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이야기 이산의 책 19
수잔 휫필드 지음, 김석희 옮김 / 이산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이 책, 리뷰 안 쓰려고 했다. 혼자만 숨겨두고 몰래 읽고, 내 글에 인용하면서 잘난척 하고 싶었다. 과민성 대장증세가 있는 나는 이 책을 읽어가면서 아랫배가 아팠다. 왜냐고? 이런 글을 쓰는 저자에게 질투가 나서!

 

아아, 이 책 멋지다. 오랫만에 지하철에서 책을 읽으면서 몰입했다. 나는 8세기의 둔황 문서를 넋놓고 보고 있다가 내려야할 역을 지나칠까봐 얼른 21세기로 돌아와야했다. 내가 문자로 만나 흠뻑 빠진 이 세계는 현실인가, 꿈인가. 내 입 속에는 모래가 서걱거리는데. 역사서인듯 소설인듯 이렇게 디테일도 강하고 문장도 멋지다니!

 

영국 역사학자인 저자의 전공은 둔황학이다. 저자는 11세기 이전 둔황 문서를 통해 사마르칸트, 티베트, 위구르, 중국, 카슈미르, 쿠차, 둔황 등 실크로드 각지에서 살던 위인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그려낸다. 이들은 전쟁 등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하면서 개인사와 거대역사가 씨실 날실로 직조되는 과정을 독자에게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원제인 <Llfe Along the Silk Road>그대로, 시공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 삶에대해 은근 성찰하게 해 준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인생에 달관한 인생 선배를 만나 이야기 듣고 한뼘 성장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이하는 출판사의 책 소개글에서 가져온 목차다. 책의 내용을 요약하느니 이편이 나을듯.


1. 사마르칸트와 당나라 수도 장안을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 나나이반다크(730-751)
2. (적군의 장수인) 고선지 장군의 무용담을 후배 병사들에게 이야기해 주는 티베트 병사 세그 라톤(747-790)
3. 중국에 팔 조랑말 떼를 몰고 다니는 목부(牧夫)였으나 티베트와의 전쟁에 징집되었다가 전사한 위구르인 쿰투그(790-792)
4. 정략결혼의 제물이 되어 투르크(돌궐) 카간에게 시집가는 당나라 목종(穆宗)의 누이 태화공주(821-843)
5. 중국 우타이(五臺) 산으로 순례여행을 떠나 천신만고 끝에 장안에 도착하는 카슈미르의 승려 춧다(855-870)
6. 기생이 되어 군대를 따라 전전하다가 장안에서 생활하던 중 그만 황차오(黃巢)의 난에 휘말려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고향 쿠차로 돌아간 금발의 기생 라리슈카(839-890)
7. 어린 나이에 불가에 귀의하여 승방 주지로 생을 마감하는 둔황의 비구니 먀오푸(880-961)
8. 독실한 불교신자이며, 묵묵히 인생의 고통을 감내하는 둔황의 과부 아룽(888-947)
9. 역법(曆法)에 조예가 깊고 불심이 돈독해 뭇사람들로부터 칭송을 얻은 둔황의 관리 자이펑다(883-966)
10. 둔황 석굴을 장식하는 데 평생을 바친 화가 둥바오더(965)

 

한참 <서유기>에 빠져있다보니 자연스레 현장이 지나간 길에 관심이 가서 찾아 읽은 책인데, 예상 외로 기존 역사서에 없는 미시사를 읽은 것 같다. <서유기>와 <대당서역기>에 언뜻 언급된 중앙아시아 지역의 풍습 중에 이 책에 자세히 나와있는 내용이 꽤 많으니 말이다. 심지어, <서유기>가 환상소설이기에 허구일 거라고 생각한 내용까지 이 책에 사실로 나와 있어서 깜짝 놀랐다. 예를 들어, <서유기> 제 8권에 보면 비구국에 간 손오공이 도사로 변신해서 간을 달라는 비구국 국왕 앞에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 대목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면 실제로 실크로드를 떠도는 유랑극단의 차력사나 도사들이 눈속임으로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 보이는 쇼를 공연했다고 한다. 또 삼장을 태우는 용마 같은 경우도 근거가 있다. 용과 암말이 관계해서 태어난 용마에 대한 전설이 실크로드에 흔하다고 한다. 어쩜 생각보다 <서유기>는 사실적인 소설일 수도 있겠다.  

 

이런 세세한 사실을 저자는 어떻게 알고 썼냐고? 당근 출토된 문서다. 둔황 막고굴을 제외하고도 모래에 묻힌 옛 도시나 요새의 방에서 발견한 문서들이다. 그동안 실크로드 관련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방에 문서들이 쌓여 있었는지가 궁금했는데 이 책에서 답을 찾았다. 이하, 이 글을 읽는 친구분들도 이 책의 특징을 맛보시라고 길게 인용한다.

 

세그 라톤은 관측소나 봉화대에 파견 근무하지 않을 때는 미란 요새 동쪽 끝에 마련된 숙소에서 지냈다. 한 평도 채 안 되는 작은 방이지만, 그는 여기서 식사도 하고 잠도 잤다. 이 전초기지에는 쓰레기나 하수를 처리할 방법이 전혀 없었다. 그걸 어디로 가져가겠는가? 병사들은 방구석에 그냥 던져두었다가, 방이 너무 지저분하고 악취가 나서 도저히 숙소로 쓸 수 없는 지경이 되면 그 방을 변소로 이용했다. 이윽고 인간의 배설물과 그 밖의 온갖 쓰레기로 가득 차면 그 방을 버리고, 성벽 안쪽을 따라 방들을 새로 지어서 숙소로 사용했다. 오물로 채워진 방들의 틈새로 잠식해 들어온 모래는 사막의 건조한 기후화 함께 악취를 억제하는 역할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쓰레기가 썩는 것을 막아 주는 보존제 구실도 했다. 이는 1천년 뒤에 그곳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에게는 고맙기도 하고 달갑지 않기도 한 상황이었다.

- 본문 86쪽에서 인용

 

이렇게 이 책은 열 명의 사람들의 열전 식 구성에서 인생을 읽을 수도, 당시의 생활문화사를 읽을 수도 있는 멋진 책이다. 문장도 격조있고 품위있다. 강추.

 

번역은 안록산을 안루산이라 하는등, 현지 중국발음으로 인명과 지명을 표기했다. 중원을 중위안이라 하기도 한다. 이건 좀 심하다.  (그런데 이 출판사의 다른 중국사 책들을 봐도 다 현재 중국어발음으로 표기하고 있으니 원칙은 있는 것 같다. 표기가 오락가락하지는 않는다. ) 책 뒤편에 참고 문헌과 화보 출처, 동시대 지배자 연표까지 잘 실려 있다. (샤를마뉴와 하룬 알 라시드, 당 현종이 거의 동시대 인물이라니, 하고 즐겁게 읽게 해 주시는 센스!) 중간중간에도 본문 내용과 관련있는 둔황 벽화 사진이 실려 있다. 성의있게 잘 만든 책이다. 여튼,  이산 출판사의 책은 다 신뢰가 간다.

 

책을 다 읽고 리뷰까지 썼지만 여전히 아랫배가 아프다. 이번에는 아프다기보다 설렌다. 내 아랫배에는 대장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자궁도 있다. 그러기에 이 책처럼 멋진 책을 낳고 싶어서 지금 나는 몹시 설렌다. 일단은, 이 책의 기를 쏙쏙 흡수해 버리겠다. 원양이 따로 있나.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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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2-25 09: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읽어야짓! ㅎㅎ

자유도비 2015-02-27 11:03   좋아요 0 | URL
라리슈카 이야기, 참 좋았어요. 저에겐 배울 점이 많은 유익한 독서였어요.
아아, <이 언니를 보라>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