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의 반어법 지식여행자 4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8년 4월
평점 :
품절


국내에 소개된 요네하라 마리의 저작 16권을 완독했다.  (정확히는 15권 반. <대단한 책>을 1부까지만 읽고 포기했다) 마치 16봉 등정에 도전한 것 같다. 하산하면서 생각해보니, 내 취향에는 이 책이 최고봉이었다. 저자의 역사 문화 지식과 인간 관찰력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야기를 연결해가는 구어체 문장이 다음 페이지가 궁금해서 미칠지경으로 읽는 이를 몰아쳐간다.

 

일본인 히로세 시마는 1960년, 체코의 프라하 소비에트 학교에서 무용교사 올가 모리소브나를 만난다. 나이 많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올가는 몸치 학생에게 "이런 천재를 보았나!"하는 식의 반어법을 구사한다. 또한 성적인 욕도 걸판지게 해 댄다. 그녀의 절친인 프랑스어 교사 엘레오노라 역시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구 러시아 시절 귀족 출신같아 보이지만 약간 치매기가 있다. 시마는 일본으로 귀국하고 30여 년 뒤, 러일 번역가가 되어 구 소련 체제 붕괴 후 모스크바로 날아가 올가의 생애를 추적한다. 이 시기 배경은 1990년대다.  소비에트 학교 시절 절친인 카챠와 함께. 올가는 스탈린 치하 ‘알제리 라게리(수용소)' 생존자였다.  시마와 카차의 추적에 의해, 스탈린 치하 숙청 역사와 가슴아픈 개인의 역사가 낱낱이 드러난다. 이  시기 배경은 1930년대. 이렇게 이 소설은 세 시대와 여러 공간을 넘나들며 전개된다. 시마의 기억, 생존자의 수기, 증언 서적, 인터뷰 등등 이야기가 겹겹으로 등장한다. 어느 정도는 우연히 만난 사람이 너무 쉽게 실마리를 제공해주며 술술 풀려가는 유치한 우연성도 있지만, 그런 단점도 소설 전체의 힘을 가리진 못한다.

 

이미 요네하라 마리의 전작을 읽었기에 어느 정도가 논픽션이고 어느 정도가 픽션인지 구별이 가능하다. 프라하 학교에 독특한 무용 선생님의이 존재했다는는 사실이다. 물론 스탈린 시대 배경도 다 사실이고.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도 꽤 나오지만, 다 읽고나면 남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비극을 견디는 힘'이다. 여성 수감자들을 강간하려는 고위 관리에게 '거세 돼지'라며 욕하고 덤비는 올가, 그러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작은 상자같은 징벌방에서 일주일간 음식 없이 갇힌다. 그러나 조금도 기죽지 않고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 올가. 그녀는 징벌방 안에서 단식과 요가수행을 했다고. 그런 그녀를 수용소의 관리들도 두려워했다고.  ‘욕설과 함께 권력과 권위에 순종하지 않는 삶을 배웠다’는 올가! 올가가 수용소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나서 시마는 그녀의 반어법을 이렇게 정의내린다.

 

올가의 모든 것이 반어법이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마치 희극을 연기하는 것 같은 의상과 화장, 그리고 언동은 그 뒷면에 있는 참혹한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던 걸까.

- 429쪽

 

그 순간에 깨달았다. 올가 모리소브나의 반어법은 비극을 호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었다는 것을,,,,

- 430쪽

 

그외에도 230쪽, 수용소의 여자들이 고통스런 현실을 잊기위해 밤이면 자신들이 읽었던 책을 각자 구연해서 들려주는 대목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아래에 인용한다. 고된 수용소 생활, 책도 필기구도 금지되었다. 어느날, 배우 출신 수감자 여성이 과거 자신이 맡은 배역을 연기해 보여준다. 다음날부터는 각자 책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뒤로는 매일 밤, 모두 기억 속에 있는 책을 생각해내고 소리를 내며 이렇다 저렇다 서로 보완하면서 즐기게 되었다. 예전에 읽은 소설이나 에세이, 시를 차례로 '독파'해갔다. 그처럼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나 허먼 멜빌의 <백경>과 같은 대장편까지 대부분 글자 그대로 재연했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 빠져있던 우리가 안나 카타리나를 동정해서 눈물을 흘리고 일리야 일프와 예브게니 페트로프의 <열두 개의 의자>에 우스워서 뒤집어졌다면 믿기지 않을 거예요.”

어깨를 움츠리며 갈리나는 조용히 웃었다.

매일 밤 열리는 낭독회는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수면 시간을 크게 잡아먹었는데도 이상한일이 일어났다. 여자들의 피부에 다시 윤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자유의 몸일 때 마음 속에 새겨두었던 책이 생명력을 불어넣어준 거죠."

- 230쪽


<발자크와 바느질하는 중국인 소녀>만큼이나 문학의, 이야기의 효용에 대해 잘 표현된 책이다. 사후세계가 있다면 이담에 꼭 고인이 된 요네하라 마리 작가에게 이 책을 써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하겠다. 열 살 때 읽었던 <소공녀>만큼이나 내게 이야기의 힘, 문학과 역사의 힘, 부당한 현실에 개기고 버티는 힘을 알려준 멋진 소설이다.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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