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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로 보는 악과 악마
이경덕 / 동연출판사 / 1999년 6월
평점 :
품절
책을 읽다보면, 일부러 찾아 읽은 게 아니라 내가 관심가는 분야를 읽었을 뿐인데도 계속 만나게 되는 저자, 역자분이 있다. 이 책의 저자이신 이경덕씨도 그렇다. 처음에는 내가 좋아하는 강상중 선생님 책들의 역자로만 알았다. 그런데 신화, 종교, 일본 역사 쪽으로 읽어나갈수록 자꾸 이분을 만나게 되지 뭔가. 아무래도 내가 독자로서 스토킹에 나서야 할 저자분이신 것 같다.
책은 전반부에서는 '악이란 무엇인가'하는 철학적인 문제를 놓고 신화, 철학, 고대 종교에서의 악의 개념을 다룬다. 후반부에서는 일반인들이 갖는 악의 이미지를 생활속에서 살핀다. 민담이나 풍습, 문학작품을 통해서. 내겐 후반부의 여러 사례들이 훨씬 재미있었다.
책이 두껍지는 않지만, 담고 있는 내용이 워낙 방대해서, 요약 소개가 불가능한 책이다. 그래도 인상깊은 부분을 잠깐 적어 보겠다. 신화 쪽에서 악의 탄생을 서술한 부분이다. 신화는 인간이 자연을 객관화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즉 고대의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면서 자연과 신을 객관적으로 상정하고 사고하기 시작하는 데에서 신화가 탄생했다는 말이다. 천둥벼락이 치면 천둥의 신을 만들고 하는 식으로. 이 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의 공포가 악신으로 인격화된다. 그런데 이 인간과 자연의 분리과정 때 일어나는 긴장이 신화에서는 선과 악을 각각 대표하는 쌍둥이의 싸움으로 표현된다는 것! 수많은 종교 경전과 신화 속에 등장하는 쌍둥이의 갈등이 바로 그런 거였다니, 정말 흥미롭다. 또 고대사에서 전쟁에 패배한 종족의 신이 악마의 지위로 전락하여 승리한 종족의 신화나 민담 체계에 편입되어 악마가 탄생하기도 했다라는 설명도 재미있었다. 악은 선에 대응해서 그려지므로 다신교에서의 악마들보다 유일신교에서의 악마들이 더 강력하다는 것도 역시 재미있다. 물론 내게 제일 흥미로운 부분은 몽마(인쿠부스, 스쿠부스), 늑대인간, 마녀, 흡혈귀 같은 서양 중세 민담 속의 소악마들 이야기였다.
이 책 자체는 좀 산만하다. 논문 같은 느낌이다. 중언부언하는 내용도 조금 있다. 자신이 아는 방대한 지식을 어떻게 담아낼지몰라 저자 스스로 글쓰면서 곤란해한 느낌이 든다. 이 책은 저자분이 30대 후반에 쓰신 책이다. (한 저자분을 스토킹해 읽으면서 이 분이 어느 연령대에 이 책을 쓰셨는지, 그 앞뒤로 비슷한 소재나 주제를 가지고 쓰신 다른 책의 수준은 어떤지 비교하면서 읽는 버릇이 있음) 이 저자분은 40세 이후로 대중적 문장 전달력을 갖게 되신 듯 하다. 저자분이 40대 초반에 쓰신 <우리곁에서 만나는 동서양 신화>와 비교하면 이 책은 (죄송하지만) 이 책은 난삽해 보일 정도로 전달력이 아쉬운 편이다.
그렇지만 동서양 신화와 종교, 문학을 넘나들면서, 기성 종교와 민중 신앙까지 넘나들면서 (가톨릭과 오컬티즘 쪽 같은) 버라이어티한 예를 들어 어려운 주제를 패기있게 다뤄 주신 점은 정말 감탄스럽다. 나는 이 책에서 여러 방면으로 두고두고 많은 도움을 받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