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영웅의 탄생 - 융 심리학으로 읽는 강한 여자의 자기 발견 드라마
모린 머독 지음, 고연수 옮김 / 교양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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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는 <여성 영웅의 여행>이다. 말하자면 테세우스나 이아손같은 남성 영웅이 '영웅의 일대기 구조'에 들어맞는 여행을 떠나 영웅이 되는 과정에 빗대어 여성 영웅 - 바로 우리 - 의 삶이 어때야 하는가를 규명한 것이다. 저자는 융 심리학자인 상담가답게 인류의 집단 무의식이 드러나는 신화, 민담, 동화, 꿈을 예로 들어 여성이 어떻게 성장해서 위기를 극복하고 스스로 영웅이 되어야하는지를 밝혀 주고 있다. 그 과정은 남성들과 다르다. 세상의 인정을 받고 성공대로를 달리던 여성들이 갑자기 상실감을 느끼고 우울에 빠지는 이유는 남성 영웅의 인생 경로와 여성의 인생 경로가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남성 영웅의 여정을 따른 많은 여성이 바로 그들 자신을 돌보는 방법을 잊어버렸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 여성들은 성공하려면 계속해서 칼날을 세우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고 결국 많은 여성들이 가슴에 뻥 뚫린 구멍을 느끼고서야 성공을 좇는 과정을 끝맺는다.

- 본문 24쪽에서 인용

 

하지만 능력 있는 아버지의 인정받는 착한 딸이 되고 싶고 엄마같이 살고 싶지 않은 우리 딸들은 자신의 본성을 저버리고 스스로 자신을 심리적으로 학대한다. 이에 저자는 정신적 하강 단계를 지나 여신으로 입문, 남성성과 여성성을 통합하여 진정한 자신이 되어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무엇보다 이 책에서 아버지,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통찰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이하, 읽다가 참 좋아 길게 인용한다.

 

우리 문화에서는 남성이 규정한 기준이 리더십, 개인의 자율성,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사회적 기준이 되어 왔고, 상대적으로 여성들은 자신의 역량이나 지성, 힘이 떨어진다고 여겨 왔다.

여자아이는 자라면서 이러한 점을 관찰하고 남성들이 규정한 매력, 명성, 권위, 독립, 돈 따위의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한다. 큰 성공을 이룬 많은 여성이 아버지의 딸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첫 번째 남성 모델의 인정과 힘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인정은 어쩐지 그만한 무게가 없다. 아버지는 딸의 여성성을 규정하고 이것은 딸의 성, 남자들과 관계 맺는 능력, 세상에서 성공을 좇는 능력에 영향을 끼친다. 여성이 야만을 품거나 권력을 쥐거나 돈을 벌거나 남성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에 만족하는지 여부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비롯된다.

- 본문 66쪽에서 인용

 

'아테나 유형 여성'은 아버지의 딸이다. 즉 어머니를 경시하고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아버지의 딸'은 총명하고 야심만만하여 일을 척척 해낸다. 정서적인 관계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아버지의 딸은 상처 입기 쉬운 약한 존재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능력이 부족하다.

- 본문 74쪽에서 인용

 

아버지나 아버지를 대체하는 사람에게서 받는 인정과 격려는 대개 여성의 긍정적인 자아 발달을 이끈다. 하지만 아버지, 계부, 삼촌, 할아버지로부터 인정과 격려를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오히려 용기를 꺽는 말을 듣는 경우에는 자아감에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다. 또한 과잉 보상 문제나 완벽주의를 야기하거나 아니면 여성의 발달을 거의 마비시킬 수도 있다.

- 본문 80쪽에서 인용

 

위 세 부분은 모두 2장인 '아버지의 딸'에서 인용했다. 2장을 읽으면서 나와 내 아버지는 물론, 내 어머니와 외할아버지의 관계, 그리고 루이자 올컷, 캔디 고 씨, 전혜린, 박근혜 대통령과 그녀들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했다. ( 언젠가 내 글에 써 먹으려고. )

 

만일 여성이 어머니에게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한 것을 두고 계속해서 분노한다면 그녀는 영원히 '기다리는 딸'로 남게 된다. 비록 외부 세계에서는 성숙한 어른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녀는 성장하기를 거부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 자신을 가치 없고 불완전한 존재로 여긴다.

- 본문 280쪽에서 인용

 

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다시 받아들인다면, 내가 사랑받고 싶은 방식으로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게끔 만들 수 없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드러내놓고 마음껏 사랑을 주는 '엄마', 아니 '어머니'를 결코 갖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어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는 어머니에게 제대로 보살핌받지 못한 딸의 고통에 매달려 있을 수 없다. 그 고통은 온전한 내가 되는 것을 방해한다.

- 본문 282 -283쪽에서 인용

 

오늘날 여성 영웅은 자신을 과거에 묶어 놓았던 자아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자신의 영혼이 추구하는 바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을 찾기 위한 분별의 칼을 들어야 한다. 어머니를 향한 분노를 놓아버리고 아버지를 비난하거나 우상화하는 것을 그만두어야 한다. 자신의 어둠을 대면할 용기를 찾아야 한다. 그녀의 그림자는 이름 지어주고 껴안아줘야 할 바로 자신의 것이다. 여성은 자신 안의 이 어둡고 그림자 진 공간에 명상, 미술, 시, 연극, 의식, 관계 맺기, 흙을 만지는 일을 함으로써 빛을 비춘다.

- 본문 337쪽에서 인용

 

위의 세 인용부분은 읽으면서 많이 찔렸다. 나는 아직 어머니와 긍정적으로 분리되어 있지 못한 것이다. 작업하다가 힘들 때마다 치솟는 엄마에 대한 분노의 정체가 이것이었던가! 그래서 예스에 계신 지혜로우신 인생 선배 언니들이 삽질을 하고 흙을 만지는 것이었나!

 

이 책 덕분에, 완전히 마음이 편해졌다고는 말 못하지만 조금 내 그림자를 들어다 볼 수 있어 좋았다. 어느 정도는 진 시노다 불린의 여신 이야기와 겹쳤다. 빨리 마리야 김부타스를 제대로 공부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언니들이 계신다면, 이 책을 강추. 혼자만 읽기엔 아까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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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여성을 말하다
미셸 페로 외 지음, 강금희 옮김 / 이숲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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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각각 다른 세 분야의 전문가에게 한 대담자가 질문하는 방식으로 서구 여성사를 조망한다. 정치학자이자 역사가인 대담자 니콜 바샤랑은 인류학자 프랑수아즈 에리티에에게 여성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과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얻은 여성과 남성의 차이에 대한 그녀의 견해를 듣는다. 다음으로 바샤랑은 철학자 실비안 아가생스키와 대담한다. 철학이란 것이 객관적이지 않고 남성적 관점의 산물이라는 것을, 그 철학이 여성에 대한 어떤 개념을 형성해 왔는지를 듣는다. 세번째,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미셸 페로와의 대담이 이어진다. 서양 중세사, 여성사의 권위자인 페로는 여성의 일생과 세게사를 함께 논한다. 특히 내게는 여성의 노동 분야를 많이 언급한 것이 좋았다. 아이쿠, 알고보니 이 분은 여성사 쪽으로 뛰어들기 전에 원래 노동사 전공이셨구나.

 

이렇게 인류학, 철학, 여성사 세 분야를 다룬다는 점은 장점이자 단점일 수 있겠다. 각 분야별 전문적 정보를 원했다면 이 책은 별로다. 하지만 세 분야를 한꺼번에 훑어봄으로서 전반적인 여성 차별의 역사, 시스템, 현실까지 이어지는 억압의 근원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장점이 더 많다. 게다가 각주가 정말 잘 달렸다. 뒤쪽을 넘겨서 찾아볼 필요 없이 관련 페이지에 바로 달려 있으며 해설이 친절하다. 인물이나 지도 관련해서는 각주에 작지만 도판까지 바로 실려 있다. 편집팀이 굉장히 수고해서 만들었다는 티가 팍팍 나는 책이다. 좋은 책을 편하게 읽게 잘 만들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드리고 싶다.  

 

두껍고 너무 전문적인 여성사, 좀 공격적이고 날선 어투가 읽기 불편했던 페미니즘 서적이 부담스러운 분, 모르는 서양 인물들 주루룩 나와서 책 진도가 안 나가 기존 서구 여성사 읽기 힘들었던 분들께 입문서로 강추한다. 대담 식이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고, 핵심을 대담자 바샤랑이 계속 찍어주고 정리해주기에 그리 이론 공부하는 자세로 긴장하고 읽지 않아도 되어 좋다. 서양 여성사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이 책 이후 <처음 읽는 여성의 역사/동녘><최후의 만찬은 누가 차렸을까?/동녘><여성의 역사/새물결> 순서로 스텝 밟아 읽어나가는 방식을 추천한다.

 

페로   :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새로운 정치 체제를 구상했던 시에예스는 시민에게 투표권을 부여할 때 여성을 제외했죠. 그는 대부분 문맹자였던 빈민 역시 공적인 사실에 대한 이해가 없으리라고 판단하여 참정권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정신병자, 외국인 역시 제외했습니다. 그러니까 여성은 이들처럼 '피동적인 시민'에 속했고 공공 영역에 참여한 활동적인 시민보다 열등한 존재였던 거죠. 하지만 이 '피동적 시민'은 대부분 그 위상이 변할 수 있죠. 예를 들어 아이는 자라서 성인이 되고, 빈민은 재산을 축적하면 글을 배울 수 있죠. 중증 환자는 병이 치유될 수 있고, 외국인은 프랑스에 귀화하면 프랑스 시민이 될 수 있죠. 하지만 여성은? 한번 여성이면 영원히 여성으로 남죠. 그러니까 영원히 정치적 권리가 박탈되는 것입니다.

바샤랑 : 이런 부조리에 대해 아무도 반발하지 않았나요?

페로    : 1790년 <여성의 시민권 부여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쓴 콩도르세를 제외하고는 남자 중에서 항의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 본문 344쪽에서 인용

 

위의 인용부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역사 사실과 논평이 잘 어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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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과 미술 - 열 가지 코드로 보는 미술 속 여성
주디 시카고 & 에드워드 루시-스미스 지음, 박상미 옮김 / 아트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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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리뷰를 썼다가, 친구들과 더 이야기해보고 싶은 책이 생각나서 이 책을 소개한다. 그런데 소개할 생각을 하고 검색해 보았다가 두 번 놀랐다. 8년전 책인데 리뷰가 한 편도 없었고, 판매지수가 너무 낮아서.

 

단적으로 말한다. 이 책, 아주 멋진 책이다. 미술사로도 페미니즘 책으로도, 역사서로도 유용한다. 특히 기존 미술사책이 남성작가들 위주였던 사실에 심히 의아했던 독자에게는 강추다. 기록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뿐이지, 여성미술가들도 많았다.

이 책이 좋은 것이, 질 낮은 서술, 편협한 고발과 소개 위주가 아니라는 점이다. 차근차근 왜 여성 미술가들이 역사에 덜 기록되었는지를 밝혀 준다. 여성 작가의 작품만이 아니라 유명 남성작가들이 여성을 다룬 실제 예도 보여 준다. 회화나 조각뿐만 아니라 퍼포먼스 사진도 많다.

구성도 좋다. '제1장 여신' 부분에서는 고대 예술에 보이는 여신 이미지와 현대 여성 미술가들이 재해석한 여신을 소개한다. 고대 미노스 뱀 여신과 빌렌도르프 비너스가 등장함은 물론이다.  '제2장 여성 영웅들'에서 기독교 성녀들이나 잔 다르크, 유디트 와 같은 여성 영웅들에 대한 남성 화가들의 해석을 고발한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는 물론 독보적이다. 난 이 장에서 엘리자베스 캐틀릿의 <해리엇 터브만> 목판화에 반했다.  여기까지 1,2장만 읽어도 보람차다. 역사와 미술, 페미니즘이 조화롭게 만난다.

하지만 더 보자. '제3장 모성'에서는 인간의 모든 삶의 순간을 화폭에 담던 남성 미술가들이 기피해온 임신과 출산을 살펴본다.  '제4장 일상 속의 여성'은 일하는 여성을 그린다. 산업혁명과 공장 노동, 가사 노동, 기타 전문 분야에서 노동하는 여성들과 전쟁 속의 여성들,,,,, '이어지는 5장과 6장은 좀 열받는다. 제5장 자초한 결과?'는 서양 미술사에서 강간 등 스스로 희생자 운명을 자초한 여성을 그린 그림을 살펴본다. 우리 여성이 보기에는 변태로만 보이는 남성 작가들의 창작행태를 고발할 뿐만 아니라 이에 문제 제기하는 여성 작가들의 작품도 소개한다. '제6장 누워 있는 여자와 창녀'는 마네의 <올랭피아>나 고야의 무하연작처럼 남성 욕망의 대상이 되는  비스듬히 누운 여자의 누드를 분석한다. '제7장 나는 그린다, 고로 존재한다'는 마리 앙투아네트 초상화로 유명한 비제 르브룅 등 과거 보기 드물었던 여성 직업 화가들을 소개한다. 이들의 자화상에서 이들의 자의식을 읽어낸다. '제8장 여성의 몸은 전쟁터'은 남성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남성이 여성의 몸에 대해 가진 공포와 비뚤어진 성심리를 엿본다. '제9장 덧없는 일상'은 거울 보는 여자를 그리는 남성과 여성 화가의 다른 심리를 보여주고, '제10장 정체성 찾기'에서는 마이너 중에서도 마이너인 유색여성, 레즈비언 미술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다양한 창작 활동을 들어  살펴본다.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근원)> 등 기존 미술사책에서 문자로만 보았던 작품이 떡하니 실려 있으니, 주의하시라! 옆에 누가 있을 때 보면 민망할 수도 있다. 그리고 미성년 자녀 눈에 안 띄는 곳에 책을 숨겨 둘 것!

다시 말하지만, 미술사책으로도 페미니즘 서적으로도, 역사책으로도 수준이 꽤 되는 책이다. 도판 등 완성도도 높다. 미술 쪽은 잘 모르지만. 내가 그동안 읽은 여성 미술가 관련 책에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거나 몰래 갖다 쓴 듯한 문장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 분야에서 꽤 권위있는 책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이 책을 보면서 많이 배웠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여성 영웅 그림을 피렌체적 특징에 연관지어 서술한 부분은 이 책에만 있다. 난 이렇게 큰 맥락을 짚어주는 책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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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알렉상드라 라피에르 지음, 함정임 옮김 / 민음사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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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서양 미술사 최초의 직업화가 여성이었던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요즘 이 언니를 추적 중이다. 기존 국내 서점에 나온 책들 중에서 이 언니를 책 한권을 할애하여  자세히다룬 책은 번역서건 국내 저작이건 이 책 한 권 뿐이다. 처음 읽어나갈 때는 인물의 대화나 심리 묘사가 섬세하게 들어가서 소설인가, 했는데 계속 읽어보니 전기문이다. 놀랍다. 각종 문서 보관소에서 아르테미시아 관련 문서들을 방대하게 찾아 인용했다. 끝에 실린 연보와 서지 사항도 아주 알차다. 딸과 아버지의 관계에 집중하는 플롯, 소설적 표현만 빼고 보면, 지금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 아르테미시아 관련 책들 중 가장 자세한 책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17세기 전반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화가.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 덕분에 화가의 재능을 개발할 수 있었으나 아버지 동료 화가이자 그림 과외 선생인 타시에게 강간당한다. 아버지는 고소한다. '세기의 소송'이라 불리는 강간 소송 동안,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고문을 당하고 주변의 멸시를 받는다. 순결을 잃은 여자로 결혼 시장에서 내쳐지고, 수녀원에서도 안 받아줄 신세가 된 그녀. 화가로서의 미래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처한 그녀. 그러나 그녀의 재능을 아낀 로마 참사원 덕분에 400에퀴의 지참금을 받아 그녀는 팔려가듯 피렌체의 화가 피에트로 안토니오 스티아테시와 결혼한다. 사치를 좋아하는 스티아테시는 빚을 갚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기위해 얼굴도 안 본 그녀와 결혼하기로 자원했다. 아르테미시아 입장에서는 남편이 화가여야지만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었기에 불행 중 다행이었다. 당시는 독자적으로 여성이 창작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여튼, 남편이 피렌체 상층 인간들에게서 주문을 받아오고 물감을 사 나르고 해서 그녀는 다시 붓을 잡을 수 있었다. 마침내 그녀는 일생의 대표작<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디트>를 그린다. 칼을 든 여성 영웅 유디트는 자신을 모델로 그렸고, 피를 흘리고 죽어가는 홀로페르네스는 타시의 얼굴로 그렸다. 그녀는 이후 수없이 성경 속 여성 영웅을 자신을 모델로 그렸으며 수없이 타시를 죽였다. 그녀는 상처에서 벗어나 예술로도 인간으로도 승리했다. 1616년 23세에는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디제노 한림원에 직업 화가로 가입해 세상의 인정을 받았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611~1612년경, 캔버스에 유채, 158.8×125.5㎝, 국립카포디몬테미술관

경향신문 기사에서 가져와 인용했음.

 

여기까지가,여성인물열전이나 페미니즘 미술사, 카라바조 파를 논하는 기존 미술사, 여성의 역사, 심지어 메디치 가 역사 관련 서적에 매우 적은 분량으로 등장하는 아르테미시아의 이야기이다. 그럼 그 후는? 그녀는 남편의 보호 아래에서 평탄하고 행복하게 창작 생활을 계속했을까?

 

남편은 그녀가 번 돈을 낭비했고, 빚쟁이들은 그녀를 찾아왔다. 한동안 남편과의 사이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사는듯 싶었지만, 남편 역시 그녀를 이용하고 배반한 것이다. 아니, 아내의 재능에 압도당해 그녀의 정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한 여인이 겪은 강간 사건은 평생 피해를 남긴다) 남편과 사이에 네 아이를 낳았기만 세 아기가 그녀의 품을 떠나 하늘나라로 갔다. 말썽만 일으키던 남편이 행방불명되었다. 아르테미시아는 음악가 러니어, 나폴리 부왕이된 에스파냐 귀족 알카라 공작 등 다른 남자들과 관계를 가진다. (어느 정도는 작품 주문을 해주는 패트런의 요구에 따르는 것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그녀의 자유 의지였다. 그녀는 강간사건 때문에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기쁨과 인생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 점이, 홀로페르네스의 얼굴에 강간자의 얼굴을 그려 화풀이한 점보다 더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 딸에게도 미술 교육을 시키기는 했지만 자신이 살아온 삶이 뼈저리게 힘들다는 것을 그녀는 잘 안다. 두 딸은 열심히 그림 그려 모은 두둑한 지참금으로 좋은 곳에 시집보냈다. (아참, 남편 행방불명된 후 알카라 공작의 아이로 추정되는 딸을 낳았기에 딸이 둘. ) 제노바, 베네치아, 로마, 나폴리, 런던,,, 그녀의 작품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이 그녀를 부르면 그녀는 이주하여 그림을 그렸다. 유럽의 귀족들은 그녀가 그린 역사화와 그녀의 자화상을 동시에 걸기를 원했다. 창작 뿐 아니라 화상인 다니엘 니스와 함께 거장들의 작품을 수입하고 중개하는 사업수완도 보였다. 이 모든 것이, 그 시대의 여성의 활동으로서는 매우 드문 것이었고,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다 훌륭하게 해 냈다. 46세되던 1639년에는 런던으로 가서 아버지 오라치오 젠틸레스키가 주문받아 그리던 그림을 도운다. (그녀의 강간 사건을 자신의 재산 손상사건으로 여기던 친아버지와도 25년만에 화해를 이룬 것이다. - 여기까지, 괄호 안의 문장은 책에 없고, 내가 의미부여한 것임)

 

이런 이야기는 이 책에만 있다. 눈을 아프게 하는 빽빽한 글씨와 530쪽이 넘는 책, 그리고 번역 때문에 읽기 힘들었지만, 읽은 보람이 확실히 있었다.

 

아르테미시아는 로마의 코르소 거리에 정착했다. (중략) 그곳에는 로마의 호화로운 살롱들을 프레스크화로 그리고 있는 한 예술가의 아틀리에 겸 숙소가 있었다. 바로 아고스티노 타시였다.

그녀가 명예를 둘러싸고,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온갖 싸움을 치렀던 장소로 되돌아왔다. 그녀에게는 재회와 내적인 화해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아르테미시아 로미라는 이름과 스티아테시 부인이라는 신분에 이별을 고하는 것이다. 그녀는 아버지의 성을 되찾고, 그 이름을 빛낼 것이다. 그녀는 로마에서 가장(家長) 젠틸레스키가 될 것이다. (중략)

어떤 법적 후견도 없이, 자기 운명의 주인인 아르테미시아는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속할 뿐이었다. 인구 조사 기록 속에서 그녀는 장차 '호주'로 등장할 것이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화가.'

- 본문 346쪽에서 인용

 

위 인용 문단을 보면, 가슴 벅찬 내용에도 불구하고 번역이 좀 껄끄러운 것이 느껴진다. 역자는 불문학 전공자이시고 유명한 소설가인데, 아마 역사 쪽으로는 그리 신경을 쓰지 않고 프랑스어 직역만 하신 것 같다. 지나친 피동 사역 등 서구권 언어 번역투의 문장이 눈에 거슬린다. 프랑스어 표기 인명을 영국, 독일인들에게도 적용한다. 그 나라 인물은 그 나라 인명으로 표기해주어야 한다. 또  한국문화에서 세분화된 친족호칭을 그냥 엉클, 앤트, 커즌, 퀸 그대로 숙부, 숙모, 사촌, 왕비로 번역했다. 심지어 엘리자베스 1세 여왕도 왕비라 번역했다. 이런 부분이 굉장히 많이 보이지만  가장 황당했던 두 가지 예를 들자면

 

467쪽 :

한 세기 전부터 영국 국교는 국민들의 공식 종교였다. 그러나 앙리 3세에 의해 만들어진 그 신앙은

=> 헨리 8세.

476쪽 :

엘리자베스 1세의 총애를 받고 있는 발터 레라흐 경의 신발이 진흙으로 더렵혀지지 않도록 왕비의 발 밑에 자기의 망토를 펼쳤다는

=> 월터 롤리 경(Sir Walter Raleigh), 왕과 왕비는 둘다 여왕.

 

사실 그 언어 문학 전공하신 번역자분이라면, 다른 분야는 좀 모를 수도 있다. 하지만 중학 역사 교과서에서 나오는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여왕 정도라면, 번역가 실수라도 편집실에서 미리 잡아주어야 한다. 작은 출판사도 아니고, '민음사'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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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가들의 은밀한 사생활
로버트 슈나켄베르크 지음, 마리오 주카 그림, 박선령 옮김 / 로그인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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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아씨들>로 유명한 루이자 메이 올컷을 서구에서는 현재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 읽었다. 이 책은 가명으로 쓴 작품과 교훈적 소년소녀소설 사이에서 보이는 작가의 이중성보다 약물 중독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책은 딱 제목 분위기 그 정도로 가 주신다. 흥미 위주이고 유머러스한 문체이지만 아주 허구는 아닌 이야기들이다. 뭐 그리 신선하지도 않다. 톨스토이의 난잡한 성생활이라든가 아내와의 불화,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기기억상실과 실종. 피츠제럴드와 젤다의 기행 등은 이미 독자들 사이에서는 다 알려진 사실이지 않은가? 그리 은밀하지도 않다.

 

나름 취재하고 공부하여 쓴 책 같은데 최근 문학계 연구 성과까지 반영한 것 같지는 않다. 올컷의 경우, 일생동안 병마에 시달린 이유로는 수은 중독설 말고 루푸스 설도 있기 때문이다.

 

여튼, 서구인들이 서구 거물 문학인물을 이렇게도 보는구나, 정도를 파악하기에는 한 번 읽어 볼 만하다.  그러나 그 정도 파악하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들일만한 책은 아니다.

 

다루는 인물들은 윌리엄 셰익스피어, 로드 바이런, 오노레 드 발자크, 에드거 앨런 포, 찰스 디킨스, 샬로트 브론테, 에밀리 브론테, 앤 브론테, 월트 휘트먼, 레오 톨스토이, 루이스 캐럴, 루이자 메이 올컷, 마크 트웨인, 오스카 와일드 , 아서 코난 도일, H. G. 웰스, 거트루드 스타인, 버지니아 울프, 프란츠 카프카, T. S. 엘리엇, 애거서 크리스티, J. R. R. 톨킨, F. 스콧 피츠제럴드, 윌리엄 포크너,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 폴 사르트르, 윌리엄 버로스 , J. D. 샐린저, 잭 케루악, 토니 모리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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