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주 노년
김욱 지음 / 페이퍼로드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저자분과 이 책, 독특하다. 1930년에 태어나신 저자분은 2015년 현재 85세이시고 번역가이자 필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다. 이 책은 번역서가 아니라 직접 쓰신, 노년의 자세에 대한 에세이다.

 

<폭주 노년>이라는 제목은 마라톤의 막판 스퍼트에서 따 왔다. 노년은 은퇴하고 조용히 놀면서 보내는 시기가 아니라  죽음 직전에 폭주하는 시기라고 하신다. 저자는 '최후 5킬로미터에서 승패가 결정된다. 내 인생에서 걸음이 멈춰지는 순간은 죽을 때뿐이라는 각오로 젊어서보다 더 미친 듯이 달려야 한다. (238쪽)'고 외치시며 젊은 번역자들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번역을 하신다. 체력은 떨어져도 인간의 지적 능력은 나이들수록 더 좋아진다며, 과거는 영재의 시대였지만 미래는 노재(老材)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다. 노재,라구요? 정말 멋짐!

 

끝까지 일하고 달린다, 바로 이 점이 이 책과 나이듦에 대한 다른 에세이 서적의 내용과 다른 점이다. 은퇴 후 어른답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자녀를 대하고 봉사하고,,, 이런 뻔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어른답게 존경받으려면 어찌어찌해라란 내용도 없다. 건강을 위해 절제하라는 말도 없다. 이분은 끝까지 마시고 달린다. 아놔, 어쩜 좋아! 딱 내 취향인걸! 맥주 아니라 소주파이시긴 하지만.

 

즐거운 여생은 다른 데 있지 않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생산적인 일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최고로 즐거운 여생이다.

- 66쪽에서 인용

 

인간은 천성이 나약하다. 특히 마흔을 넘어서면서 심리적으로 급격히 무너진다. 인생의 반을 살아오면서 앞으로 다가올 반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벌써 반이나 지나간 인생을 붙잡으려고 아등거린다. 어느 순간 미래에 대한 기대를 잊고 과거에 대한 추억과 후회에 붙들리는 것이다. (중략) 60이 넘어서라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여전히 청춘이다.

- 89쪽에서 인용

 

꼬장꼬장하고 칼칼하게 노인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문장을 쓰신다는 점에서는 마루야마 겐지와도 비슷하다. 그런데 이 저자분은 겐지 스타일에 유머를 더했다. 찐따 왕따 에 가정 폭력 운운하는 아래 인용 문단도 웃기지만, 부인이 등장하는 에피소드 부분은 정말이지 읽다가 뿜었다.

 

평생을 일해서 헌신해 왔더니 하루아침에 뒷방 늙은이 대접을 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잇을 테지만, 그럴수록 현재의 자기가 어떤 모습인지 똑바로 눈을 뜨고 바라보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나이 들어 가족에게 '왕따'당하는 모습은 스스로 재현해 냈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가족 모두가 나를 사랑하고 있으리라는 착각, 내가 고생하고 노력해 온 만큼 지금부터는 가족들이 나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 줄 차례가 되었다는 착각, 나는 죽을 때까지 가족 위에 군림하고 명령권자로서 권력을 누릴 권한이 있다는 착각이 머릿속에, 그리고 행동과 말에 배어 있다.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착각하기 시작하면 가족과의 단절은 기본이고, 가족으로부터 은연중에 '찐따'로 분류되는 슬픔까지 맛봐야 한다. 이것은 개인의 불행만이 아닌 가족의 불행이기도 하다. 사랑하고 존경해야 할 가장을 '찐따'로 여길 수밖에 없는 고통을 가족에게 가용했다는 점에서 보이지 않는 가종 폭력이기도 하다.

- 214 ~ 215쪽에서 인용.

 

글 밀도가 매우 촘촘하다. 한 꼭지를 잘라 여러개 꼭지로 늘일 수 있어 보일 정도로 집약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한 문장을 여러번 반복하고 중언부언하면서 한 꼭지 분량을 늘려 쓰는 고약한 저자들은 반성해야한다. 작가의 정신 연령은 문장과 글 구성이 말해준다.

 

이분의 다른 책도 읽어 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