나와서 정리가 잘 되지 않았다. 여하튼, 전쟁은 펼쳐졌고 점차 강도도 세져간다.

팔레스타인은 태어나자마자 타향에 버려진 신생아나 다름이 없었다. 아랍 국가들이 신생아를 돕기 위해 모였지만, 순식간에 이해관계가 복잡해졌다. (p. 88)

여기서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이 있다. 아랍국가들이 역사는 오래됐지만 오스만제국이나 서구 식민지에서 벗어난 지는 얼마 되지 않는, 근대 국가로 따지면 신생 국가나 다름이 없다는 점이다. 국민의 교육, 기술, 문화 수준은 더욱 그랬다. 정치는 안정되지 않았고, 군대는 준비되지 않았다. (p. 89)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분명한 사실은 딱 한 가지 뿐이다. 1948년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 질서는 아직 없었다. (p. 99)

총체적 난국이었고 이 혼란스러운 와중에 가장 실속을 챙긴건 이스라엘 이었다. 그러니 나라까지 만들어냈겠지.

여기저기서 총탄이 날아다니고 전투기가 날아다니며 전쟁 전투 씬이 아무리 격화되어도 서사적 연결 맥락은 여전히 뚝뚝 끊겨서 흐름을 잡으며 읽기가 힘들었다. 예를들어,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감정선을 유지하는 나라가 있었다. 북쪽의 이웃 시리아다.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는 마치 한국과 일본처럼 해묵은 적개심이 존재한다. (p. 250)' 이라고 시작하고 시리아와 이스라엘 사이의 전쟁을 설명하면 나같은 사람은 대체 왜 그 두나라에 해묵은 적개심이 있는데? 라는 궁금증이 해결되지 않아서 전쟁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저자는 늘 부연 설명이 없다.

이스라엘의 계산된 폭력은 대책 없는 폭력보다 더욱 무서웠다. (p. 185)

이스라엘군의 대응은 항상 도가 지나쳤다. 단순히 '적이 1발을 쏘면 우린 10발로 갚아준다'라는 보복 심리가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p. 251)

저자는 '우리가 아는 사실은 이런 불완전한 평화마저도 먼 길을 돌아와야 했고, 절대 변할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의 변화와 깨달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깨달음은 인간의 어리석음과 결합한 증오와 편견은 평화를 향한 의지보다 더 강하고 질기다는 것이다. (p. 534)' 라며 중동전쟁사를 마무리하지만 나는 사실 이렇게 1970년대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현대까지 이야기를 이어와야 하지 않았나 싶어 아쉬운 마무리였다. 이 책의 부제에서 '전쟁이 끝나면 정치가 시작된다' 라고 하지 않았나? 그 정치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것은 아마 그 이후일텐데 싶어서 말이다...

여하튼, 이런저런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팔레스타인 땅에서 이스라엘이 벌인 전쟁에 대해 시작과 전개를 거쳐 이스라엘 건국기를 살펴볼 수 있는 책이었기에 그 유용성은 어느 정도 있다 할 것이다. 그래도 다음엔 좀더 자연스러운 연결과 배경설명이 세세한 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이 전생사 시리지의 한 권이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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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카즈무후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2
마샤두 지 아시스 지음, 임소라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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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하게 그리려고 할수록 희미해지는

진실과 의심의 경계

세상은 넓고 작가는 많다!

새로운 소설을 읽게 될 때마다 느끼게 된다.

소설 읽기를 즐겨하는 이라면 때론 다른 나라의 작가와 작품에 대해 궁금증이 생길 것이다. 그렇게 이나라 저나라 여행하듯 읽다보면 세계문학을 접하게 되는데 그렇게 알게되는 작가들은 자주 낯선 이름이곤 한다.

마샤두 지 아시스

어느 나라 이름인지도 모르겠는 이 생소한 이름의 작가는 브라질 작가다.

소개를 보니 브라질의 국민작가인 것 같은데, 기왕 세계문학을 접한다면 늘 대표적 작가부터 시작하고 싶은 이 소심한 호기심이 이번에도 덜컥 이 낯선 소설을 손에 들게 했다.

황폐해진 마음에서 소설의 경계까지,

질투와 의심이란 작은 돌멩이 하나로 허물어뜨리는 작품

브라질의 대문호이자 심리소설의 대가인 마샤두 지 아시스의 대표작이다. 국내 초역이며, 아시아권 언어로 번역되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그가 남긴 열 편의 장편소설과 이백여 편의 단편소설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손꼽힌다. 브라질에서는 국민 대부분이 알고 있으며 현재까지 드라마, 영화, 연극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다 - 소설가 정소현 추천사 中 -

인터넷서점의 책소개글에서 읽게된 추천사 또한 이 책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독자는 숨은 단서를 포착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소설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다. 읽을 때마다 문장 이면에 숨겨진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지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믿을 수 없는 화자와 알 수 없는 진실은 독자를 좀처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정소현 소설가)' 라는 책 뒷표지의 글은 이 책에 대한 일말의 망설임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읽은 소설을 다시 읽는 편이 아닌데 한번에 이해 안되는 문장들이 많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설레임반 걱정반으로 브라질 소설의 첫 문을 열어젖혔다.

나에게 '동 카즈무후'라는 별명이 생겼다. 말이 없고 은둔형 기질인 나를 좋아하지 않았던 이웃들이 사용하던 말이 결국 별명이 되어버렸다. (중략) 굳이 사전을 찾아보진 말길 바란다. 여기서 '카즈무후'는 사전적 의미가 아닌, 말이 없고 자기 세계에 빠진 사람에게 흔히 붙이는 별명이다. '동'은 귀족 냄새를 풍기기 위한 반어적 표현이다. (p. 8)

굳이 사전을 찾아보았다;;;ㅋㅋ 이 소설의 제목인데 무슨 말인지 모르는 단어였으니까. ㅎㅎㅎ

책의 목차는 따로 없었지만 작가는 한두 페이지마다 소제목들을 붙여 놓았다. 그렇게 148장까지 있는 이 소설의 첫 소제목이 '표제에 대하여' 이다. 그리고 역자는 주석에서 이 '동 카즈무후'라는 단어가 '무뚝뚝 경' 혹은 '퉁명 공'이라는 뜻의 포르투갈어 라고 설명해주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제목을 설명했으니 이제 책을 쓰고자 한다. (p. 9)' 라며 마치 회고록 처럼 읽히게 될 이 소설을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마샤두 지 아시스 라는 작가가 쓴 소설이자 무뚝뚝 경인 동 카즈무후가 쓴 소설인 셈이다.

나의 분명한 목표는 삶의 양 끝을 연결하여, 노년기에 이르렀을 때 젊은 날의 의미를 되찾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독자여, 나는 과거의 시간도 과거의 내 모습도 되살려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얼굴은 같은 사람인데, 인상이 달라진 듯했다. 내가 그저 누군가를 잃기만 한 것이라면, 괜찮았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군가를 잃은 상처를 어느 정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경우엔 모든 것을 잃은 것과 같다. 그 빈자리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p. 10)

나에게 남아 있는 친구들은 최근에 만난 사람들이다. 옛 친구들은 모두 영적 세계의 지질학을 연구하러 떠났다. (중략) 그러나 다른 삶이 더 나쁜 삶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저 다른 것이다. (중략) 사실 나는 되도록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고 입도 잘 열지 않는다. 외출하는 일도 드물다. 대부분의 시간을 텃밭과 정원을 가꾸고 책을 읽는데 소비한다. 잘 먹고 잠도 설치지 않는다. 지금은, 모든 것은 시들해지기 마련이듯, 이 단조로움 역시 결국 나를 지치게 했다. 변화를 꾀하고 싶었고, 책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p. 11)

'나'는 비교적 윤택하게 혼자 사는 건강한 노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잃어버린 것 같지만 실재의 삶에서 나는 거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옛날의 나를 아는 친구들이 저세상으로 가고, 그 과거의 나를 아는 이가 나만 남은 시점에서야 '나'는 과거의 나를 다시 되짚어 책으로 써보기로 한다. 젊은 날과 노년기의 삶이라는 양 끝을 연결하고 싶다는 것은 결국 그동안 젊은 날의 삶과 단절한채 살아와 노년을 맞았다는 이야기다. '나'는 왜 그렇게 모든 것을 단절하고 퉁명스럽게 귀족인양 굴며 살아온 것일까.

자, 그럼 절대 잊을 수 없는 11월의 어느 성대한 오후를 떠올려보자. 그날보다 더 좋거나 나빴던 날도 많았지만, 그날 오후만큼은 내 영혼에서 절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읽으면서 이해하게 될 것이다. (p. 12)

11월이었고, 연도는 정말 오래전이긴 하지만 오래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내 인생의 중요한 날짜를 변경하지는 않겠다. 1857년이었다. (p. 13)

1899년 발표된 이 소설의 배경은 발표된 당시로 봤을때 무척 현대적 시점이었다. 화자가 살아있는 시점과 독자가 읽고 있는 시점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 시절의 독자라면 화자가 말하는 시대를 자신의 과거처럼 회상하게 될 것이었다. 때는 입헌군주제로 브라질이 포루투갈 왕실에서 이어진 왕정아래 있던 시절이었다. 2022년에 읽는 독자는 이 시대적 간극을 염두에 두고 이 소설을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글로리아, 그 아이를 정말 사제로 만들어야 할까?"

"주께 맹세했으니 지켜야 해요" (p. 15)

"항상 함께 있으니까요..."

"몰래..."

"그 집에선 연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말들이 혼란스럽게 맴돌았다. (p. 35)

열다섯 살 소년 벤치뉴는 어느날 응접실에서 어머니와 어른들이 하는 이야기를 엿듣게 된다. 어머니가 자신을 신학교에 보내 사제로 키울 것이라는 말은 딱히 몰랐던 내용은 아니었다. 하지만 새롭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어머니에게 그 결심을 다시 상기시킨 사람, 하인까지는 아니지만 객식구로 더부살이 하고 있던 지아스의 밀고를 통해 벤치뉴는 어려서부터 함께 커온 친구 카피투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런저런 비밀 이야기가 내 안에 불러 일으켰던 감정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그 감정은 달콤하고 새로웠지만, 나는 그 원인을 캐내거나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회피했었다. 지난 며칠간의 침묵은 나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제야 나는 그것이 하다 만 말, 호기심 어린 질문들, 모호한 대답, 조심스러운 행동들, 유년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는 즐거움과 같이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카피투를 생각하며 잠에서 깨고, 그녀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들리거나 그녀의 발소리에 화들짝 놀라는 현상이 나타난 것도 최근의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p. 37)

그리고 다행히?! 카피투도 벤치뉴를 사랑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카피투는 자신의 감정을 벤치뉴보다 먼저 깨달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벤치뉴가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도록 더 과감하게 벤치뉴를 자극하고 있었다. 벤치뉴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가슴 벅찬 떨림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p. 38)' 첫사랑이었고 평생의 유일한 사랑이 될 터였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을 깨닫자마자 곧 닥쳐올 신학교 입학이라는 난제가 닥쳐왔다.

"나는 남자야!"

이 말을 세번째 반복했을 때 신학교가 생각났지만, 지나간 위험, 뿌리 뽑힌 악, 사라진 악몽에 대해 생각하는 이가 있을까? 나의 모든 신경이 나에게 남자는 성직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다. 나의 피도 같은 생각이었다. 다시 한번 카피투의 입술이 느껴졌다. 어쩌면 내가 입맞춤의 추억을 남용하는 측면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추억은 바로 그런 것이다. 지나간 옛 기억을 곱씹는 것이다. 그 시절의 모든 기억 중에서 가장 달콤하고, 가장 새롭고, 가장 포옹력 있고, 나 자신을 온전히 드러냈던 기억이 바로 이것이다. (p. 101)

벤치뉴와 카피투는 나름 작전을 짜기 시작한다. 이별하지 않을 수 있을, 사제가 되지 않을 수 있을, 둘이 함께한 맹세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다시피 사람의 영혼은 집의 구조와 같다. 사방에 창문이 나 있고, 많은 빛과 신선한 공기가 들어온다. 수도원이나 감옥처럼 창문이 없거나 창살로 둘러싸여 없는 것과 매한가지인 폐쇄적이고 어두운 곳도 있다. 또한 예배당과 시장, 소박한 농가나 호화로운 궁전도 있다. 나의 것은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직 '카즈무후'라는 이상한 별명도, '동 카즈무후'라는 경어법이 어울릴 만한 지위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두려움이 나의 솔직함을 가로막았지만, 문제는 열쇠도 자물쇠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문을 밀기만 하면 됐다. 에스코바르는 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를 여기 안에서 발견했고, 적어도 그때까지는 이 안에 머물러 있었다... (p. 159)

벤치뉴는 신학교에 들어가긴 했지만 사제가 되지는 않았다. 신학교에서 평생의 절친 에스코바르를 만난 것은 큰 축복이라 생각했다.

신학교에서의 생활은 나름 괜찮았지만 떨어져 있는 시간만큼 카피투에 대한 불안함이 커져갔다.

'다른 생각이 아니었다. 잔인하고 알 수 없는 감정, 순수한 질투, 나의 내면의 독자였다. 그러한 감정들이 내가 혼자 주제 지아스의 말을 되뇔 때 나를 갉아먹었다. (p. 173)' 첫사랑에 빠져 달콤함만 만끽해도 모자랄 이 시기에 벤치뉴의 마음 속엔 이미 '내면의 독자'가 생겨버렸던 것이다.

혹여 이 장르에서 개선해야 할 점이 있다면, 나는 실험적으로 끝에서 시작하는 작품을 제안하고 싶다. 오셀로가 1막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고 데스데모나를 죽인 뒤, 다음에 이어지는 세 개의 막은 느린 동작과 함께 갈등의 하강 구조로 펼쳐지고, 마지막은 첫 장면부터 터키인의 위협, 오셀로와 데스데모나의 설명, 슬기로운 이아고의 좋은 충고로 마무리된다. (p. 199)

이 소설의 뒤에는 '오셀로 증흐군이 빚어낸 파국'이라는 해설이 붙어 있다. 벤치뉴와 오셀로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를까.

'나는 그녀의 목 아주 깊숙이 손톱을 박아 넣고 그녀가 피를 흘리며 숨이 끊어져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p. 204)'

그저 골목에 지나가는 모르는 남자가 카피투를 한번 쳐다보았을 뿐인데 말이다.

오셀로에게는 이아고라는 협잡꾼이 있었지만 벤치뉴에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내면에 그 협잡꾼이 있었다. 벤치뉴가 소년에서 어른으로 자람에 따라 그 협잡꾼도 성장해 갔다. 하지만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소설 속의 이 '내면의 독자'를 깨닫게 되는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중략) 그때 나는 겨우 열일곱이 조금 넘은 나이였다.... 여기가 이 책의 중간 지점이 되어야 했지만, 글쓰기 경험이 부족해서 펜이 가는 대로 쫓아가다보니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 채 어느덧 거의 책 끝부분에 도달했다. 이제 약간의 수정과 숙고를 거쳐 추려질 이야기를 장마다 큼직큼직하게 짚어나가기만 하면 된다. (p. 254)

실제 그랬다. 이 소설의 대부분은 벤치뉴의 십대 시절 이야기를 담고 있다. 노년기의 무뚝뚝경이 가장 그리워하는 시절이자 현재의 삶과 가장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절, 그래서 삶의 양 끝을 연결하여 젊은 날의 그 소중했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욕망이 좋았던 이야기만 한참을 늘어놓게 만들었다. 정작 자신을 그렇게 만든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큼직큼직하게 후려치겠단다. 어쩌면 여전한 일종의 회피이자 무책임으로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서술 태도는 어느새 화자의 이야기에 젖어든 독자가 화자의 심정을 물려받아 화자의 생각대로 이야기를 판단할 토대를 구축한 상태라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 회피와 무책임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다.

나는 분명하고 뚜렷한 이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예컨대, 그녀는 스코틀랜드 마녀의 사촌임이 틀림없다. "너는 왕이 될 거야, 멕베스!" "너는 행복할 거야, 벤치뉴!" 그것은 결국 보편적이고 영원한 같은 곡조의 같은 예언이다. (p. 260)

300여 페이지에 걸쳐 몇년 간의 자신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펼쳐놓았던 벤치뉴는 이제 50여페이지에 걸쳐 수십년 간 자신 만든 파국을, 이제야 이야기한다.

에제키에우는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는 걸 좋아해' (p. 290)

'아주 작은 몸짓 하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 사소한 고집에도 괴로워할 정도로 나는 그녀에게 계속 집착했다. 종종 무관심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질투했다. 이웃집 남자, 왈츠 파트너,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남자라면 누구나 나를 공포와 불신으로 가득 채웠다. (p. 291)'

'어떻게 죽은 사람까지! 죽은 자도 당신의 질투는 피할 수 없구나! (p. 343)'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달까? 벤치뉴는 에스코바르가 사고로 갑자기 죽었을 때 장례식장에서 평생의 불신을 품게 된다. 에스코바르가 벤치뉴를 절친이자 함께 하고픈 행복한 사람으로 알고 죽은 게 그나마 벤치뉴가 만들 파국이 덜 비극이 되게 했다... 하지만...

나는 외식을 했다. 저녁에는 극장에 갔다. 때마침 내가 본적도 읽은 적도 없는 <오셀로>를 상연 중이었다. 극의 주제는 알고 있었기에 우연의 일치를 기뻐했다. 나는 손수건 한 장 때문에 무어인이 크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저 단순한 손수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 장에서는 아메리카 대륙과 다른 대륙 심리학자들의 연구 자료를 소개하고자 한다. (중략) 손수건은 잃어버릴 수 있다. 오늘날에는 침대 시트 정도는 되어야 한다. (p. 335)

오셀로는 가당치도 않은 의심을 했다고 생각하는 벤치뉴는 자신의 의심만큼은 합당하다고 생각했다. 오셀로에게는 거짓이나마 물증이 있었다면 벤치뉴에게는 아무런 물증 없이 그저 혼자만의 심증만 있었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카토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기 위해 소파에 몸을 뻗었다. 그의 행동을 단순히 모방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p. 337)'

'아니야, 아니야. 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 (p. 340)'

'"당신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뭐야?" (p. 342) "나는 그 이유를 알아. 우연의 일치로 닮았기 때문이지... 신의 섭리만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거야...비웃는 거야? 이해해. 신학교에 다녔으면서도 당신은 신을 믿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나는 믿어..." (p. 344)'

그러니까... 카피투와 벤치뉴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에제키에우는 벤치뉴가 봤을 때 죽은 에스코바르를 똑닯았던 것이다. 발가락만 닮아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사람도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처럼 유전자검사가 가능한 시절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가능했을 소설일지도 모르겠다. '독자도 나의 의견에 동의할 것이다. 카피투의 어린 시절을 기억한다면, 껍질 안에 있는 과실처럼 한 사람이 이미 다른 사람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해답이 무엇이든 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다. (중략) 그토록 사랑했던 나의 첫사랑과 나의 가장 친한 친구가 결국 나를 기만하고, 하나가 될 운명을 택했다는 것이다.... (p. 361)' 라는 마지막 페이지의 문장으로 확인되는 화자의 태도를 보면 말이다.

하지만,

혀를 끌끌 차며 기막힌 채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서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벤치뉴는 정말 자신의 불신을 믿음으로 확고히 한 것일까? 오셀로 처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것일까?

왜냐하면 시작부터 벤치뉴는 단절되어 살아온 노년기의 자신이 젊은 날의 자신과 연결되어 화해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피력했기 때문이다.

작품 뒤에 붙은 평론가의 해설은 차치하고 그저 독자로서 이 소설을 꼽씹다보면 작가의 은근한 매력을 새삼 깨닫게 된다. 오호라 이래서 정소현 소설가는 다시 읽을 수 밖에 없는 소설이라고 말했구나! 하지만 나는 다시 읽게 되진 않을 것 같다. 핑계를 대자면 해피엔딩이 절실한 시절이라서랄까...

ps. 브라질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쌈바축제때 보이는 유색인이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인디오들의 사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처음 읽은 브라질 작가의 소설은 내가 알던 그 브라질이 아니었다. 그저... 포르투갈 이었다. 검색해보니 브라질의 인구구성에서 백인의 비중은 절반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좀 단적으로 말하자면 백인들의 나라였던 것이다. 뒤늦게 깨달은 브라질의 역사는 이 소설보다 내게 더 충격적 잔상과 여러 물음표들을 남겨 놓았다. 과연 브라질 적인 것은 무엇일까?...

'마샤두 지 아시스는 백인이 아닌 가난한 집안 출신의 물라토 혼혈로 인종적·사회적 열등감에 늘 시달려야 했다. 최근까지도 미디어 속 마샤두 지 아시스의 이미지가 전형적인 백인 엘리트르 연상시키는 외모로 묘사되거나 백인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정·보완되어 소개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브라질 최고의 소설가로 인정받기까지 그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어떤 시련을 겪었을지 가히 짐작되고도 남는다. 실제로 그러한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그는 살아생전 단 한번도 흑인이나 하층민과 같은 사회적 약자의 시각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을 발표한 적이 없었다. (p. 367 - 해설 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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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는 한국사 - 시와 노래로 만나는 우리 역사 푸른들녘 인문교양 40
조혜영 지음 / 푸른들녘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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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흘러간 옛 노래"란 없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야기는 '오늘의 노래'다

역사를 좋아하는 편이라서 역사관련 책을 자주 읽는 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 신기한 것이 역사는 읽어도 읽어도 묘하게 새롭다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읽으면 다르고 저렇게 읽으면 또 다른 것이 역사이야기라는 걸 느끼고 나니 새로운 역사이야기에 늘 호기심이 일곤 한다. 이번엔 현직역사교사가 쓴 '노래로 만나는 한국사' 다.

국어 시간에 주로 그 시의 문학적 가치에 대해서 배웠다면 이 책에서는 그 시가 쓰인 역사적 배경을 충실하게 설명하여 여러분이 그 내용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역사를 좀 더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고 싶은 학생, 학교에서 교과 융합 수업을 고민하는 선생님들께도 이 책이 유용하게 활용되길 바랍니다. (p. 15) - 저자의 말 中 -

이 책에 실린 시는 아무래도 '시'이다 보니 역사교과서 보다는 문학교과서를 통해 접했던 것들이 많았다. 역사교과서에서는 제목만 알았다면 문학교과서에서는 단어 하나하나 운율 하나하나 따져봤던 시들. 그래서 아주 몰랐던 것도 아니고 어쩌면 일정 싯구는 여전히 외우고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역사로 읽으니 또새롭게 다가왔다.

님이여 물을 건너지 마오

님은 결국 물을 건너시네

물에 빠져 죽었으니

장차 임을 어이할꼬

노래를 마친 아내는 조용히 강물 속으로 들어가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았던 뱃사공 곽리자고는 집으로 돌아와 자신의 아내 여옥에게 새벽녘에 자신이 본 광경을 이야기해 주었고, 자신이 들었던 노래 <공무도하가>를 들려줍니다. (p. 19)

그 이름도 익숙한 <공무도하가>의 노랫말이 저랬던가! 이렇게 생소할 수가!! 가수 이상은의 노래로 더 친숙했던 이 고대가요가 남편이 강으로 휘적휘적 들어가 생을 마감하는 것을 본 아내가 부른 노래였다니... 첫번째 노래부터 놀라웠다. 그리고 고대가요는 노랫말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니라 깊은 상징과 은유가 들어가 있기 마련이라 하나하나 풀어본 역사적 이해가 또한 새로웠다.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노랫말 풀이가 역사적 흥미를 한층 높여주는 것을 느끼며 이런 재밌는 역사이야기를 만날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거지만, 학창 시절에 역사를 이렇게 배웠다면 얼마나 재미있었을꼬;;;

이어지는 노래들도 하나같이 사연이 구구절하면서 역사적 풀이또한 흥미진진해서 책 한권이 후루룩 금새 읽혔다.

공무도하가 같은 고대의 노래부터 해방이후의 금지곡들까지 시대별로 서너가지의 노래 이야기를 읽고나니 한반도의 역사를 간단하게 훑어 내렸는데도 전혀 부담감이 없었다. 그리고 더 궁금해졌다. 다른 노래들은 또 뭐가 있었을까? 사연많은 역사 이야기들은 또 무엇이 있을까??

새로운 역사적 깊이를 더해가려던 이들에겐 이 책이 얕게 느껴졌을수도 있으나 큰 기대 없이 가볍게 혹은 역알못이나 청소년들에게 이 책은 무척 유용한 책이 될 것 같다.

그래서 이런 책이 시리즈로 좀더 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다보면 역사라는 과목이 노래를 흥얼거리는 기분으로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분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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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대멸종
엘리자베스 콜버트 지음, 김보영 옮김, 최재천 감수 / 쌤앤파커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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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구상에서 단 다섯 번만 일어났던

대멸종이 재현되고 있는 순간을 살고 있다.

이 책에는 13개 장에 걸쳐 여섯 번째 대멸종 이야기가 펼쳐진다. 각 장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한 종이 등장한다. (중략) 멸종은 소름 끼치는 주제이며, 대량 멸종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매혹적인 주제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나는 두 측면, 즉 멸종에 대해 알게 되면서 느낀 흥분과 공포 모두를 전달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이 책을 읽고 나서 우리가 매우 특별한 순간을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p. 23 - 프롤로그 中 -

저자는 과학자가 아니라 저널리스트 이지만 이 책은 과학책임에 분명하다.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이 과학자의 전문성을 넘어설 수는 없겠지만 특유의 집요함과 광범위한 조사는 때로 그 어떤 과학자의 책보다 더 전달력 강하게 주제에 접근하게 한다. 또한 칼럼처럼 쓰여진 대중적인 서술은 이 책의 어려운 주제를 쉽게 읽도록 해준다. 그러니 주제의 무게에 이해의 무게까지 더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은 잠시 접어두어도 된다. 이해되면 될수록 더해가는 마음의 무거움만 느껴도 충분히 버거울 테니. 왜냐하면 이 책의 주제는 '멸종' 이니까 말이다. 그것도 대.멸.종.

양서류는 지구상의 모든 대륙이 판게아라는 하나의 땅이었던 시기에 출현했다. 그러다 판게아가 분열하면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의 환경에 적응했다. (p. 37) 오늘날 양서류는 지구상의 동물 중 가장 위기에 처한 강 이라는 달갑지 않은 타이틀을 얻었다. (p. 44) 종들이 사라지는 데는 저마다 다른 이유가 있지만, 그 과정을 끝까지 추적하다 보면 늘 동일한 범인인 '일개의 나약한 종'을 만나게 된다. (p. 45)

'일개의 나약한 종'

이미 예상하고 있겠지만 인간이다.

세계 곳곳에서 개구리들이 사라지고 있다. 조용해져서 좋겠다고?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인류보다 먼저 태어나 인류보다 더 다양한 환경에 적응해온 양서류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저자는 이미 멸종한 개구리부터 확인시켜 준 후 '멸종'의 기원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나간다. 그 시작은 진화론의 출발전 생명의 나무부터 시작된다.

칼 린네가 이명법 체계를 고안했을 때, 그는 산 것과 죽은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중략) 다룬 것은 오직 한 종류의 동물, 즉 현생 동물 뿐이다. (p. 53) 퀴비에는 '현재 존재하거나 화석에 남아 있는 코끼리 종들'이라는 강연에서 멸종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임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p. 66) 퀴비에의 절멸종 목록이 길어질수록 그의 명성도 높아졌다. (p. 73) 생명의 역사가 길고 변화무쌍하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동물로 가득한 때가 있었다는 퀴비에의 주장을 들으면 그가 당연히 진화론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퀴비에는 진화라는 개념에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론을 발전시킨 동료들을 깔아뭉개려고 했고 그 시도는 대게 성공적이었다. (p. 76) 라이엘이 보기에는 멸종 역시 매우 느린 속도로 일어나는 현상이므로, 특정 시기, 특정 장소에서 감지되지 않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p. 85) 라이엘은 당대의 스티븐 핑커라고 할 만한 유명 인사가 되었으며, 보스턴에서 열린 그의 강연에는 4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왔다. (p. 86) 찰스 다윈도 <지질학 원리>에 열광한 독자 중 한 명이었다. (p. 88) 정확하게 말하자면, 비글호 항해에서 다윈이 발견한 것은 자연 선택이 아니라 라이엘이었다. (p. 89) 한 전기 작가는 라이엘이 다윈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라이엘이 없었다면 다윈도 없었다" (p. 91) "종이 완전히 멸절하는 과정이 그 종이 만들어지는 과정보다 일반적으로 더 느리다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다" 새로운 종의 탄생을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다윈에 따르면 그런 일을 불가능하다. 종 분화는 너무나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과정이어서 사실상 관찰 불가능하다. 다윈은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그토록 느린 변화를 볼 수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p. 95)

생물의 분류부터 화석에서 비롯된 지질학의 발견을 거쳐 다윈의 진화론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차근차근 자연의 변화를 밝혀내는 것처럼 보였다. 다윈의 후계자들은 '서서히 멸절'했다는 관점을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토록 점진적인 변화로 설명되지 않는 대멸종의 증거들이 쌓여갔다. 그리고 1991년 소행성 충돌설이 확인되었다. 격변은 실재했고 대멸종의 원인들이 밝혀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모든 대량 멸종을 아우르는 일반론은 없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또다른 대멸종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었고 다가오는 대멸종의 원인만큼은 이미 알 수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첫 장에서부터 급격한 '종의 멸종'을 확인했다.

지난 80만 년 동안의 그 어느 때보다도 높은 수치다. 아마 수백만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해도 이산화탄소 농도가 이보다 높았던 때는 없었을 것이다. 현재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2050년에는 CO2농도가 산업화 이전의 두 배인 500ppm을 넘어설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지구의 평균 온도가 2~4℃ 상승하고, 이 온도 상승은 빙하 소멸, 저지대 섬 해안 도시 침수, 북극의 만년설 유실 등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화로 이어질 것이다. 게다가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p. 172)

지구의 기후변화는 지구의 자연환경을 변화시키고 그 자연속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생물다양성 감소가 일어날 것이라는 증거는 확실하다. 일부 내성이 강한 생물은 더 번성하겠지만 전반적인 다양성에는 손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의 대량 멸종 시기에 일어난 일인 것입니다. (p. 181)' 이산화탄소 증가는 기후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산화탄소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곳은 바다다. 바다가 그 이산화탄소의 많은 부분을 흡수하기 때문이다. '산호초는 단순히 해저의 열대 우림인 것이 아니라 바다 버전의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있는 열대 우림이다. (p. 207)' 산호초도 사라지고 있다.

다음 세기의 기온 변화 규모는 빙하기의 온도 변동과 비슷할 것으로 예측된다. 다만 변화의 규모는 비슷할지라도 그 속도는 전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관건은 속도다. 오늘날의 온난화는 마지막 빙기를 비롯하여 이전의 모든 빙기말에 일어났던 것보다 최소 10배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그 속도를 따라잡으려면 동식물의 이주나 적응도 10배 빠르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p. 235)

하지만 인류는 지구의 환경은 빠르게 변화시킬 수 있을지 몰라도 진화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 수는 없다. 오직 사라지게 만들 수 있을뿐.

'의존 관계는 쌍방향적이어서 나무도 동물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중략) 지구 온난화가 적어도 생태 공동체의 재구성을 초래할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p. 245)' '한 개체군이 유실되었을 때 그 자리가 다른 개체군으로 다시 채워질 가능성은 그 서식지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p. 261)'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중요한 건 '속도' 다. 인류가 지구를 변화시키는 속도를 지구 생명체의 진화속도가 따라잡을 수 없다면? 멸종이다.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다.

인류세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지질학적 분포라는 원리를 한데 뒤섞어 버린다는 점이다. (중략) 전 세계의 동식물을 재혼합하는 과정은 오래전 인간의 이주 경로를 따라 천천히 시작했지만 최근 수십년 동안 급격하게 속도를 높여 이제는 토착종보다 외래종이 많은 지역이 생길 정도로 진전되었다. (p. 282) 아시아의 종들을 북아메리카로, 북아메리카의 종들을 호주로, 호주의 종들을 아프리카로, 유럽의 종들을 남극 대륙으로 옮겨 놓으며, 우리는 사실상 이 세계를 하나의 거대한 초대륙으로 재편하고 있다. (p. 294) 국가적 다양성은 증가했지만, 같은 이유로 인해 전 지구적 다양성은 감소했다. (p. 300)

지구의 빨라지는 오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인위적으로 교란시킨 생태계도 문제지만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닫지 못한 멸종의 방법중 하나는 인류의 사냥이었다. '수천만 년 동안의 숱한 가뭄에도 살아남았던 호주의 거대 동물들이 공교롭게도 정확히 최초의 인류가 도착하자 거의 동시-수백만 년을 단위로 하는 지질사적 의미에서-에 죽음을 (p. 324)' 맞았다. 이러한 과정은 같은 호모종인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일어났다. 그렇게 인류만 남아가고 있다. 그렇게 인류만 살아남은 지구가 가능하리라고 보는가?

나의 진짜 주제는 그들이 사라져 가는 과정이 보여주는 일정한 패턴이다. 나는 하나의 멸종 사건-홀로세 멸종 또는 인류세 멸종, 좀 더 완곡한 표현을 원한다면 '여섯 번째 멸종'이라고 해도 좋다-을 추적함으로써 그 사건을 생명의 역사라는 더 넓은 맥락 안에 위치시켜 보고자 했다. 그 역사는 동일 과정설이나 격변설 어느 하나를 따른다기보다는 둘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p. 368)

저자는 여러 챕터에서 멸종하는 생물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생물 하나하나에 대한 기록처럼 읽히기도 한다. 하지만 좀더 읽어보면 그 멸종의 원인들이 비슷한듯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고 아주 비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초래한 멸종이 우리에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p. 371)' 에 대해 이젠 우리가 좀더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점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인류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현재로 인식되는 이 놀라운 순간에, 우리는 의도치 않게 어느 쪽의 지노하 경로는 열어두고 어느 쪽은 영원히 차단해 버릴지를 결정하고 있다. (p. 373)' 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인류는 여섯 번째 대멸종을 만들어가고 있지만 또한 아직 오지 않은 멸종을 막을 수도 있다. 2014년에 나온 책이 지금 다시 한국에 나왔다는 것을 생각해봐야 한다.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여전히 한국에서 읽히고 있지만 이제쯤은 <여섯 번째 대멸종>을 읽어야 하지 않을까. 그 어느때보다 기후위기에 대한 관심이 소홀해진 한국에서 지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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