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에 살기>라는 제목에 ' 재미있는 서양사 상식'이란 부제를 달고 있고 230쪽밖에 안 된다. 그러나 만만한 책이 아니다.
상식 정도가 아니라 꽤 깊이 들어간다. 관련 배경 지식이 없다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서술한 책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책은 20명의 전문 역사가들이 한 꼭지씩 자신의 전문 연구 분야 쪽에서 서술한 글을 모았다. 통사식도 아니고 한 주제로 묶이지도 않는다.
중세 서양사라기에는 범위가 좁다. 대개 12~15세기 사이 프랑스를 다루고 있다. 내용도 왕조나 전쟁,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심성사, 문화사
위주이다. 프랑스 아날학파의 전통을 모른다면 일단 이 점도 낯설게 느껴질 독자가 있을 것 같다.
내용 서술도 기존 대중적 역사서와 다르다. 20인의 역사가들은 체계적으로 자신의 저작을 요약해서 들려주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 연구실에
있다가 잠깐 담배 피러 나와서 제자들에게 툭툭 던지는 투로 서술하고 있다. 어떤 저자는 4쪽 정도 분량이고 어떤 저자는 14쪽 분량이다.
심지어 자크 르 고프는 본인 저술도 아니고 대담 기록이다.
변화가 일어난 것은 특히 13세기부터였다. 이미 1179년에 제3차 라테라노 공의회는 명백히 동성애자들을 겨냥한 탄핵을 공표한 바 있었다.
동성애자들은 십자군 원정으로 촉발된 감정의 여파를 겪는 것으로 여겨졌다. 서구의 많은 문적들은 이처럼 광적인 행태를 이슬람교도들의 탓으로 돌렸던
것이다.
- 42쪽, 장 베르동 지음 <금지된 사랑과 금지된 성> 부분에서 인용
반면,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 주는 일은 도둑질이나 다름없이 여겨졌던 것이, 고리대금업자는 자고 놀면서 부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해 고리대금업자는 시간을 파는 것인데, 시간이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거든요.
- 121쪽, 자크 르 고프 지음 <고리대금업자의 저주받은 삶> 부분에서 인용
자크 르 고프,장 베르동, 미셸 파스트루 등 쟁쟁한 프랑스 역사가들을 한 권에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 나는 즐거웠다만, 다른 독자분들은
어떻게 읽으실지 모르겠다.위에 인용한 부분처럼 부모의 사랑, 동성애, 종교, 고리대금업, 의상, 유행, 향략 등등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
(그래도, 내가 준 별점을 믿지 마시오.)
프랑스 중세문학을 전공한 최애리 선생님 번역이다. 이분이 번역하신 프랑스 중세사 책은 다 재미있다. 실력 있으신 분인데 이 책에 '여성
정자(42쪽)'라는 실수가 있어 덕분에 빵 터졌다. (부가한다. 이 부분은 나의 무식 탓이다. 중세에는 여성도 정자가 있었다고 봤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