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켈러 자서전
헬렌 켈러 지음, 박에스더 옮김 / 산해 / 2008년 5월
평점 :
품절


 

생후 19개월만에 열병으로 시력과 청력을 잃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헬렌이 래드클리프 대학 2학년 때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기록한 책이다. 원제는 <내가 살아온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라는, 쟝르 상 자서전이지만 그녀 인생의 1/4 정도만 담겨 있다. 그녀 인생의 전체를 볼 수는 없는 책이다. 그런데 그녀의 다른 저작에 비해 이 자서전이 너무 널리 알려진 것이 헬렌을 장애를 극복한 기적의 소녀 이미지로만 대중들에게 기억된 한 요인이 아닐까 싶다.

 

책에는 그 유명한 설리번 선생을 만나 처음 언어를 배운 이야기(교과서에서 읽은), 표절 논란에 대한 입장, 어려움을 극복하고 대학 과정에 도전한 이야기, 촉각으로 세상을 느끼고 마음으로 보는 이야기,,,, 등등이 실려 있다.

 

물론, 장애 극복 과정은 감동적이고, 그런 그녀가 우리에게 주는 메세지는 울림이 크다. 설리번 선생과의 사제간 동반자적 애정 관계 역시 그렇다. 하지만,,, 난 여기에 드러난 모습이 그녀의 전부일까, 스스로 원한 진실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지 않나. 영리한 그녀는 장애를 지닌 자신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방법, 버림받지 않는 방법을 알고 그에 맞춰 자신을 연기하고 글을 쓴 것이 아니었을지. 그리고 시각 묘사가 풍부한 문학적 문장이 온전히 그녀의 것이었을지,,,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한 사람, 그것도 핸디캡을 안고 있는 사람의 인생에 대해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잘 안다. 그러나 이 자서전에서 드러난 헬렌 외에 성인이 된 이후 헬렌이 보여준 행보나 노년기의 삶에 비추어 볼 때, 이 시기 그녀의 모습은 대중들이 바라는 장애 극복담의 모델이 될 정도로 "너무 바람직"하다. 이거, 좀 이상하지 않은가? (나만 이상한가? -_- ) 난 너무 긍정적이고 밝고 착한 사람들을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는다. 완벽한 빛에는 완벽한 그림자가 숨어 있는 법.

 

여튼, 언어를 처음 배우는 아래 인용 부분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이다.

 

우리는 펌프가를 뒤덮은 겨우살이 향기에 이끌려 오솔길을 걸었다. 누군가 펌프에서 물을 긷고 있었는데 선생님은 물이 뿜어져 나오는 꼭지 아래에다 내 손을 갖다대셨다. 차디찬 물줄기가 꼭지에 닿은 손으로 계속해서 쏟아져 흐르는 가운데 선생님은 다른 한 손에다 처음에는 천천히, 두 번째는 빠르게 ‘물’이라고 쓰셨다. 선생님의 손가락 움직임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나는 마치 얼음조각이라도 된 양 가만히 서 있었다. 갑자기 잊혀진 것, 그래서 가물가물 흐릿한 의식 저편으로부터 서서히 생각이 그 모습을 드러내며 돌아오는 떨림이 감지됐다. 언어의 신비가 그 베일을 벗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제야 지금 내 손 위로 세차게 내리꽂히는 이 차가운 물줄기가 ‘물’이라는 것의 정체임을 알았다. 살아 숨쉬는 낱말의 입맞춤을 받은 내 영혼은 긴 잠에서 깨어나 그가 가져다준 빛과 희망과 기쁨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물론 아직도 많은 장애물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장애물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질 것들이었다.

펌프가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내게 배움의 열의를 불어 넣었다. 모든 사물은 이름을 갖고 있었으며, 각각의 이름은 새로운 생각을 불러왔다.

- 본문 45 ~ 46쪽에서 인용

 

헬렌의 뛰어난 묘사력과 문학적 재능이 설리번의 영향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게 해 주는 부분.

 

선생님은 늘 내 가까이 계셨으므로 나는 선생님과 나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들을 대할 때의 내 기쁨 가운데 얼마만큼이 내 스스로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얼마만큼이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영향인지 또한 말할 수 없다. 선생님 따로, 나 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내 삶의 발자취는 고스란히 선생님의 발자취이다. 내게 훌륭한 점이 있다면 그건 모두 선생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분의 사랑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내게 재능도 영감도 없었을 것이고, 기쁨 또한 없었을 것이다.

- 본문 69쪽에서 인용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이 닫아버린 문'이란 표현에 마음이 저리다. 책을 읽었으니, 메모를 위해 리뷰를 남기기는 하지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쓰는 것이 두렵다.

 

때로 고독이 찾아들고 차가운 안개처럼 나를 에워싼다. 다만 홀로 앉아 기다린다, 인생이 닫아버린 문 앞에서. 저 너머엔 빛이 있다. 음악과 즐거운 사귐이 있다. 입장을 허락받지 못한 채 나는 문 밖에 있다. 누가 내 길을 가로막는가, 운명, 침묵, 무자비? 아, 이 가혹한 처사에 항변하련다.

- 본문 214쪽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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