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아들 洪秀全과 太平天國 이산의 책 44
조너선 D. 스펜스 지음, 양휘웅 옮김 / 이산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아, 재미있다, 재미있다! 서울에 눈 내리는1박2일 내내 식음을 전폐하고 단숨에 620여쪽을 읽었다. 역사책인데 문학작품에 폭 빠졌다가 간신히 깨어난듯한 기분도 든다. 스펜서의 방대한 지식과 자료를 바탕으로 한 배경 묘사 능력과 현재 시제로 표현한 문체라니,,,, 엄청난 대화면으로 수준 높은 사극 영화를 한 편 본 것 같기도 하다.

 

이 책은 태평천국 반란군의 지도자, 훙슈취안(洪秀全: 1814-1864)과 그 주변의 주요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다른 중국사들과 달리 태평천국의 발생과 전쟁, 세력 확대와 패망 과정에 대해서는 그리 많은 분량을 할애하지 않는다. 저자는 꼭 필요한 경우만 간략히 서술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저자에게 중요한 것은 홍슈취안과 여러 인물들의 행동 동기인 것 같다. 그들이 성경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과정,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 편집하고 이용하는 과정을 저자는 담담히 서술해준다. 그래서 그냥 '하느님의 아들이고 예수님의 친동생이라 자신을 칭했던 웬 미친 놈', 정도로 희화화될 수 있는 한 인물을, 그 인물을 믿고 따랐던 일단의 추종자 무리들을, 그리고 신앙 자체보다 현실적으로 보다 나은 삶을 약속하는 지도자에게 충성했던 당시 중국 민중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만든다. 아무런 개입이나 가치 판단없이 저자는 당시의 그들에게 그들 나름의 행동 동기와 삶의 의의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홍슈취안은 1814년 중국 남부 광둥 성(廣東 省) 화 현(花 縣) 출생이다. 그는 광둥 성내로 이주해온 하카(客家)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카는 외족의 침입이나 내란, 경기침체 등으로 인해 수세기에 걸쳐 남쪽으로 이주해와 자기들만의 언어(하카어)와 풍속과 전통을 고수(변발, 전족하지 않음)하는 일종의 이주자 소수집단이었다. 하지만 민족적으로는 중국의 다수 민족인 한족(漢族)에 속하기에 사회적으로 차별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훙슈취안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가 되려했다. 그는 과거에 응시하러 광저우(廣州)에 갔다가 중국인 침례교 개종자 량아파(梁阿發)가 쓴 <권세양언(勸世良言)>을  얻지만 관심을 두지는 않는다. 그는 두번째 부시에 낙방하고 큰 병을 앓으며 사경을 헤매다가 환몽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내용은 하늘에 올라 하늘의 아버지와 형을 만나 세상의 요괴를 몰아내는 전쟁을 치룬 후 인류를 구원하는 사명을 부여받는 것. 이후에야 <권세양언>을 읽고 자신의 꿈의 의미를 종교적으로 해석하게 된 그는 더이상 과거에 응시하지않고 자신의 사명 완수를 위해 포교에 나선다. 훙슈취안의 종교조직 배상제회(拜上帝會)에는 근친들과 초기의 헌신적인 종교 신념을 가진 자들 외에  현실에 불만을 가진 재야 지식인들과 하카, 가난한 소작인들, 상인들, 비밀 결사 조직원들 (천지회나 삼합회), 비적, 수적 등등,,, 추종자들이 몰려든다. 배상제회는 만주족 청나라 정부를 요괴집단으로 삼아 전쟁을 벌이고 태평천국을 선포한다. 난징 입성 후 제도를 정비해가며 승승장구 세력을 확대해가더니 지도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다. 왕들과 장군들은 서로 학살한다. 이에 홍슈취안은 초기 시절부터의 추종자들을 잃고 불안에 빠져 족벌체제를 만들고 성서 편집에 몰두한다. 베이징을 향한 북벌도, 주위 세력지 수성도 실패하고 천왕 홍슈취안 사후 추종자들은 궁지에 빠진다. 이들은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초심을 잃고 학살과 약탈을 자행하다 민심을 잃는다. 특히 외국인 조계지인 상하이 시에 대한 공격으로 기독교를 내건 반란군에 대한 서구인들의 호감을 잃은(물론 그 이전에 아전인수격 성서 해석으로 호감 잃음) 외국 군대와 청 정부군의 협공으로 왕국은 패망한다.

 

중국 대륙에서 태평천국을 다룬 책을 읽어보면 이들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토지를 분배했다거나 하는 점들을 들어 태평천국의 사회주의적 의의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저자는 기독교 신앙이 중국에 수용되고 태평천국 지도자들에 의해 성서가 편집되는 과정, 신의 계시를 빙자한 권력다툼 등 지도자들의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부분을 주로 서술한다. 독특하다. 그런데 "21장 폭설" 부분을 읽다보면 정말 당시 중국 민중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천국이고 구원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저자는 은근히 던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직설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이런 과묵함이라니! 이러면 읽는 독자의 수준에 맡겨 버리는 셈인데,,,

 

상황은 태평군을 싸늘하게 외면하지만, 그들의 고통은 이 일대를 떠도는 유민들이나 집 없는 주민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유민과 집 없는 주민들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쟁 때문에 끊임없이 쫓겨 다닌다. 양쯔 강 삼각주의 농민들과 소규모 시진의 주민들은 이전까지 그들의 고향이었던 곳의 주변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이는, 최소한 여덟 종류의 각기 다른 군사와 싸워야 한다. 즉 태평군의 야전 부대, 태평군과 느슨하게 제휴를 맺고 있는 비밀결사나 그 밖의 비정규군, 독립적인 수적 집단 또는 지역에 기반을 둔 비적, 단련과 농촌공동체의 농민방위대 쩡궈판과 그의 형제들 같은 향신층이 모집한 대규모 청군, 장쑤 성 관료들이 거느린 청의 정규군, 청조에 고용된 미국인 프레더릭 워드가 지휘하는 서양인 용병부대, 그리고 호프 제독과 육군 준장 스테이블리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의 정규군과 해군 등이 이들이다.

- 본문 484쪽에서 인용

 

위의 인용 뒤에 참담한 중국 민중들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 이어진다. 결국, 기독교이든 아니든, 천국이든 아니든, 만주족이든 한족이든, 외국군이든 아니든,,, 당시 전란에 휩싸여 희생된 중국 민중들에게 그들은 모두 "요괴"였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요괴"란 용어는 태평천국의 천왕인 홍슈취안과 가까운 지도자들이 자신의 적들에게 쓰는 말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조금 더 개안한 것이 있다면, 이 부분이다. 중세사에서 반란 부분을 읽을 때, 함부로 현대의 입장에서 평가하지 말 것! 아무리 농민혁명적 의의, 초기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고 싶더라도 말이다.

 

태평천국 관련 이외에도 이 책에는 광주 13행이라든가 중국 민간 신앙과 비밀 결사 단체 등등 관련배경 설명이 정말 상세하고 재미있다. 읽으면서 입맛 다시게 만드는 멋진 장면 묘사가 많아 소설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관심있는 분께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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