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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김없이 남김없이
김태용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서사의 파괴와 언어의 실험이라는 일반 독자가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힘들고 난해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제-1장’으로 시작하여 ‘제0장’을 거쳐 ‘제끝장’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는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가지 않습니다. 정체하기고 하고, 뒤를 돌아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앞으로 조금씩 나아갑니다. 그런데 앞으로 나아가더라도 중구난방, 지그재그, 어디로 튈지를 모릅니다. 이런 예측 불가능한 전개가 새롭기도 하지만, 때로는 당황스럽고, 길을 잃기도 쉽습니다. 도대체 나는 뭘 읽고 있는 것일까? 내가 제대로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잘 따라가는 것일까? 길 잃은 미아가 되기에 딱 좋은 무척 실험적이고, 비형식적이며, 자유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고기의 꿈, 꿈의 고기, 고기의 살, 살의 고기, 고기의 소고, 속의 고기, 고기의 속살, 속살의 고기, 고기의 샅, 샅의 고기, 일어나는, 물러서면서 건드리는 결, 손에 잡힌 것, 만질 수 없는 덩이. 것. 것. 짓. 것짓. 거짓거짓. 파고드는. 다듬거리는. 지글거림. 고기. 맛. 기억. 멈춤. 부스럭거리는. 고기. 눈들. 코들. 귀들. 혀들. 목구멍들. 똥구멍들. 기름진. 흘러내린. 흔들리는. 서걱거리는. 가려운. 삼키는.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따위의. 고기. 끝. 상. 고기의 언어. 언어의 고기. 속. 으로. 흘리는. 짓들. 뱉는. 고기의. 속. 살. (pp.288-289)
이후의 모든 시간은 다리가 잘려 나가리라. 결코 앞으로도 뒤로도 가지 못할 것이다. 다리가 없다면 몸통으로 엉덩이로 기어가는 것이다. 어디로 기어가야 할지. 도무지. 이미 문을 닫았으니. 문이 열리기를. 누군가 밀고 들어오기를. 것은 기다리지 않는다. 초조한 것은 우리다. 것을 선택한. 그것이 우연이라 해도 우리의 선택을, 실패를, 난감함을 기록하기 위하여. 것의 이름으로. (p.359)
사실 이런 언어의, 서사의 실험은 시에서는 조금 익숙하기도 한 것입니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나 연왕모의 《개들의 예감》(〈상처>라는 시는 실제로 종이를 찢었습니다. 인쇄를 마친 후 일일이 수작업으로 누군가가 종이를 찢었겠죠?)에 이런 시도들이 보입니다. 백민석의 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에서도 역시나 그런 시도들이 보이고요. 소설의 형식과 문법들은 누가 정한 것일까요? 그 정해진 규칙을 벗어나면 우리는 ‘이건 소설이 아니다.’라고 규정 지어버리고 쓰레기통에 버려 버리죠. 소설의 형식과 문법에 있어서 더 이상의 발전은 없고, 퇴보한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요? 그런 의미에서 문법의 규칙을 깨고, 언어를 실험하며, 서사를 파괴하는 행위는 발전적인 느낌이 듭니다. 그리고 여러 편의 시를 읽은 듯한(물론 그 과정은 무척 힘듭니다) 만족감은 충분히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재미있습니다. 이런 시도와, 이런 이야기와, 이런 자해는 말이죠.
서사를 파괴하고 언어의 실험적인 작품이라고 해도 기본적인 서사는 존재합니다. ‘제-1장’에서는 약방을 찾는 기억을 잃어버린 여자와 방황하다 미파(미치광이 노파)가 살고 있는 개들의 언덕(아마도 창녀촌인 듯합니다)의 집으로 다시 돌아 온 남자(그래서 주인공 남자는 부모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조차 모릅니다. 그의 과거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가 만나서 섹스를 합니다. '삐꺼덕 삐꺼덕' 매트리스와 의자가 지켜보는 가운데(의자라는 존재는 ‘제끝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인간의 존재보다 사물의 존재가 더 중요한 듯) 열심히 땀을 흘리며 엉덩이를 흔들며 섹스를 합니다. 남자는 지하노숙자에게 강간을 당하고, 여자는 임신을 하면서 이야기는 끝납니다. ‘제0장’에서는 뭐(뭐를 섬으로 데려온 여자)와 뭐(뭐가 데려온 남자 아이. 이 아이가 ‘제-1장’에서의 그 아이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0장’의 이야기가 ‘제-1장’보다 앞선 이야기인 것 같은데, 다시 ‘제-1장’의 이야기와 만나더군요. 그래서 시간 파악은 포기)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매일매일 돌쌓기를 합니다. 의미도 목적도 없습니다. 그리고 시작된 시체 나르기. 주둥이가 돌아가서 이름이 주둥이가 된 개. ‘제1장’에서는 뭐와 뭐(“얘, 뭐야?”의 그 뭐입니다. 이름이 뭐입니다. 이름을 얻고 싶지만 이름이 없습니다)가 살고 있는 섬에 군인들이 찾아옵니다(대령이라 불리는 군인은 ‘제-1장’의 남자의 이야기에 등장합니다. 개들의 언덕에 그 미파를 알고 있으며, 어린 시절 군인놀이를 했던 ‘제-1장’의 남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남자입니다). 대령과 벙어리와 떠버리의 등장. 그들은 주둥이(개)를 먹고 붉은 반점이 생겨, 간지러움에 고통을 받다 죽습니다. 대령은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요. 이야기의 시작이자 끝일 수도 있는 ‘제끝장’에서 우리(뭐라고 규정지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우리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우리도 스스로를 뭐라고 말해야 할지 난감해 합니다. 인간과는 다른 존재)가 등장합니다. 뭐(그 남자 아이)는 이제 ‘것’이 됩니다. 우리는 것의 뇌 속으로 들어가고, 뇌가 기억하는(?) 곳으로 떠납니다. 우리는 ‘제-1장’에서 남자가 마주쳤던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되어 등장합니다. 다시 이야기는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제-1장’의 남자의 시점에서 ‘제끝장’ 우리의 시점으로 시점만 밖일 뿐. 다시 이야기는 원점. 무장한 군인들과 성난 군중이 몰려오면서 끝이 납니다.
어떤 발자국은 스스로 일어나 주인을 찾아갈 것이다.
그 때 시간은 또 다른 목소리의 이름으로 지속될 것이다.
숨김없이 남김없이.
모든 것이 침묵의 반대편으로 소용돌이 칠 것이다. (p.374)
언어의 연금술사. 무의미해 보이는 언어들로 이런 유의미한 문장과 의미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미친 듯이 중얼거리는 등장인물들의 생각들로 인해 서사의 파악이 조금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마음을 비우고 읽으면 이야기 속으로 충분히 빠져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기존의 소설읽기에서 벗어나야만 이 소설이 가진 매력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기존 소설의 문법과 형식에만 얽매인다면 앞으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할거에요. 무엇보다 미스터리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의자, 대령, 뭐(것), ( ), 주둥이, 미파, 뭐(여자), 매트리스 등 인물과 사물에 숨겨진 의미와 이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하는 재미도 꽤 있습니다. 물론 확실히 맞아떨어지지는 않아요. 그냥 내 맘대로 의미를 부여해서 이해하고 느낄 분,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