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 다빈치 art 11
구로이 센지 지음, 김은주 옮김 / 다빈치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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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는 실레의 1910년작 <이중 자화상>.

 

세기말에서 1차 대전까지, 프란츠 요제프 황제 말년 오스트리아의 빈에는 많은 천재들이 활약했다. 그중 한 사람, 에곤 실레. 1890년 태어나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해 분리파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를 만나고, 1909년에는 보수적인 분위기의 아카데미를 떠나 ‘새로운 예술가 그룹(Neukunstgruppe)’을 결성한다. 1912년에는 미성년자 유괴와 외설적인 그림을 그렸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24일 동안 수감되기도 한다. 4년간이나 모델겸 연인인 발리와 동거하며 그 생애의 대표작들을 그렸으나 1915년, 발리를 버리고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한다. 이후 성공가도를 달리며 표현주의 젊은 예술가로 자리잡았으나 1918년 에스파냐 독감에 걸려 사망한다. 아내 에디트 사망한 지 사흘만이었다.  책은 이런 실레의 일생을 따라 그의 작품들을 해설해간다. 저자의 감상 위주라고 보면 된다. 도판이 심히 좋다. 그래서 지하철에서 볼 때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게 된다.

 

1차 대전 전의 불안을 담은 요절한 천재라지만 내가 보기엔 그리 시대의 제약을 받았다고 볼 순 없고, '매를 벌었다'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는 것같은 남자다. 여러 면에서 미숙했다고나 할까.  그의 그림은 사람을 확 끌어당기는 면이 있긴 하다. 하지만 말초적인 에로티시즘은 아니다. 그의 그림은 끝없이 불안해하고 강한 자의식을 주체할 줄 모르는 사람의 내면을 보여준다. 자위하는 자화상이라니, 자기애의 절정을 보여주지 않는가.

 

다른 예술가들은 에로틱한 그림을 그린 사실이 전혀 없다고 말할 것인가. 예컨대 롭스 같은 사람은 전적으로 포르노 그림만 그렸다. 그러나 예술가를 감옥에 가두는 경우는 결코 없었다. 아무리 에로틱한 작품도 그것이 예술적인 가치를 지니는 이상 외설은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비로소 외설이 된다.

- 본문 160쪽, 외설죄로 수감되었을 당시 실레의 일기에서 인용

 

아무리 '맞을 짓'을 사서 하긴 했어도, 위의 '외설적인 감상자들에 의해 작품이 외설이 된다'는 그의 말은 전적으로 옳다. 그리고 그는 에로틱이나 외설보다는, 변화해가는 자신의 몸과 정신을 주체못하는 10대 소년의 입장으로 평생 산 것 같다. 미숙하고 위태로운.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사과를 든 소년'을 떼어낸 자리에 실레 스타일의 그림을 거는 것을 보고 갑자기 클림트가 에곤 실레에게 미친 영향이 궁금해서 읽은 책인데, 이 부분에 대한 깊은 내용은 없다. 다른 책을 더 찾아 봐야겠다.

 

아래 오른쪽은 클림트의 1907-8년작<키스>,

왼쪽은 클림트의 영향을 받은 에곤 실레의 1912년작<추기경과 수녀>

자료 사진은 우먼 동아일보 기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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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기 길 위에서 듣는 그리스 로마 신화
이윤기 지음 / 작가정신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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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작가님의 건달파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헤라클레스가 불교 도상에 미친 영향이 궁금해졌다. 헤라클레스, 금강역사를 넣어 이리저리 책 검색을 하다 보니 <오래된 지금>, <솔도파의 작은 거인들>과 더불어 이 책이 나왔다.

 

하지만 막상 읽어보니, 내가 궁금한 부분의 내용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스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레스의 상징인 사자가죽과 몽둥이가 알렉산드로스에게 이어지고, 알렉산드로스 원정에 따라 간다라 지방 미술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부처님의 보디가드인 금강역사가 사자 가죽을 쓰고 제우스의 벼락인 금강저를 들고 있는데, 그 영향을 우리나라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정도. 이렇게 이렇게 이어진다는 나열만 있고 왜 그런지 자세히 나와 있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은 비단 헤라클레스와 금강 역사 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위, 특히 유럽의 건축, 회화, 조각, 일상 생활문화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온갖 그리스로마 신화 속 상징에 대해 밝혀 준다. '풍요의 뿔'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사실 그동안 읽은 이윤기의 그리스로마신화 시리즈와 그리 다른 바는 없었다.

 

책은 이윤기 저자의 다른 책들보다 더 구어체로 되어있고 도판이 많다. 강연한 내용과 슬라이드를 그대로 옮긴 것 같은 느낌이다. 그동안 저자의 다른 책을 읽었기에, 책으로 읽으니 그리 신선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서 이런 내용을 듣고 본다면 굉장히 지적 충격을 받고, 강연 내내 지루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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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Klimt 구스타프 클림트, 정적의 조화
박홍규 지음 / 가산출판사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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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클림트, 1908, <키스> 캔버스에 유채, 빈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을 보다가, 마담 D의 의상 디자인과 문양, 집 벽에 걸린 풍경화를 보고 클림트를 떠올렸다. 주인공 이름이 구스타프인 것도 역시. 자연스레 나는 19세기말 20세기 전반기의 오스트리아, 빈에 빠져 들어갔다. 타는 갈증을 안고 클림트와 그의 시대에 대한 책을 몇 권 찾았는데, 이 책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 책의 장점은, 클림트를 에로티시즘 화가로 단적으로 정의내리지 않는 점이다. 아, 나는 이 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위의 키스를 보라. 뭐가 야한가? 숭고하기만 하다. 연인은 벼랑 끝에 서 있다. 둘의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는 순간, 벼랑은 꽃밭으로 변한다. 사랑이 세상을 바꿔 놓는 위대한 순간이다. <다나에>도 얼마나 숭고한가?

 

그의 그림에는 에로틱한 느낌을 주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이다. 그가 남긴 235점의 유화 작품 중 60여점은 에로틱하기는커녕 마치 명상이라도 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는 정적의 조화를 표현한 풍경화였고 나머지 대부분도 조용한 분위기의 초상화거나 상징적인 우의화였다. 그 우의화 중에는 에로틱한 그림도 있었지만 몇 점뿐이었고 그 마저도 숭고한 느낌을 준다.

- 본문 4~5 쪽에서 인용

 

클림트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의 시대를 봐야 한다. 이 점에서 노동법을 전공한 저자의 시각이 빛난다. 전에 이 저자분의 다른 책 리뷰에도 썼지만, 난 이런 스페셜리스트의 시각을 갖은 저자분이 자신의 전공분야 아닌 곳에서 자신의 시각을 적용해서 쓴 책이 참 좋다. 꼭 박사 학위 가진 그 분야 강단 교수들만이 그 분야 책을 쓰란 법은 없다. 오히려 난 클림트를 미술 전공자들이 쓴 글을 보면 더 어렵고 이해가 안 간다. (솔직히 에로티시즘에 여성에 대한 이야기, 즉 그의 여성 모델과의 관계나 에밀리와의 관계 그에대한 얼치기 프로이트식 분석 등등,,,, 난 클림트의 그림보다 그에대해 에로틱한 글 쓴 저자들이 변태같다. )

 

그가 황실이나 국가기관이나 부자나 대중을 위해 그림을 그렸기에 그들이 좋아하는 봉건적 장식과 색채를 그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30세도 안 되어 그런 그림 그리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전통에서 분리되어 분리파전이라는 새로운 전시회를 열면서 그는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관람제도를 실시했다. 당시 에로틱하게 보인 그의 그림보다도 그 무료관람이 사실 더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보수층은 그 점에 더욱 분노했다.

- 본문 34 쪽에서 인용

 

당시 프로이트도, 에곤 실레도,,, 그들이 비난받은 것은 그들 학설이나 그림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당시 제국 말기의 억압성과 그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귀족 관료 부루주아들의 이중성때문이었다.

 

19세기 말 빈은 20세기를 빛낸 천재들이 산 곳이었다. 그러나 그 천재들은 대부분 살아생전 빈에서 아예 인정받지 못하거나 이중적인 판단에 의해 고통을 받아다. 프로이트도, 말러도, 클림트도 그러했다. 그들을 인정하지 않는 전통적인 의사, 음악가, 화가들이 그곳을 지배했고 대중들도 그들의 영향 아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지배계급과 대중에 도전하는 새로운 견해는 언제나 무시되었다. 그만큼 세기말 빈은 보수적인 도시였다. 클림트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그릴파르처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훈장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어

이런 체제에서는.

천재에게 십자가를 걸어주지 않지,

아니, 천재를 십자가에 매달지.

- 본문 66쪽에서 인용

 

클림트의 시대로부터 백여 년이나 지난 지금,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우리까지 그런 과거 서구제국의 시선을 갖고 그를 볼 필요는 없다. 그런데 그렇게 보는 이유는 역시 우리에게 심어진 서구위주 제국주의 시선의 영향 때문이다. 지나친 장식과 금박이 주는 거부감. 이 부분에서 저자분이 번역, 소개하신 <오리엔탈리즘>의 일관된 비판 정신이 보인다.

 

빙켈만 이래의 신고전주의가 그리스적인 미술을 모범으로 삼아 주류를 형성하는 가운데 서양에서 장식미술은 무시되었다. 서양에서는 19세기에 와서 디자인이 미술의 일부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그것은 그리스적인 순수미술과는 다른 응용미술, 즉 순수미술의 미를 응용한 것이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 것에 불과했다.

여기서 특히 우리는 그 응용미술이라고 하는 것이 특히 비서양사회의 민족미술이나 종교미술을 뜻하는 것이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특하 아라베스크가 그렇다. 아라비아 사람들의 공예품이나 건축물 장식에 쓰인 무늬로 만든 타일로 뒤덮인 모스크는 서양 기독교와 대립하는 이교도의 상징으로 경멸되었다.

- 본문 52쪽에서 인용

 

이 책은 클림트의 예술 세계를 보여주기 보다는 그의 시대를, 그의 시대과 비슷한 시대에 살며 그를 비난하던 자들의 시선과 같은 시선을 갖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저자분의 다른 책처럼, 좀 거칠기는 하지만, 다른 클림트 관련 책들과 확연히 차별되는 장점이 있기에, 클림트와 그의 시대에 관심있는 친구분께는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클림트와 그의 시대에 대해 더 알고싶으시다면 <제국의 붉은 노을(구판은 세기말 비엔나)>, <제국의 종말>, <어제의 세계>를 함께 읽기를 권한다.

 

여담이지만, 난 내 선배님 선생님 또래의 중년 남성분들, 그러니까 70, 80년대 학번 남성분들 보면 이따금 안쓰럽다. 근대화 산업 전사로 청춘을 희생당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국가와 민족의 대의에 의해 개인적 취향과 시각을 억압하도록 강요당한 점에서 불쌍한 세대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 초반부에서도 클림트를 싫어하다가 중년이 되어 좋아하게 된 저자분의 개인적 사연이 나오는데, 나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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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스틱 폴란드 - 아흔아홉 개 이야기
이경렬 외 지음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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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전 초판 나왔을 때 읽고 참 괜찮은 책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전에 생각나서 다시 찾아 읽고 검색해보니 판매 지수가 낮다. 의외였다. 좀 가벼워 보이는 제목이나 유머러스한  목차 때문일까? 전문서적보다 여행정보서적보다 훨씬 방대하고 다양한 내용을 샅샅이 담고 있는 책인데, 아쉽다.

 

이 책은 기본적인 폴란드 역사부터 문화, 설화, 위인, 전통, 음식, 여가 생활, 이름 등등 폴란드에 대한 다방면의 정보를 담고 있다. 정말 알차다. 짧긴 하지만 수박 겉핥기 식으로 원고 편 수 채우려고 억지로 쓴 내용 없는 글이나 흥미 위주의 편협한 시선은 없다. 이 점은, 이 책 읽은 지 4년이나 되어 다른 방면으로 약간 독서 이력을 쌓은 후에 다시 리뷰 남기는 지금의 내 입장에서 하는 말이니, 믿어도 된다. 단, 자신이 궁금했던 분야에 이런 이런 내용이 크게 있구나, 하는 정도를 안 후에 전문적인 깊은 내용은 다른 책을 더 찾아봐야 한다. 하지만 넓은 범위를 얕게 다루면서 이정도 수준으로 소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나폴레옹과 마리아 발레프스카 부분에서도 대략적 사실만 소개하고 함부로 논평하지 않은 점도 맘에 든다. (영웅호색 운운하거나 성적 에피소드를 이상하게 서술하는 일부 저자들의 시각이 없다. )

 

내 경우에는  영화를 볼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랜 토리노>의 코발스키 이름과 폴란드 이민 노동자 관련해서, <투스카나의 태양>에서 집 짓는 부분의 폴란드 노동자 관련해서, 최근 본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관련해서,,,, 등등.

 

폴란드 대중들이 가장 즐기는 보드카는 주브루브카와 비보로바다. 앞의 것은 16세기 때부터 위의 것은 19세기 초반부터 마셔온 보드카다. 둘 다 순 귀리로 만든다. 싸고 전통이 있는 술이다. 주브루브카는 병 속에 '들소 풀'을 넣어 독특한 향기가 난다. '들소 풀'은 주브르(Zubr)라는 폴란드 들소가 주로 먹는 풀이다.

- 본문 326쪽 '보드카는 폴란드가 원조?' 편에서 인용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국가 '주브루브카'는 폴란드의 전통있는 보드카 이름이었다. 이 짧은 분량의 꼭지에서 전통있는 보드카 브랜드 역사까지 설명해주는 것은 이 책을 쓴 저자분의 능력이고, 그저 마구 읽어서 뇌 속에 쟁여두면 필요할 때 필요한 책의 필요한 페이지에서 마구 팝업! 하는 것은 이 책을 알차게 읽은 독자인 나의 능력이다. 자, 당신도 읽고, 팝업!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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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아민 말루프 지음, 김미선 옮김 / 아침이슬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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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에 대해 알고 싶어져서 아래의 책 5권을 연달아 읽었다. 한 권만 읽고는 그 책의 장단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 같아서 다 읽은 후 비교하며 한꺼번에 간단히 리뷰 남긴다.

 

십자군 전쟁 : 그것은 신의 뜻이었다!               / W. B. 바틀릿 지음   / 한길 히스토리아

십자군 : 기사와 영웅들의 장대한 로망스         / 토마스 F. 매든 지음 / 루비박스

십자군 이야기 2                                          / 시오노 나나미 지음 / 문학동네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 아민 말루프 지음     / 아침이슬

살라딘 : 십자군에 맞선 이슬람의 위대한 술탄 / 스탠리 레인 폴 지음 / 갈라파고스

 

이 중,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레바논 출신으로 파리에 정착한 저자가 아랍인의 시각에서 서술한 책이다. 기존 서구식의 1차 2차 3차,,,, 가 아니라 아랍 입장에서 1부 침략, 2부 정복, 3부 반격, 4부승리(살라딘 등장), 5부 유예(3차 십자군. 살라딘과 리처드), 6부 추방(몽골 침략과 아크레 이후 프랑크인 철수)로 구성된 목차부터가 다른 시각을 느끼게 해 준다.

 

당시 아랍 측 역사가와 연대기 저자들의 기록을 바탕으로 인용해 썼기에, 기존 서구 저자들의 십자군사에서 자세히 읽지 못한 부분을 접할 수 있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예를 들어, 현지조달 방법으로 대책없이 몰려온 십자군 침략자들이 식량이 떨어지자 포롣르의 인육을 먹는 '마라의 식인종' 부분 등 놀랄만한 사실이 줄줄이 소개된다. 그렇다, 기본적으로 십자군 전쟁은 침략전쟁이었던 것이다. 200년 후 아랍이 이들을 몰아내어 결과적으로는 승리한 전쟁이라해도, 마치 임진왜란과 같이 침략당한 측의 피해의식은 현재까지 현실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무조건 아랍측을 피해자로 그리지는 않는 점이 이 책의 더 큰 장점이다. 당시 아랍권이 분열되었던 현실, 투르크와 아랍의 민족 문제, 시스템보다 걸출한 인물에 의존하는 문제, 암살집단 아사신 등 아랍 측의 문제도 확실히 다뤄준다. 아랍 쪽은 이때만해도 확고한 성전 개념이 없었기에 지역에서의 이권을 위해 십자군 측과 협력하여 다른 지역 이슬람교를 믿는 지배자와 전쟁을 벌이기도 일쑤였다. 이 점은 십자군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그 지역에 정주하는 사람의 입장과 멀리서 이상의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의 입장은 달랐다는 것.

 

마찬가지로 천여년 전의 십자군 전쟁사를 읽고 이용하는 현대인들의 입장도 각각 처한 현실에 따라 당연히 다르다. 이 점을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밝혀 준다. 사실 당시 이슬람권에서 가장 경악할만한 정체절명의 사건은 십자군 전쟁이 아니라 몽골의 바그다드 함락이었고, 당시 이슬람 역사가들은 현장에서 목격하지 않는한 십자군 전쟁을 대수롭잖게 여겼다고 한다. 살라딘 역시 19세기에 다시 서구의 침략이 시작되자 재조명된 민족 영웅이다. 많은 부분이, 우리가 교과서에서 알고 있던 내용과 다르다.

 

아랍 쪽 인명 지명 관직명과 거의 춘추전국인 당시 실정이 익숙하지 않아 잘 읽혀지지는 않았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는 지적 기쁨은 확실히 주는 책이므로, 이런 점은 그냥 참고, 진한 커피 마셔가며 내려앉는 눈꺼풀 밀어올려 읽어가면 된다. 현재 수준의 나에게 가장 큰 성과는 기존 서구 저자들이 십자군사를 다룰 때 자신의 의도에 맞춰 사료에 뻔히 있는데도 말하지 않거나 얼머부리는 부분의 원 사료를 알게 된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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