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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고 -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 혹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삼우반 / 2004년 4월
평점 :
품절
1492년, 콜럼버스가 (멀쩡히 그 자리에 잘 있던)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 신대륙의 이름은 콜럼비아가 아니다. 우리는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서 이 신대륙을 "아메리카"라고 부른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에 따르면 베스푸치는 콜럼버스보다 7년이나 늦은 1499년에 미대륙을 탐험했는데 말이다. 여기에는 우연과 실수, 혹은 의도적 왜곡으로 꼬인 유명한 역사적 오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 사연을 저자 츠바이크는 그 특유의 매력적 문체로 더듬어 나가, 독자로 하여금 어찌보면 아메리카가 베스푸치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을 필연으로, 희망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말한다. '잘못 놓은 수들로 얼룩진 저 유명한 역사의 장기판을 한 수 한 수 끝까지 두어보려는 것이다(본문 8쪽에서)'라고. 이 역사의 장기판을 다시 두는 모습을 한 수 한 수 지켜보는 것, 바로 독자인 나의 핵심 즐길거리였다.
건조하게 간추려서 기록해 놓는다면 이하와 같다. 메디치 가문의 피고용인이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자신의 항해담을 고용인인 메디치가에 보고한다. 그런데 그 편지가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편집되어 이른바 베스트셀러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돈에 눈면 인쇄업자들은 짜깁기로 후속편 팜플렛들을 찍어낸다. 거기에 식자공의 오식이 더해져 그가 콜럼버스보다 먼저 미대륙에 첫발을 디딘 셈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베스푸치의 업적을 찬양하게 된 지도제작자 발트제뮐러는 1507년 <지리학 입문>이라는 책에서 신대륙에 아메리고의 라틴어 이름 여성형인 "아메리카"를 붙여 버린다. 이후 라스 카사스 주교 등등의 논자들에의해 베스푸치는 콜롬버스의 명예를 빼앗은 사기꾼 정도로 폄하되다가 300여년이 지나 메디치가문에 보낸 그의 편지 복사본이 발견되면서 베스푸치는 비로소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게 된다. 사실 베스푸치는 결코 자신이 신대륙을 처음으로 발견했다고 주장한 바가 없으며 이 모든 것은 저작권 개념이 없던 시절의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스푸치의 업적이 전혀 없는 것도, 미대륙에 아메리카란 이름이 붙은 것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말한다. 대항해 시절 당시, 콜럼버스를 비롯 선구자적 항해자들이 이룬 업적 못지않게 베스푸치의 업적도 지대하다라고. 당시에 일확천금 인생역전을 꿈꾸며 아무 생각없이 탐험선에 승선하여 떠났던 사람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그는 발견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 때문에 항해에 나섰지 않은가. 황금에 눈먼 남자들이 무기를 들고 낯선 곳의 이민족들을 폭력으로 제압할 때 그는 인문학자로서 펜을 들고 이민족들을 관찰하고 묘사했지 않은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는 바로 자신이 도달한 곳이 어디인지, 자신의 탐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똑바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베스푸치는 그의 편지가 인용된 팜플렛에 정확히 네 음절, "문두스 노부스(Mundus Novus, 신세계)"라는 표현을 했다. 이 표현 자체가 세계를 보는 관점에 있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혁명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모두들 잘못 생각해서 서쪽에서 인도를 발견했다는 망상에 눈멀어 있던 시절, 그만은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학자, 항해가, 상인, 제후들 할 것 없이 모두가 초조하게 기다렸다. 유럽 전체가 기다렸다. 그 모든 것을 발견한 뒤 사람들은 마침내 그들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세기의 결정적인 업적은 이루어졌다고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아직 그 업적의 의미와 그에 대한 해석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 37쪽에서
이러한 의미에서 베스푸치는 실제로 아메리카의 발견을 마무리지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발견이나 발명은 그러한 발견이나 발명을 행한 사람보다는 그것의 의미와 작용을 인식한 사람을 통해 궁극적인 타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콜럼버스가 행위이라는 공적을 세웠다면, 베스푸치에게는 앞에서 한 그의 말을 통해 콜럼버스의 행위에 대한 역사적 해석이라는 공적이 돌아간다. 그는 자신의 앞 사람이 몽유병 환자처럼 헤매다가 발견한 것을 꿈의 해석가처럼 구체적으로 밝혀냈다. - 54쪽에서
이렇게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끝났다. 이제 나는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쓴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 혹은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역사 관련서에 적힌 내용이 전부 객관적 사실이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역사 해석을 통해 걸려져 독자에게 전달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이 잠 못드는 새벽, 왜 저자는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사나이에 대한 이야기를 유고작으로 남겼을까를 나는 고민한다.
책을 다시한번 쓰다듬어 보고, 이어서 생각해 본다. 당연히 미대륙이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얻기까지의 역사적 '오류'에 얽힌 이야기,라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왜 '희망'에 대한 이야기라고 했던가, 하는 점을. 그리고 이 책이 저자의 유고작이었다는 것과, 저자가 망명 이후 2차대전의 참상에 절망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혹시 저자는 이 점에 주목하지나 않았을까. 지리상의 발견과 대항해 시대, 그러나 지도에 남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숱한 폭력적 제국주의자들이 아니라 인문학자적 자세를 지니고 자신의 할 일을 찾아 묵묵히 실행하고 기록한 아메리고 베스푸치였다는 점에.
슈테판 츠바이크, 아마 그는 그런 베스푸치의 삶을 보고, 폭력과 잔학으로 얼룩진 현대를 살아가면서 그래도 후대에 역사에 남을 희망을 찾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현재 자신이 하는 행위의 의미를 모르고 파시스트의 선동에 빠져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던 당시에, 그는 세상을 똑바로 보고 자신이 하는 일을 인식했던 아메리고 베스푸치라는 외로운 사나이가 있었노라고 세상에 말해 주고 싶지 않았을까. 이렇게 볼 때, "우리 가슴속에 묻어둔 희망을 두드리는 이야기"라는 부제는 매우 정확해 보인다.
예측 불가능한 역사의 자장 속에서는 종종 아주 작은 자극 하나가 엄청난 영향을 일으킬 수 있다. 역사에서 정의를 요구하는 사람은 역사가 주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꼴이다. 역사는 대체로 단순하고 평범한 남자에게 위대한 행위와 불멸을 선물하고 가장 훌륭한 자들, 가장 용감한 자들과 현명한 자들은 이름도 부르지 않은 채 어둠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메리카는 자신의 세례명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그 이름은 올바르고 용감한 사나이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 178쪽
어쩜 위의 문단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에 대한 저자의 평가라기보다 2차 대전 당시 폭력과 광기와 파시즘에 직면하여 스스로 자신에게 걸고픈 한 나약한 인간의 자기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아파 온다. 곧 해가 뜨려나.
(이 책의 집필 시점 이후 이후 70여년이 흘렀으므로 베스푸치에 대한 이 책에서의 저자의 입장을 반박할 자료나 논문이 더 나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점을 떠나서 저자 슈테판 츠바이크의 매력을 엿보게 해 줄 '충분히 가치 있는' 책이다. 역시 슈테판 츠바이크, 질투 유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