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돌베개 석학인문강좌 12
김호동 지음 / 돌베개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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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많이 읽는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인데 막상 만나서 이야기해 보거나 그 사람이 쓴 글을 보면 전혀 책 많이 읽은 사람같지 않은 사람이 있다. 심지어는 자기가 읽은 책의 내용을 자신의 편견을 뒷받침하거나 개인적 이익을 지키는데 사용하기에 급급한 사람도 많이 보았다. 왜일까.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독서를 통해 자아를 확대하거나 자신이 세계를 보는 시야를 확장시키는 경험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내 경우에는 어떤 책을 읽으면서, 그 책을 읽은 후의 내가 새롭고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음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님을 느낄 때가 있다. 성인이 된 이후로는 주로 역사책을 읽어가면서 그런 경험을 했다. 지금까지 세 번이다. 처음으로는, 10대 말에서 20대 초반에 내가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역사를 배우고 그 시각대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였다. 어릴적 읽었던 세계 명작이란 것들이 대개 19세기 제국주의자들의 시선에서 그려지고 있었다는 것을 자각하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두번째로는 해양사를 통해 바다를 통한 폭력 혹은 소통으로 성립된 근대란 개념을 알았을 때였다. 내가 그동안 배우고 읽어온 역사가 거의 육지의 국가와 문화에 대한 것이었다는 점을 그 전에는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번째로 바로 지금, 실크로드와 유라시아 유목제국에 대한 역사서를 읽으면서이다.  세상에는 농경정착문명뿐만 아니라 유목문명도 있었음을, 그리고 서구 주도의 세계화 이전에 이미 몽골제국으로 인한 세계사의 탄생이 있었다는 것을 나는 몰랐다. 그동안 중국 측 역사 기록에만 의존한 역사책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유목국가와 그들의 생활방식에 대해 편견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나는 내가 편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내게 세번째 세계관의 각성을 가져다준 이 책은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김호동 교수가 강의한 내용을 엮은 책이다. 그래서 전문가의 책이지만 어렵지 않고 쉽게 다가온다. 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몽골제국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내용인데, 각 지역의 개별사 서술과 달리 교류와 융합의 결과로서의 역사 서술을 강조하고 있다.

1장인 '실크로드와 유목제국'에서 저자는 기존의 서구 연구자들이 실크로드를 동서간 교역 루트로 접근하다보니 간과하게 된 부분을 짚어준다. 실크로드를 선이 아니라 면으로 이해해야 하고, 이 지역 유목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실크로드에 대한 중국측 입장은 북방의 유목 세력을 견제하고 황제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군사적, 정치적 이유인 반면 유목국가측 입장은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농경 지역의 물자를 확보하고 교역의 이익을 챙기려는 경제적 이유였음을 밝혀준다. 따라서 유목민의 군사력과 실크로드 지역 상인들의 상업력의 결합은 세계사를 상호연관성을 지닌 과정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세계사의 통합에 결정적인 전기를 이룩한 주체가 몽골제국이었다는 것이다. 실크로드라고 하면 중국과 서구의 문물왕래나 대상들의 낭만만 떠올렸던 내 생각이 바로잡히게 되는 경험을 한 장이었다.

다음 2장인 '세계를 제패한 몽골제국'의 주 내용은 칭기스칸의 몽골제국 성립과정이다. 저자는 칭기스칸 이전의 역사배경을 다룬 후 유목국가의 형성과 구조를 설명하는데, '천호제'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듯이 칭기스칸의 국가 건설의 원동력은 혈연과 무관한 다양한 사람들과의 연맹관계 속에서 나왔음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는 칭기스칸 사후로도 제국을 운영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되었기에 이후 몽골제국을 원나라와 몇 개의 칸국으로 분열된 것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들 원과 칸국들은 일종의 느슨한 울루스의 연맹으로 계속 빈번한 정치, 경제, 문화적 교류를 이루어 결국 '팍스 몽골리카' 탄생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몽골 관련 역사를 중국이나 서양 쪽 사서에서 읽고 정복욕에 불타 약탈하다가 지도자 사후 분열한 야만인들의 역사 정도로 생각했던 내 편견을 깰 수 있기에 충분했다. 신분이나 인종, 종교에 얽매이지 않고 능력에 따라 사람과 관계를 맺은 몽골 제국의 시스템은 같은 시대에 혈연관계, 결혼동맹으로 얽힌 귀족계급과 성직자들의 지배하에 있던 유럽의 중세에 비해 생각해 볼 거리가 많았다.

3장 '팍스 몽골리카'는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몽골 제국을 존속시킨 다양한 제도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참제도가 이후 러시아, 프랑스, 고려에 이르기까지 확대된 점, 색목인의 대거 등용에서 알 수 있듯 몽골제국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에게 각자의 고유한 풍습과 문화를 보장하면서 제국의 통치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넓게 열어 주었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이러한 다민족 다언어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몽골제국에서는 사전과 어학교재가 대량 편찬되고 지폐인 교초가 발행된다. 은 태환 지폐인 교초 덕분에 몽골제국은 오래 전부터 은본위 제도를 채택해왔던 이슬람권과 공통된 경제 기반을 갖게 되어 유라시아 대부분의 지역을 단일한 경제권으로 묶을 수 있었다. 이는 활발한 국제 교역과 여행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카르피니, 마르코 폴로 들의 여행기와 기록이 유럽 대중들에게 전해져 새로운 세계관을 낳게 된다. 결국, 안전한 여행과 교역을 보장한 '팍스 몽골리카'덕분에 이후 유럽인들은 대항해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이는 몽골인들의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활동 덕분에 가능한 것임을 저자는 강조한다.

마지막 4장은 드디어 '세계사의 탄생'을 다루고 있다. 그 과정은 이렇다. 우선 몽골제국의 지도가 이후 <혼일강리도>와 <카탈루냐 지도> 등 전 세계의 세계지도의 성립에 미친 영향을 서술한다. 그리고 최초의 세계사라 볼 수 있는 라시드 앗 딘의 <집사>를 살핀다. 이들 세계지도와 세계사의 존재는 몽골 지배하의 사람들에게 확연한 세계 인식이 있었음을 의미한다.그러나 유라시아 지역이 공유했던 몽골 시대라는 역사적 체험은 동일한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다. 이후 유럽은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해외 식민지 개척과 산업혁명, 민주화 과정을 겪으며 근대를 향해 나아갔지만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이유는 중국의 경우 몽골 제국 이후에도 내륙의 유목민들의 위협을 막는데에 급급, 유럽처럼 해양진출에 눈을 돌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내륙과 해양에 대한 유럽인과 중국인의 관점 차이이지 서구의 편협한 자들이 말하는 식의 근본적인 동서간 인종적 우월성 차이는 아닌 것이다. 이 부분의 저자의 설명이 내겐 참 유익했다. 다른 책에서 그저 아쉬움만으로 언급하고 지나치는 부분을 원인을 밝혀 서술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내 인생 세번째로 깨달음을 얻은 독서를 마쳤다. 사실 나는 역사책을 주로 읽기는 해도 세세한 사건 관련 인명이나 연대는 책을 덮고 나면 잘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점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적 사실 파악보다 역사서 독서는 독자의 세계관이 재정립하는 계기가 된다는 점, 나는 그 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동안 아무 의심없이 보고 진실이라고 믿었던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는 계기, 나와 내가 속한 집단이 아닌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들의 사는 방식을 인정해 주게 되는 계기, 소수의 지배층이 보라고 정한 방식이 아니라 보다 많은 일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세상을 그려보게 되는 계기, 이러한 계기들이 역사서 독서를 통해 내게 다가온다. 즐겁다. 이렇게 몽골제국이 성립한 세계의 지도를 놓고 다른 각도로 보면 우리가 동아시아에 사는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이 서북유라시아에 사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아닌가.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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