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굴의 여왕 계몽사 주니어 클래식 21
헨리 라이더 해거드 지음, 안흥준 그림, 최요안 옮김 / 계몽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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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미지 - 어릴 적 읽었던 이야기의 어느 장면이 너무도 강렬히 기억에 남아 종종 떠오를 때가 있다.

 

하얀 나체의 아름다운 여왕이 불길 속에 스스로 걸어들어간다. 그녀는 날름날름 불길을 먹는다. 그 불기둥에 들어가면 영생불멸의 젊음을 얻는다. 과거에 그렇게 하여 불멸의 아름다움을 얻은 그녀는 2천년간 기다렸던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다시 불기둥에 들어갔다. 그러다 2천년 세월의 징벌을 한꺼번에 받는다. 사랑 때문에 죄를 짓고, 영원과 불멸을 꿈꾸다가 온몸이 작은 원숭이처럼 쪼그라들어 죽어버리는 아름다운 그녀. 사랑하는 남자를 2쳔년간 기다렸던 그녀. 그리고 그녀의 사악함을 알면서도 매혹당하는 남자.

 

내가 가진 계몽사 전집에는 이 책이 없었다. 어디 친구집 같은 곳에 놀러갔다가 읽은 책 같은데, 제목도 작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래도 앞서의 이미지가 너무도 강렬해서 살면서 계속 어른거리곤 했다. 영화 <죽어야 사는 여자>나  바토리 백작 부인 관련 이야기를 읽을 때엔 더욱 그랬다. 이번에 또 그 이미지가 떠오르기에, 열라 검색해서 드디어 찾아 읽었다. 그 제목 모를 소설은 바로 <동굴의 여왕>이었다.

 

아동용 모험 소설인 <동굴의 여왕>으로 축약 발췌되어 나온 이 작품은 원래 헨리 라이더 해거드 (Henry Rider Haggard, 1856~1925)가 1887년에 발표한 <그녀(She : A History of Adventure)>다. 황금가지에서 나온 어른용 완역본 관련 정보를 보니 어린이용에서 뺀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일단, 이 책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읽었는데, 아아, 무진장 재미있었다. 곧 완역본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영국 캠브리지 고고학과 교수 호리 박사는 친구 아들 레오를 5세때부터 키웠다. 레오가 20살이 되자 박사는 레오 부친의 유품을 건네준다. 레오 조상에 얽힌 미스테리를 풀기 위해 둘은 아프리카 탐험에 나선다. 고난 끝에 토인들을 지배하는 고대 도시 동굴의 여왕을 만난다. 여왕은 아름답지만 사악하다. 레오의 조상에게 구애하다가 거절당하자 그를 죽였던 여왕은 2천년간 기다렸다며 이번에는 레오에게 구애한다. 같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동굴 속 불기둥에 들어가자고 권한다. 먼저 시범을 보인 여왕은 2천년간 유예된 노화를 한꺼번에 겪고 죽어 버린다.

 

이건 뭐 인디애나 존스, 암흑의 핵심, 반지의 제왕 등등 모든 제국주의 시절 서구의 모험, 판타지의 원조 중의 원조가 아닌가! 게다가 아름답지만 사악한 불멸의 여성, 이라니! 남성들의 여성에 대한 양가감정이나 판타지, 아니마 등등,,, 많은 흥미로운 요소가 우굴우굴거린다. 배경인 기원 전후와 19세기 말 시대 배경 반영 부분도 재미있고. 어릴 때에는 여왕이 불기둥에 들어가서 비참하게 죽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는데 지금 보니 나이듦과 불멸, 영생을 논하는 부분이 눈에 들어온다. 여왕은 왜 몰랐을까. 걍 나이들면 되는건데. 늙어봤자 예쁜 할머니 될텐데, 같이 늙어가며 중년과 노년의 사랑을 하면 되는 것을.

 

"어린 소년 시절은 그 시절에 맞는 즐거움이 있는 것이며, 20대에는 청년다운 즐거움을 느끼며, 그리고 또 30대, 40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나이에 느끼는 행복이 있지 않겠습니까? (중략)

나는 언제까지나 20세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30세도 되어 보고, 40세의 인생도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내가 불기둥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이 이상 늙지 않는다면, 나의 인생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마는 거에요."

- 216~217쪽에서 인용

 

위는 불멸의 불기둥에 들어가자는 여왕의 말을 거절하면서 레오가 하는 말. 오, 이 남자, 생각하는 게 멋지다. 40세의 인생도 겪어볼만 하다는 것을 20살에 벌써 알다니. 난 4년전에야 겨우 알았는데.

 

"지금 나는 어떤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오면 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중략)

그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하고 알 수가 있어요."

- 168쪽에서 인용

 

그래도 2천년간 사랑하는 남자, 그것도 이미 결혼(2천년전 레오의 조상인 캘리크라테스)/약혼(레오)한 남자를 기다린 여왕이 안쓰럽긴하다.

 

*** 언니분들,

혹시 1980년대에 나온 김영숙(이란 이름으로 일본 작가 베낀)의 <아사와 레도 왕자>라는 만화 아세요? 동굴의 여왕의 이름이 아샤이고, 레오와 레도 이름도 비슷한데, 어느 먼 열대 섬왕국의 후계자 후보인 레도 왕자와 루이왕자가 흑발의 여왕을 데려와야 왕위에 오를 수 있어서 평범한 소녀인 아사에게 구애하잖아요. 그 모티프도 이 작품에서 온 거 아닌가 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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