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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은 삐딱한 세계사 - 우리가 알지 못한 유럽의 속살
원종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일단 이 책은 세계사 통사류의 책은 아니다. 목차를 보면 로마제국부터 시작하여 2차대전 시기의 일본과 히틀러 독일 이야기까지 흘러가지만, 그 사이 유럽사의 흐름을 따라 모든 사실을 나열하지 않는다. 저자분은 오직 한 가지에 주목하여 500쪽에 달하는 이 책을 서술하는데, 그것은 바로 '근대정신'이다. 즉, 어떻게 지금의 세계가 유럽 중심의 세계로 형성되었나, 하는 점을 추적하다보니 만나게된 유럽 문명의 원동력으로서의 '근대성'이다. 저자는 로마 문명과 르네상스 이후 계몽주의, 합리주의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각 유럽국가의 중세에서 근대 이행기에 발생한 사건들에 주목한다. 프랑스혁명, 영국의 명예혁명, 나폴레옹 전쟁 등등의 명암을 논한다. 그리고 중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근대는 달성되지 않았음을 주장한다. 자유, 평등, 박애의 프랑스 혁명 이념을 포함한 모든 근대적 가치가 아직 달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강제개항과 식민침략으로 서구의 근대 개념을 받아들인 비서구권만 아니라 서구권 내에서도 말이다.
저자는 서구에서 태동한 근대 정신의 달성을 논하면서 다행히도, 서구 찬양 일변으로 가지 않는다. 실제로 영국과 캐나다에서 생활하면서 일상에서 겪은 서구인들의 편견이나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갖고 이 책을 쓴 것 같다. 처음 책을 보고 두께에 놀라 뒤편의 참고 문헌 목록 먼저 살펴 보았는데, 놀랍게도 20편도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저자분이 겨우 20권도 안 되는 역사책만 읽고 이 책을 썼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철저히 자신의 경험과 생각에서 나온 문제의식을 갖고 집필했다는 의미.) 그래서인지 이 책은 역사 사실 자체보다 자신의 논평 위주로 간다.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얻기를 위하는 독자보다, 이미 큰 흐름은 알고 있으면서 그 해석에 관심이 있는 독자, 지금 이 세계의 문제의 원인을 역사를 통해 살펴보기를 원하는 독자에게 적합한 책이다. 그러기에 아직도 교과서나 서구인들이 쓴 역사책을 통해 그들 역사의 의의만을 배우고 읽어온 순진한 독자들에게는 아주 유용한 책이다. 서구인들이 내건 멋진 슬로건이 사실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며, 그들이 내세우는 인류 보편의 가치(자유 평등 박애)가 서구의 일부 지배층에게만 해당되는 것임을 저자는 적나라하게 밝혀 주기 때문이다.
한 문명의 수준은 부,과학기술, 법 제도 같은 표면적인 것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문명이 증오를 얼마나 통제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부의 재분배라든가 사회적 기회의 확보와 함께, 증오를 현명하게 통제하는 문명에서는 일상에서의 평화와 행복을 구가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 구성원 간의 미움이 만연된 사회는 제 아무리 국내 총생산량이 높다 한들 타의 모범이 될 수 없다.
중세는 과연 끝났는가. 십자군과 마녀사냥은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나의 증오가 이데올로기, 신념으로 포장되어 미움과 폭력으로 발휘되는 일은 이제 다시 없을 것인가. 이 질문의 답은 우리가 앞으로 만들어갈 세상이 던져줄 것이다. 이념이나 이론, 슬로건이나 명분이 아닌 삶 자체가 말이다.
- 본문140-141쪽에서 인용
르네상스와 근대의 노력은 단지 과거에 대한 향수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성과 과학으로 얻어낸 능력을 통해 인간 자신이 신을 대체하는 존재로 진화해가는, 또 신이 차지하고있던 존엄성을 스스로 획득하려는 시도였다.
인류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도 기적처럼 근대를 이끌어냈고, 비록 두 차례의 세게대전 등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지만 전체적으로 많은 성과를 얻어냈다. 다만 우리가 알아야 할 점은 근대는 완결되었거나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형이라는 사실이고, 21세기를 살아가는 현재에도 중세의 잔재가 매일의 삶에 넘쳐나고 있다는 점이다. 근대의 자각은 인간 자신을 독립체로서 객관화하면서 모든 다른 생명을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는 능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부단한 지성적인 연마와 성찰이 요구되고 이런 노력이 현실의 삶에서 일반적이고 당연한 것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꿈꾸는 근대는 결코 달성될수 없다.
- 본문 216쪽에서 인용
전문 역사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수많은 역사서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분도 아닌 이 저자, 자신의 경험과 성찰을 바탕으로 현 시대 세계와 한국 사회의 문제의 근원을 파헤쳐 보려는 이 저자. 흥미롭다. 이런 저자분의 사고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뒤편에 부록처럼 실려 있는 프리메이슨 부분을 읽어보니 조금 느낌이 온다. 이 분은 이른바 주류라고 하는 측의 해석과 시선보다 자신의 비판적 시각을 믿는 사람인 것 같다. 그리고 사회 문제의 해결을 시스템 & 개인의 각성과 의지란 양 측에서 다 접근하고 있는 점(위의 인용문단 밑줄 쳐 두었음)도 개인적으로 호감이 간다. 난 체제의 문제만 비판하며 개인적 도덕적으로는 덜된 반쪽짜리 지식인도 싫고, 본인의 노력과 긍정적 마음가짐, 삶의 자세만 강조하는 힐링 멘토들도 싫기 때문이다.
여튼,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근대 정신'. 그러다보니 '중세'가 너무 편협하게 다뤄진 약점도 있다. 서구의 인문주의자들이 전시대인들과 자신을 차별화하고자 만들어낸 '중세'라는 관념을, 이렇게 흑백논리식으로 사용하는 거, 그 자체도 저자분이 말하는 '중세적'인 거 아닐까? (사실 이 부분을 길게 써야하나 말아야 하는 문제로 살짝 고민하다 리뷰가 늦어졌다) 그리고 같은 내용이 중복되어 계속 나오는 점, 좀 지루하다. 덜어내면 2/3 분량이면 충분할 듯 하다. 물론 이러한 친절한 설명 덕분에 책이 '삐딱한' 느낌을 주지 않고 '충분히 맞는' 말씀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성격을 갖게 되기는 한 것 같다.
책날개에 <조금은 삐딱한 세계사>의 아시아편, 아메리카편이 '근간'이라고 나와 있다. 기대된다. 그러나 더 기대되는 것은 이 저자분이 이 비판정신을 갖고 앞으로 어떤 현실 발언을, 어떤 활동을 할까, 하는 점이다. 그게 대중 역사서를 읽고 그 저자에게 걸 수 있는 독자의 진정한 기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