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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란하 이야기
샤오홍 지음, 원종례 엮음 / 글누림 / 2014년 10월
평점 :
품절
엄동이 대지를 뒤덮으면 대지는 여지없이 얼어터졌다. 남북으로 또는 동서로 몇 자씩 또는 몇 길씩이나 얼어터지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만 되면
아무런 방향성도 없이 시도 때도 가리지 않고 아무 곳이나 얼어터졌다. 엄동이 대지를 얼어터지게 하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방에 들어가기만 하면 수염에 얼어붙은 얼음을 털면서
"오늘은 몹시도 추운데! 땅이 다 얼어터졌더군!"
하고 말하곤 하였다.
- 본문 13쪽에서 인용
체감온도가 영하 15도를 밑도는 지난 며칠간, 나는 이랭치랭(以冷治冷), 이 책을 찾아 읽었다. 세상에, 손등이나 볼이 아니라 대지까지
얼어터지는 추위라니! 책은, 작가 샤오홍의 고향인 흑룡강성 호란현의 겨울 강추위 묘사로 시작하여 호란하의 풍경, 풍습 묘사로 이어진다.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를 좋아했던 독자라면 반할만한 정조의 문체이다. 이국적이면서도 고전적이다. 한시 외우기를 즐겨했던 어린 시절의
영향인지 작가는 댓구를 사용하여 읽는 맛을 살려 준다. 3장부터는 영화 <황금시대> 앞 부분에 잠깐 나왔던 할아버지의 후원 이야기를
거쳐 호란하 사람들 이야기가 등장한다. 집안, 사합원 울안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특히 마차 모는 집의 민며느리의 죽음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냉정히 묘사하는 것 같으면서도 구습 비판 정신을 담고 있는 루쉰의 글을 읽는 느낌이다.
뭐 이랭치랭 개념이라고 한겨울에 냉면 먹듯 쓰긴 했지만, 이 책이 생각난 것은 사실 강추위가 아니라 샤오홍의 생애를 담은 영화
<황금시대>덕분이다. 영화 보다가 어릴적에 해적판 중국동화집에서 호란하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내가 가진 계몽사
전집 구성에는 이 이야기가 없었으니 아마 학원에서 읽었던 것 같다. 내가 다니던 피아노 학원에는 이런저런 전집들이 대기실 책장에 꽂혀 있었다.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에 일본에서 기획해 낸 전집을 무단으로 번역해 낸 해적판 전집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구성이 참
좋았다. 일본이나 중국 현대 소설도 있었다. 덕분에 내 아랫 세대들은 저작권 시효 없는 서구 명작동화만 읽게 된 반면, 나는 정말 세계명작을
읽을 수 있었으니 거참 이런 아이러니를 뭐라 말해야 하나. 불법 무단 복제 전집으로 성장한 나의 어린 시절이라니!
*** 사족 ***
나는 2006년에 나온 구판으로 읽었다. 구판 표지가 책 내용에 더 어울린다. 작가가 성인이 되어 겪은 삶을 반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어릴
적에 고향 호란하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담은 책이기 때문이다. 어린 관찰자의 당돌함이 느껴지는 구판 표지가 책 내용에 훨씬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