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 다닐 때는 내 시간이 아까워 집에서는 대강 살았다. 살림할 시간을 아껴, 그 시간에 읽고 쓰는 것이 더 좋았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지금은 좀 달라졌다. 의. 식. 주 관련하여 내가 몸을 직접 움직이는 시간 역시 고민하고 쓰는 시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런 생각의
연속선에서, 삶을 담는 그릇에 관심을 가지다 이 책을 만났다.
어릴 때부터 그릇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는 홈쇼핑 엠디와 방송사 편성피디로 직장생활을 하다 지금은 그릇과 패브릭, 가구를 취급하는
쇼핑몰...을 운영하고 있다. 이 책은 저자의 그릇에
대한 관심과 수집 과정, 그릇과 살림, 그릇과 삶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개인적이고 소소한 에피소드를 보편적 공감을 주는 이야기로 엮어내는
솜씨가 돋보인다. 글이 촘촘하고 단단하다. 보통 내공이 아니다. 정밀하며 감성을 담아낸 묘사 부분에서는 그만 흡, 숨을 참고 읽었을 정도다.
일본 헤이안시대 세이쇼나곤의 <마쿠라노소시(枕草子)>를 읽는 느낌과 비슷했다. 인용하자면 이런 대목.
설거지를 마치며 그릇을 하나씩 엎어 두면 크기가 비슷한 두 그릇이 빈틈없이 포개지며 오목한
소리를 낸다. 해와 지구와 달이 만나는 일식, 혹은 월식의 순간에 들릴 듯한 '톡'
- 189쪽에서 인용
이런 그릇에 대한 저자만의 생각은 곧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저자는 설거지한 그릇을
쌓아 올리며 자신의 회사 생활을 회상하고 아래와 같이 쓴다. 이런 부분들이 내겐 참 좋았다.
나라는 탑이 균형을 잃지 않고 서 있는 것은 내 생애 나쁜 사람들보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커다랗고 무겁게 저 아래서 지탱해 준
덕분이다.
- 324
그리고 그릇 덕후로서의 '덕력'이 보이는
대목이 많아 즐거웠다. 영국 드라마 <셜록>을 보던 저자는 악당 모리아티가 런던탑에서 왕실의 보석을 훔치며 동시에 은행 전산과 감옥
보안 시스템을 해제하자, 쉬고 있던 각 담당자가 놀라는 장면에서 즐거워한다. 런던탑 보안 직원은 종이컵에, 교도관장은 머그컵에, 중앙 은행장은
고급 티웨어에 차를 마시고 있는 장면을 매의 눈으로 잡아 낸 것이다. 영국인이라면 누구나 오후의 티타임을 갖는다. 그러나 드라마는 티웨어에
따라 다른 사회적 지위을 꼼꼼하게 보여준 것이다. 이런 서술 부분, 참 재미있었다. 좋아하고 많이 알수록 더 많은 것이 보여서 삶을 더 풍부하게
살 수 있지 않은가. 부디 저자분은, 결혼 안 하고 혼자 살면서 그릇 수집한다고 뭐라뭐라 떠들어대는 사람들 신경 쓰지 마시고 계속 자신
스타일대로 살며 이런 책을 종종 써 주셨으면 좋겠다.
사진에 엮어 몇 줄, 어디서 읽었던 것 같은 글을 양 부풀려 담아낸 흔한 감성 에세이 책이
아니다. 앞으로 쓸 글이 더 기대되는 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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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의 티,,, 인 것도 같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부분이 있다. 272쪽에 할머니 추억을 이야기하는 부분. 할머니께서 좋아하시는
색이 소라색(そら色)이었다는 부분. 일본어인줄 모르고 사용했나 싶기도 하고,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기본 어휘를 익힌 할머니의
언어습관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알면서도 그대로 쓰셨나 싶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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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읽다가 박장대소하며 공감한 부분. 10살 때 수련회에 가서 급식을 거부했던 이야기. 저자는 금속 식판이 너무너무 싫었다고 한다. 똑같은 체육복을 입은 아이들이 급식실에 줄지어 들어가 차디찬 금속 재질 식판에
기계처럼 똑같은 메뉴를 받아 똑같이 먹어야 하는 것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고 한다. 아아, 나도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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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에 대한 정보를 더 원하시는 분들은 조용준 저자의 도자기 여행 시리즈를 이어서 읽으시면
좋을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