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이야기의 매력 1
브루노 베텔하임 지음, 김옥순.주옥 옮김 / 시공주니어 / 199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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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15년을 함께 한 책이다. 1998년, 예스 블로그 하기 전에 읽었기에 블로그에 리뷰로 남긴 적은 없다. 그 사이에도 계속 이 책을 군데군데 읽기는 했지만, 어제 다시 맘 잡고 통독하고 리뷰 올린다. 사진을 곁들인 이유는, 이 책이 얼마나 낡았는지, 내가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이 책을 좋아했는지를 내 친구분들께 보여드리고 싶어서이다. 좋아하는 동화책을 모서리가 낡을 때까지 두고두고 읽는 어린이는 있어도, 좋아하는 동화 이론책을 모서리가 낡을 때까지 두고두고 읽는 어른은 아마 드물 것이다. 핫핫.

 

이 책은 심리학자인 저자의 입장에서 옛이야기가 어린이의 성숙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 각 이야기의 예를 들어 서술하고  있다.  옛이야기는 전혀 비현실적이지 않다. 이야기는 환상적이고 상징적인 이미지들을 통해 어린이가 가진 현실의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준다. 구성은 단순하다. 선과 악의 구분도 명확하다. 이를 두고 요새 전집 장사꾼들이 '옛날 이야기는 단순하고 전형적이어서 아이들의 창의성을 키워주지 못하니 창작 동화부터 먼저 읽히시라'고들 한다는데 이는 천만의 말씀이다. 단순함과 권선징악과 행복한 결말, 이는 아이들이 앞으로 헤쳐나가야할 무시무시한 세상에 대한 공포를 덜어준다. 물론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선과 악은 혼재되어 있다. 그러니 이런 단순한 이야기부터 몸에 익혀 항체를 만들어야 한다. 지나치게 잔인하다고 옛 이야기를 순화시키거나 결말을 바꾸는 것도 좋지 않다. 아이들은 악인이 확실히 징벌받는 것을 확인해야 안심하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적용시키는 것은 좀 그렇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옛이야기의 기능은 부모를 떠나 세상에 나가기 전의 아이들을 성숙시키는 것, 이 해석은 참 좋다. 이야기 속 가난한 아이는 왕이나 왕비가 된다. 그러나 누구나 현실의 왕과 여왕이 될 수는 없다. 이야기를 읽고 힘을 얻어 건강하게 성장한 아이는 그 자체로 자신의 왕국의 왕이 된 거다. 즉,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 말이다. 아, 좋다.

 

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 힘든 일이 있을 때 나는 이상하게 그리 힘들지 않았다. 바닥을 치며 울다가도, 나는 나 자신의 능력을 항상 믿었다. 내 마음 속에는 시련을 겪기도 전에 이미 완성된 진주가 만들어져 트윙클 트윙클 빛나고 있었다. 누군가는 이를 '자뻑'이라 할 지 몰라도, 나는 이 이상한 자신감이 내가 읽은 책들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특히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에서. 난 길 떠나 모험을 하는 아이, 버림받은 신부, 왕국에서 쫓겨난 공주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맷집을 키웠다. 수많은 내 인생의 여러 길들을 시뮬레이션했다. 힘든 일이 닥쳤을 때, 내 머릿속에는 이미 두꺼운 매뉴얼북이 있었다. 펴서 읽고, 실천만 하면 되는 거였다. 이것이 바로 옛이야기의 힘이다. 이런 생각을 마음 속으로만 하고 있다가 이 책을 만나니 어찌나 반가운지! 가슴 속에 품고 읽고 또 읽었다. 변태같지만, 읽다가 감동받아 울기도 했다. 더이상 어린이가 아닌 난 동화책이 아닌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을 위로하고 꿈을 꿀 수 있었다. 고마운 책이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이 웃긴 리뷰에는 반전이 있다.

 

저자인 브루노 베텔하임 (1903년8월28일~1990년3월13일)은 독일계 유태인으로 오스트리아 빈 출신이다. 단박 프로이트가 떠오른다.1938년 빈 대학에서 심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디하우와 부헨빌트에 있는 유태인수용소에 1년간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 미국으로 이주해 1944년부터 시카고 대학교에 몸 담았다. 그는 어린이 심리와 자폐아 연구에 큰 업적을 남긴 정신의학자였다. 그런데 이 책이 국내 발간되고 2년 후인, 1990년, 그가 자살했다. 부인을 암으로 잃은 후였고, 유태인 수용소 경험이 있기에 난 그의 자살 이유를 그런 쪽으로만 생각했다. 아, 아무리 마음 속에 옛이야기의 힘을 갖고 있어도 현실은 만만치 않은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사실은 자살 직전, 그의 치부가 폭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정식으로 심리학을 배우고 학위를 받은 적이 없었다. 운좋게도 나치가 빈 대학기록을 파기시켜 버려 그의 신분을 확인할 수 없었기때문에 그는 자신의 경력 위조와 사칭이 가능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환자에 대한 폭언이나 신체적 폭행, 성적 학대를 자행한 사실도 폭로되었다. 실험 결과에 대한 조작 의혹도 제기되었다. 심지어 수용소 탈출과정에서 독일 군인 매수설까지 떠돈다. 현재 사후의 그에 대한 존경심, 그에 대한 업적 평가는 프로이트에 비견되던 생전만 못하다. 물론, 이런 사항은 각 인터넷 서점의 이 저자 소개글이나 책 날개에 나오지 않는다.

 

아, 이건 뭘까? 이런 인생은 또 뭘까? 이런 책을 쓰고 이런 행동을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뭐가 있었을까? 자신이 역설한 '옛이야기의 힘'은 어디로 갔나?

그래도 이 책의 가치는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저자의 옛이야기 분석하는 글마다 나는 베텔하임의 그림자를 느낀다. 나 역시, 동화나 민담을 다룰 때, 그의 시각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글은 평생 쓰지 못할 것이다. 여튼, 이 책을 읽으며 지난 15년, 나의 개인사와 저자의 개인사가 얽혀 이 책은 더욱 내게 의미심장하다. 여러면으로 잊지 못할 내 인생의 책. 아듀, 내 오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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