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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헤로도토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9년 2월
평점 :
인류 최초의 역사서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원전 그대로 번역 출간되었다. 최초의 역사가이자 최초의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할리카르낫소스 출신 헤로도토스가 제출하는 탐사 보고서다. 서언에서 “그 목적은 인간들의 행적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망각되고, 헬라스인들과 비 헬라스인들의 위대하고도 놀라운 업적들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무엇보다도 헬라스인들과 비헬라스인들이 서로 전쟁을 하게 된 원인을 밝히는데 있다”
제1~6권에서는 페르시아 전쟁의 배경을 설명한다. 뤼디아는 크로이소스 치세 때 신흥국 페르시아에게 패권을 빼앗긴다. 동방의 대표 세력으로 페르시아 왕국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페르시아 전쟁 이전에 있었던 동-서 갈등을 서술한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를 복속시키려던 비그리스인, 즉 크로이소스로부터 퀴로스, 캄뷔세스, 다레이오스 등이 사건 전개의 핵심으로 떠오른다. 제7~9권에서 전쟁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마라톤에서 좌초한 다레이오스의 원정에 이은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의 전쟁 결의, 군대의 사열, 영화 [300]으로 널리 알려진 테르모퓔라이 전투, 아르테미시온 전투에 이어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뮈칼레에서 거둔 그리스의 대승을 묘사하는 장면에서 [역사]는 절정을 이룬다.
크로이소스는 뤼디아 출신으로 알뤼앗테스의 아들이었다. 헤라클레스의 자손들이 행사하던 뤼디아의 왕권이 메르므나다이 가(家)라 불리는 크로이소스 가로 넘어간 경위는 뮈르소스의 아들 칸다울레스가 아내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경호원 귀게스에게 미모 자랑을 했던 것이다. 그는 패가망신할 숙명을 타고났는지라. 아내의 몸매를 보라고 하였고, 그 아내가 눈치채 귀게스에게 왕을 죽이고 나랑 살든지 죽든지 정하라 하였다. 귀게스는 뤼디아의 왕이 되었고, 아르뒤스, 사뒤앗테스, 알뤼앗테스가 통치를 이어왔다.
크로이소스와 대화에서 솔론은 “큰 부자라도 운이 좋아 제가 가진 부를 생을 마감할 때까지 즐기지 못한다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할 수 없기 때문에 많은 거부들이 불운했는가 하면, 재산이 넉넉하지 못하더라도 운이 좋은 사람도 많다 하였다.(중략)전하! 무슨 일이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눈여겨보아야 하고 신께서 행복의 그림자를 언뜻 보여주시다가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뜨리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솔론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솔론이 떠나자 크로이소스에게 무서운 신벌이 내렸다. 아마도 자신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여겼던 탓인 듯하다.
퀴로스는 자신의 군사들을 모으고 점령지의 주민들을 모두 징발하여 크로이소스와 맞섰다. 크로이소스는 자기 군사들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퀴로스가 감히 사르테이스로 진격해 오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퀴로스는 크로이소스가 든든하게 믿고 승리를 기대하는 그의 기병대를 무력화 하는 작전을 세웠다. 양측에서 많은 전사자가 나자 뤼디아인들은 패주했고, 페르시아인들의 포위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퀴로스가 죽자 아들 캄뷔세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이오니아인들과 아이올리스인들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노예로 간주하고 아이귑토스 원정에 나갈 때 헬라스인들도 데리고 갔다.
헤라클레스의 양친인 암피트뤼온과 알크메네는 아이귑토스 출신이다. 아이귑토스인들은 자기들은 포세이돈과 디오스쿠로이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이 신들은 그들의 다른 신들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들에게 헤라클레스는 오래된 신이다. 8신이 12신이 되고 헤라클레스도 12신에 포함된 것은 아마시스 왕의 치세(기원전 570~526년)가 시작되기 17000년 전 일이라고 한다.
세소스트리스라는 왕은 대군을 모아 대륙을 횡단하며 닥치는 대로 모든 민족을 정복했다. 독립을 지키려고 용감한 민족을 만날 경우 그들의 영토에 그의 이름과 조국을 알리는 비석들을 세우게 했다. 그러나 싸우지도 않고 도시들을 함락한 경우 용감한 민족들을 만났을 경우에 비석들에 새겨 넣되 여자의 성기도 그려 넣게 했다. 그들이 겁쟁이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프로테우스의 왕위는 람프시니토스가 계승했다. 람프시니토스는 살아서 헬라스인들이 하데스라고 부르는 곳에서 데메테르 여신과 주사위 놀이를 했다. 그가 저승으로 내려갔다가 지상으로 돌아온 일을 기념해 축제를 개최했다고 한다. 그가 왕일 때 훌륭하게 통치되고 크게 번성했다. 뒤를 이어 케옵스가 왕이 되자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먼저 모든 신전을 폐쇄하고 그 안에서 제물을 바치지 못하게 한 다음 모든 아이귑토스인들이 자기를 위해 일하도록 강요했다. 아라비아 산맥에 있는 채석장들에서 큰 돌덩이를 네일로스 강까지 끌어와 그 돌덩이를 배에 실어 강을 건너고 나면 리뷔에 산맥으로 그것들을 다시 끌고 가게 했다. 한 번에 10만 명의 인원이 3개월 교대로 동원되었다. 10년 동안 백성들의 고생은 계속되었다. 자신의 묘실을 지은 이 방들은 수로를 통해 네일로스강의 물을 끌어들임으로써 일종의 섬이 되었다. 피라미드 자체를 건조하는 데는 20년이 걸렸다.
아시아는 헬라스를 공격할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준비시키느라 3년 동안 몹시 술렁거렸다. 4년째 되던 해 캄뷔세스에 의해 노예가 된 아이귑토스가 반기를 들자, 다레이오스는 두 곳을 다 치기로 더욱더 마음을 굳혔다.
크세르크세스가 먼저 내보낸 함대는 아토스 반도에 파놓은 운하를 지나 앗사, 필로로스, 싱고스, 사르테 시가 자리 잡고 있는 만으로 나아갔고, 이 도시들에서도 군사를 징발한 다음 테르메 만으로 향했다. 함대는 토로네 땅에 있는 암펠로스 곶을 돌아 헬라스 도시들인 토로네, 갈렙소스, 세르뮐레, 메퀴베르나, 올륀토스를 경유하며 이 도시들에서도 선박과 군사를 징발해 갔다. 이 지방은 시토니아라고 불린다.(7권 122장)
헬라스인들은 이스트모스로 돌아오자 알렉산드로스의 보고에 기초해 어디서 어떻게 전쟁을 할 것인지 의논했다.테르모퓔라이에서 전사한 헬라스인들을 파멸로 이끌었던 오솔길이 있다는 것은 그들이 그곳에 도착한 후 트라키스인들에게 듣기 까지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 고갯길을 지킴으로써 페르시아인들이 헬라스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로 결정했다.
페르시아의 장군들은 이토록 적은 함선들에 당하는 것에 화가 나기도 하고, 크세르크세스가 어떻게 나올지 두렵기도 하여 3일째 되던 날 더 이상 헬라스인들이 먼저 싸움을 걸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준비가 완료되자 한낮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이 해전과 테르모퓔라이에서의 지상전은 마침 같은 3일 동안에 벌어졌다.
우리가 수많은 민족과 아시아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언제 오겠습니까? 퀴로스는 이 제안을 듣고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럴 경우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 민족이 될 각오를 하라고 경고했다. “부드러운 나라에서는 부드러운 남자들이 태어나는 법. 놀라운 곡식들과 용감한 전사들이 같은 땅에서 태어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오.”라고 말했다. 페르시아인들은 자신들의 견해가 퀴로스의 견해보다 못하자, 평야를 경작하며 남의 노예가 되느니 척박한 땅에 살며 지배자가 되기를 택했던 것이다.
900페이지의 이 책을 한번 읽어서 이해했다고 할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고 20일 동안 쪼개 읽으면서 중간 리뷰를 작성하고 완독을 한 것에 뿌듯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