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기자의 대당서역기
리처드 번스타인 지음, 정동현 옮김 / 꿈꾸는돌 / 2003년 11월
평점 :
절판


 

<서유기> 완역본 전집을 읽으면서, 서유기 관련한 책들은 검색해서 나오면 다 읽어보고 있다. 그동안 역사서, 해설서나 기행서 등등 여러 서적들을 만나보았건만 <서유기>의 원전이라 할 수 있는 <대당서역기>의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기행서적만큼 읽으면서 기이한 느낌을 받은 책은 다시 없을 것 같다.

 

진짜다. 이 책 기이하다. 정체, 즉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대당서역기>를 설명하거나 답사하는 책도 아니고, 자신의 여정 견문 감상에 충실한 기행문도 아니다. 지금도 가기 힘든 지역인지라, 확실한 여행 정보가 있기라도 한다면 좀 모를까? 그러나 그런 것도 없다. 여행 전후 필자의 변화도 납득이 되지 않는다. 분량은 자그마치 520쪽이 넘고, 글씨는 빡빡하다. 절판이어서 먼 지역의 도서관까지 가서 구해 읽었는데(그것도 서고에 있어서 줄 서서 사서분께 신청해서) 내 노력과 시간을 들인만큼 뭐 남거나 건진 게 없다.

 

책 상세 설명 페이지에 의하면 "뉴욕타임스 기자인 저자와 당나라 승려 현장의 시간을 초월한 긴 모험. 중국 동부의 서안을 출발. 중국 대륙을 가로질러,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파키스탄을 거쳐 인도에 도착, 다시 중국으로 되돌아오는 긴 여행은 당나라 승려 현장이 진리를 찾아 인도록 갔다가 되돌아온 그 길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라는데, 그게 다다. 걍 그 길을 따라 가고, 중국사 전공인 자신이 아는 것(글쓴이는 그 대단하신 패어뱅크 교수의 제자임)과 현장에 대한 것, 자신의 사적 소회를 좀 풀어 놓는다. 자기 이야기도 하다 만다. 오래 저널리스트 생활을 해서 인지, 글 안에 자신을 숨기는 문체에 익숙한 것 같다. '1. 팽생 몇 번의 봄이 지나가는가''7.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병' 이런 제목은 멋지게 달았지만 별 내용 없다. 낚시 제목이다.  마지막 장 제목은  '21. 여행 끝에 도달한 진리'이지만, 난 글쓴이가 뭔 진리에 도달했는지 모르겠다. 걍 50넘게 방황하던 것을 정리하고 한 여성과 결혼해서 정착하기로 했다는 것? 일상이 소중하다는 것? 그게 다인가? 그걸 꼭 현장의 취경 여행길을 따라 개고생하며 다녀 봐야 도달하게 되나?

 

집은 필수이다. 집은 좋다. 집은 끔찍하다. 집에 대한 두려움이 50대가 되어서도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도 낳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하지만 미혼에 아이도 없는 남자는 반쪽짜리 남자라는 탈무드의 질책이 마음 한구석에 걸리기는 한다.
이제 여행의 최종 도착지가 보이는 감숙성 끝자락을 달리는 차 안에서, 나는 두려움의 정체를 깨달았다. 집은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성 안에서 사람은 나이를 먹고 늙어 죽는다. 집에서 시간은 흐르고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은 늙어간다. 하지만 여행 길에서 시간은 멈춘다. 아니 멈추고 있는 것 같다. 너무 바쁘게 움직이느라 시간의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부처는 이것을 이해했다. 부처가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삶의 실체를 알고 나자,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집을 떠나 방랑의 세월을 보낸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리고 오늘날 남루하고 약간 미친 듯한 힌두 성인들처럼 방랑의 삶을 시작했다. 집은 궁극적인 집착이고 깨달음을 얻는 것은 그 집착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부처가 죽고 제자들이 첫 불교 집회를 열기 위해 독수리 산봉우리에 모인 후, 지도자 카시야파는 부처의 사촌이자 부처가 가장 아낀 애제자 아난다가 그들 사이에 좌정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난다는 다음날 아침 되돌아와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하고 나서야 문을 통과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집은 원시의 끈이다. 나는 이 여행, 이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이젠 너무 늙어서 앞으로 여행을 계속하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큰 모험을 하고 싶었다. 가보지 못한 가장 먼 미지의 땅으로 떠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 중국 맞은편의 안개 자욱한 푸른 산맥에서 도로를 바라보면서, 미지의 모험은 이미 지나갔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정시에 서안으로 되돌아가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본문 495쪽에서 인용 

 

인용해보자면, 위와 같다. 뭔가 느낌이 오는가? 나만 이상한가? 그럴 수도 있겠다. 아마 내가 이런 스타일의 먹물 남자들에게 편견을 갖고 있기에 이 책의 내용이 시시했는지도 모르겠다. 페르귄트이건 오뒤세우스이건 성진이건 이 글의 필자인건, 세상을 맘껏 떠돌며 즐기다가 늙고 힘빠진다음에야 이런 말을 하며 돌아오는 남자들은 내겐 다 시시해 보인다. 똥인지 된장인지 손가락으로 찔러 먹어봐야만 아나?

 

그나마 흥미로왔던 것은 저자가 여행할 당시의 국제 정세가 잘 드러나 있다는 것. 중국, 파키스탄 등 국경을 넘나들며 각각 자국의 정치적 입장을 체화한 사람들의 모습을 덤덤히 묘사하고 있는 점은 저널리스트인 저자의 장점을 보여준다. (파키스탄이 최초로 핵무기 실험을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저자는 1998년에 여행한 것 같다. ) 흉노족에게 황제는 '성 외교'로 목숨과 나라를 건지면서 중국 처녀를 흉노족의 통치자에게 바쳤다(본문 91쪽)라는 식의 가차없는 표현은 신선했다. 화번공주, 혼인정책, 기미정책 등으로 표현하는 동양권 작가의 표현만을 보다 보니, 속이 후련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렇게 한편으로 보면, 이 책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권의 역사를 서구 지식인이 좀 색다르게 표현하는 것을 읽는 재미가 있긴하다.

 

하지만 엘긴 등 서구 유물 약탈자들을 옹호하는 듯한 서술이나 돈황 벽화를 보고 사실적인 공간 논리가 부재(509쪽)하다고 평하는 등 서구 제국주의 지식인의 무식한 시선도 종종 보인다. 그리고 실크 로드를 통한 불교 미술사를 말하면서 신라와 석굴암은 빼고(아마 몰라서 그런 것 같다) 중국에서 바로 일본으로 넘어간다. 최고 활판인쇄본을 말하면서도 무구정광대다라니경도 모른다. 기타 등등 내가 보기에는 반편이 지식인이 쓴 책 같다.

 

그리고, 책의 내용만큼이나 번역도 만만찮게 시시하다. 역자는 걍 영어를 그대로 한글로 옮겨 놓으셨다. 그래서 '반초'는 '반차오'이고 '구마라습(혹은 구마라십, 구마라집)'은 '구마라즙'이다. 심지어 진시황제는 '첫 황제'이고 '대안탑'은 '큰 야생 기러기 탑'이다. 내가 알기로, 번역하시는 분들은 초벌 번역 후에 관련서적 여러 권을 대조하며 용어를 가다듬고 학계의 일반적 용어로 바꿔 쓴다고 들었는데, 이 분은 안 그러셨나보다. 그리고 편집실에서는 초고 들어온 것을 그대로 검토 없이 책으로 내었나보다.

 

이래저래, 여러 면으로 이 책에 내가 들인 에너지와 시간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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