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제인 에어>를 읽을 때마다, 로체스터의 첫부인인 버사를 광녀로 처리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생각을 했다. 버사의 고향 서인도제도 자메이카가 궁금했다. 그곳 여성들의 삶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나같은 사람이 이미 있었다. 1890년 도미니카에서 태어난 진 리스는 <제인 에어>의 광녀 버사의 목소리를 찾아 주는 작품을 이미 60년 전에 썼다. 작가는 웨일즈 태생 의사인 아버지와 백인 크리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크레올 문화와 역사를 몸으로 느끼고 알고 있었다.

 

소설은 버사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한다. 어머니의 이름을 따라 앙트와네트로 불리던 버사는 1830년대 서인도제도의 역사적 격랑을 겪고, 의붓아버지의 재산 덕분에 영국 귀족의 차남 에드워드 로체스터와 결혼하게 된다. 로체스터와는 자라온 성장 환경과 성격 차이로 계속 삐걱거린다. 그녀는 이혼을 원하지만 이미 영국법에 따라 그녀의 재산은 남편에게 속해 있고, 로체스터는 이혼 대신 그녀를 정신병자로 몰아 영국에 데려가 다락방에 가둬 버린다는 내용.

 

제인이 아니라 버사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이기에 아래처럼 같은 사건을 묘사한 대목을 비교해 보면 소설은 더욱 흥미롭다. 버사가 손필드 저택에 방화 후 추락사하는 대목.버사 입장에서 이 사건은 방화가 아니라 해방이다.

 

나를 증오하는 사나이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버사! 버사! 바람이 내 머리에 닿으니 머리칼은 마치 날개처럼 물결치며 펄럭였다. 내가 만일 저 아래 단단한 돌바닥으로 뛰어내리면 내 머리칼이 날개가 되어 나를 둥둥 뜨게 하겠지. 나는 생각했다. (중략) 버사! 버사! 이 모든 것을 나는 순간이라는 시간의 파편 속에서 듣고 보았던 것이다.

-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본문 238쪽에서 인용

 

 

정말로 덩치가 큰 여자로 길고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 여자가 거기 서 있을 때, 그 머리채가 타오르는 불길을 배경으로 휘날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죠. 나하고 그 밖의 몇 사람이 로체스터 님이 천창으로 빠져나가 지붕으로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버사!“하고 부르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그 여자에게로 다가갔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자는 꽥 소리를 지르고 펄쩍 뛰더니, 다음 순간에는 포석 위에 으깨어져 있었습니다.”

- <제인 에어> 민음사, 2권 본문 379-380쪽에서 인용

 

하지만 원래 <제인 에어>에서는 그냥 광녀의 죽음이고 제인과 로체스터 결합의 방해물이 알아서 사라져 주는 정도이다.

 

나는 <제인 에어>를 비롯, 19세기의 명작 소설들이 얼마나 제국주의적 배경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때마다 놀란다. 여성의 권리를 말하는 작품에서조차, 영국 본토나 백인 여성이 아닌 경우에는 얼마나 왜곡되었는지도. 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로체스터와의 사이에 거리감을, 대양을 본다. 하지만 실상, 제인과 버사 사이, 버사와 로체스터 사이, 그리고 저자와 독자 사이에도 넓고 넓은 거리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가 아닐까.

 

소설은, 문학사적으로 의의가 있지만 그다지 읽기 재미있지는 않다. 문제의식을 빼고 보면 엄청 위대한 명작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이것도, 19세기 영국식 문화에 익숙해 생긴 나의 사르가소 바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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