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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지음, 한상연 옮김 / 부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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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복지, 복지, 하고 외치는 소리들이 갑자기 커졌다. 보편적 복지를 외치는 민주당과 복지포퓰리즘은 망국의 지름길이라 의름장을 놓은 한나라당도 슬그머니 맞춤형 복지를 들고 나오니 말이다.

'경쟁이 즐거운 나라'를 지향하던(물론 독식은 능력이고! 몰아주기는 서비스고!) 이명박 정권 뒤에는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분명 복지일 것이다. 그래서 정신차려야 한다.  이 책이 죽비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거창하지가 않다. 한국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지를 지켜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관심과 정치적 참여와 감시가 필요할테니 말이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하겠다는 건 복지사회로 나아가는 시민의 자세가 아니지 않을까? 남의 집에 불난 게 아니라 지금 우리 발등에 떨어진 불이기 때문이다.

 

과연 잘 사는 게 어떤 것일까?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라고 외치는 저자도 결국 유럽(특히 독일) 사람들의 여유있는(풍족함이 아닌) 삶의 모습에서, 표정에서, 삶의 질에서 복지가 잘 되어 있는 유럽을 체험함으로써 미국이 표방하는 신자유주의는 그야말로 비인간적인 제도임을 역설한다. 과연 높은 1인당 GDP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누구의 것인가? 우리는 알아야 한다고. 저자는 비근한 예로 GDP의 함정에 대해 미국에 사는 바바라하고 독일에 사는 이사벨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생산적 삶을 사는 미국과 소비적 삶을 사는 유럽의 차이는 사실 한끗 차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생명부지를 위해 일하는 것과, 효율적이고 짧은 노동 이외의 시간엔 삶을 향유하며 자신이 하고픈 일을 하고 것 하고는 질적으로 다름을 보여준다.

복지를 겁내는 사람들은 말한다. 국민들이 복지에 너무 기댄 나머지 결국 게으름이 나라를 망하게 할 거라고.....

무슨 소리~! 자유방임주의야말로 얼마나 잔인한 짓인가? 정글 속 법칙을 인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고는 개인의 욕망대로! 능력대로! 자유롭게! 듣기에는 참으로 그럴싸하게 들린다. 하지만 적어도 좋은 사회의 모습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한다. 또한 자유방임주의를 국가회피주의의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독일에서 가장 놀라웠던 점을 꼽는데 그 중에서 어딜가나 사람들의 손에 책 아니면 신문이 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그들은 평생 신문과 책을 보며 사회의 일원으로 정치적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복지는 정부 혼자의 힘만으로 굴러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에 앞서 정부가 해야할 일은 사실 공공재의 폭을 넓혀 사수하는 일일 것이다. 한미간 FTA 문제도 사실 공공재가 외국자본에게 잠식당할 수 있다는 거! 그 잠재적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이명박 정권은  행동만 하는 무뇌 상태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물론 복지사회라고 해서 모든 것에 만족을 주거나 모든 사람들이 만족하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도 불만은 있고 개선되어야 할 점이나 정책적으로 실수도 하고 하지만 저자는 그러한 문제들을 인간적 개입이라고 말한다. 시장의 논리대로 제멋대로 움직이는 거대한 손이 아니라 단합된 시민들의 힘으로 정책을 세우고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연대정신 만이 복지사회를 떠받치는 대들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필요조건이 존재한다.

 

 

첫째 복지제도가 제대로 관리되기 위해선 노동조합은 반드시 필요하고(단체행동을 통해 고용주와 교섭을 한다)  

둘째 정치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이유,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하는 이유, 그리고 습득한 기술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 등의 정치적 교육이 필요하고

셋째 공공재를 통한 사회 안전망이다.

 

 

문제는 이제 우리다! 이제 막 논의하기 시작한 복지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사팔뜨기 처럼 서로 다르다. 어디를 바라보고 있는지 아직 논쟁중이긴 해도 보편복지로 프레임을 짤 것인가 선택적이고 맞춤형 적인 복지로 프레임을 짤 것인가의 문제, 증세를 어떤 방법으로 할 것이며 증세대상과 증세 방안 등 뚜렷하게 나온 건 없는 상태다. 물론 다음 선거때 어느정도 모습을 뚜렷하게 갖추겠지만 복지공략이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그 전에 공부를 잠시 해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실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서는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무조건 주워 삼켜서는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야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난게 잘못이야 하는 한탄을 줄이고 삶에서 얻는 스트레스를 줄이는 일이 되리라 믿어본다.

 

"세상은 악당들에 의해 망쳐지는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악당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에 의해 망쳐진다."

 

                                                                                                            -아인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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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의 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루소의 개 - 18세기 계몽주의 살롱의 은밀한 스캔들
데이비드 에드먼즈 & 존 에이디노 지음, 임현경 옮김 / 난장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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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트위터의 논쟁, sns논쟁의 새로운 버전을 책을 통해 읽게 되는 흥미로움이란!

편지를 통해 대리인의 입을 통해 혹은 공식적인 글을 통해 말싸움을 한, 그야말로 속도면에서는 인내심이 요구될 만큼 오랜 시간을 소요하며 신경전을 펼치고 해명과 변명과 반박을 했을테니 그 공백을 메운 건 무한한 오해의 여지를 갖고 망상과 악의적 상상력을 발휘함으로써 그들은 이성의 한계를 경험했음을 엿볼 수 있다.

 

18세기 계몽주의 시대 때 루소와 흄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무한한 우정을 나눌 것으로 출발했지만 결국 오해와 서로의 벽을 허물지 못한채 그 당시 유럽 궁정과 사교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스캔들로 남겨 놓은 것이다. 웃기는 건 이 책의 표지다. 딱 오해하기 좋을 만큼의 상상력을 제공해주고 있다. 둘은 침대로 보이는 곳에 벌거벗고 앉아 있다. 아르메니안 의상을 즐겨입고 털모자를 썼던 제네바인 루소는 영국신사인 흄의 오른쪽 젖꼭지를 살짝 비틀어 잡고 있고, 흄은 왼 손에 반지로 보이는 링을 조심스럽게 잡고 있다. 그 너머 루소의 개인 쉴탕이 침대를 보고 있는 듯한 이 다의적인 장면! 이건 필시 흄과 루소의 동거, 아니 동성애 스캔들일 거야...... 이 모든 것을 루소의 개는 알고 있다. 지난 여름에, 아니 지난 밤에 너희들이 한 짓을 다 알고 있다. 라고 생각할 만큼의 암시적이고 암묵적인 그림이다.

그런데 책을 다 읽고 난뒤 책 표지에 낚인 것을 알았다. 이렇게 깜쪽같이 무식하고 저급한 독자의 상상력에 허를 찌르다니!

그래서 반성했다. 무식이 때론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이거야 말로 무고죄가 아니고 무엇이던가?,...ㅋㅋ

 

이 책에서 저자 두 사람은 흄과 루소의 만남에서 헤어지까지의 과정을 편지와 그들이 쓴 책과 논문, 일기, 회고록을 바탕으로 그들의 처절했던 싸움을 따라간다. 세계사에 길이남은 두 사람은 사람 냄새(?)를 풍기며 논란의 중심에 서서 서로에게 펀치를 날리며 저주와 음모와 악담을 퍼붓고 있음을 보여준다. 아, 이 사람들 그렇게 안봤는데...역시 인간의 역사는 지리멸렬하고 질펀하구나.. 하지만  감성적이고 미치광이라는 평을 얻었던 루소와 이성적이고 제정신이었던 흄의 만남은 처음에는 순조로웠다. <에밀>의 후반부에 수록된 <사부아 보좌신부의 신앙고백>이 프랑스와 스위스의 종교계로부터 규탄을 받아 망명자 신세였던 루소를 거둔 건 흄이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가는 배를 함께 탔다. 루소의 개 쉴탕과 가정부인 르바쇠르와 함께.

물론 그들의 만남엔 아니 동거엔 일종의 모략이 있었다. 흄에게 있어서는 루소를 거절할 수 없는 '사람좋은 데이비드'의 명성을 이어가고자 함이었고 흄을 열렬히 숭배했던 살롱 마담인 부플레 백작부인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음이다. 처음부터 흄의 태도는 루소에 대해 경멸로 얼룩져 있었다고 보는 견해가 일정부분 설득력을 얻고 있는 건 자신보다 유명한 루소를 떠안게 된 흄의 자존심에 명백하게 상처를 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스캔들에 한 몫을 한 것은 두 사람의 성격의 문제이다. 두 사람을 극명하게 구별해주던 지적 특성의 괴리는 두 사람의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멀어지게 만들게 된다. 루소는 마음속으로 확실한 결론을 내린 뒤 구체적인 내용을 채워넣은 반면 흄은 사실에서 시작해 그 사실을 토대로 사건을 구성했다고 한다. 루소는 확실한 증거를 찾기 전부터 자신에 대한 치명적이고 광범위한 음모를 확신했고 흄은 증거부터 수집했다고 한다. 직관적 상상과 자신을 향한 음모론을 주장했던 루소와는 달리 흄은 잔인하리만치 시종일관하는 태도였다는 것이다. 루소에게 있어 흄의 개인적인 판단은 오만하고도 경멸적이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책의 백미는 제일 마지막 장이다. 두 사람이 어떻게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으며 그 배경에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를 총정리 해주는 장이기 때문이다.이름하여 "진실은 드러날 것이다~"

루소를 마음깊이 순수하게 사랑해준 건 오직 쉴탕뿐이었다는 가슴아픈 전설이 살아 있는 이 책의 매력은 결국 이성은 감정의 노예일 뿐이라는 사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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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13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계지성사에 이름을 남긴 두 사람의 알고 보면 진흙탕 싸움? 재미있겠네요. 음 뭔가 <사랑과 전쟁>에다가 일요일 아침에 하는 <진실, 혹은 거짓>을 합친 것 같은 필이네요. 음..막상 써놓고 보니 왠지 무식해보이는 댓글이네요.^^;

꽃도둑 2011-12-14 10:26   좋아요 0 | URL
음하하 저도 무식해보이는 리뷰 썼는데요 뭘,,,
모든 사람은 무식하다!!(상대적이잖아요,,,ㅋㅋ)

맥거핀 님이 지적한 대로 진흙탕 싸움은 맞는 거 같아요. 언쟁이라는 게 원래 그렇잖아요.
피를 말리는 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지성과 이성으로만 해결할 수 없었어요,
감정이라는 놈이 두 사람의 머리에 앉아 좌지우지했거든요.
사랑과 전쟁 맞네요,,,맥거핀님도 싸움구경하러 가세요..^^

마녀고양이 2011-12-14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도둑님의 페이퍼는 길지는 않지만, 예리하단 말이예요.
사실 요즘 말이죠, 사이버 세상의 다툼, 오프라인 세상의 다툼에 이어
읽는 책마다 서로 다투어대는 꼴을 읽어내려니, 맥이 탁 풀려버려요... 그게 SNS든, 실제 상황이든
인간은 별로 변함없이, 내도록 다투고 자기 의견 주장하고 끝나지요.
이성이라, 결국 감정에 휘둘림에 대한 위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뇌의 변연계가 가장 강력한거 아닐까 하는.

꽃도둑 2011-12-14 17:27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장 강력하죠. 아니 원더플 하고 파워플 하죠..ㅎㅎ
인간은 본디 이기적인데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거죠..사실 보편적 가치라는 건 사회계약인거잖아요.
안그러면 다들 저 잘났다고 떠들다 목청터져 죽을지도 모를 일이죠..ㅋㅋ
누구든 가십거리에 휘말리면 초연해 질수도 없거니와 오해를 받으면 풀려고 애를 쓰는데
도구만 다를 뿐이지 하는 행태는 같지 않을까 싶어요.

더불어숲 2011-12-19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표지에 대한 분석.. 예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낚인 것이라기 보다는... 제대로 읽어내셨다고 생각하구요, 참 인상깊습니다. 책을 대하는 자세!!!

꽃도둑 2011-12-21 17: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숲님의 댓글이 더 인상적입니다.
다음 도서가 기다려집니다. 어디를 찔러볼까를 고심하게 만드는,,,,ㅋㅋ
솔직히 읽는데는 한 권당 일주일이 넘게 걸리는데 리뷰 쓰는데는
시간에 쫓기어 후다닥 일필휘지(?)로 쓰니...크크 그러니 항상 아쉬움이 남네요.
숲님은 안그러세요?..
숲님 말씀대로 제가 책을 대하는 자세는 극진합니다.
품에 안고 일주일을 그러고 끙끙대고 있으니 말입니다.ㅎㅎㅎ
책을 빨리 제대로 읽어내는 것도, 아주 근사하게 리뷰를 쓰는 것도 리뷰어라면 누구나 꿈꾸게 되지만
내가 가진 목소리 만큼은 제대로 낼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주 분명한 것 같아서 스스로 기특해 하고 있네요..^^




더불어숲 2012-01-10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는.. 점점 더 궁금증을 불러 일으키는...유일한 리뷰어입니다.
그렇군요^^* 책을 대하는 극진한 마음.. 다시 맘을 다잡으며.

불완전한 인간은... 예술 세계에서 늘 만나는 저의 이란성 쌍둥이들입니다.
세상에 널린 텍스트를 읽어가며, 이번 생(生) 살만하다고 행복해합니다.
요즘..라캉에 빠져 있어서 그런지 불완전한 트라우마의 루소가 잘 읽혔던 것도 같습니다.

또한 루소와의 마주침의 연속 탓이기도 하겠지요? 교육학에서, 정치학으로, 계속되는 인연탓입니다.

새해, 웃을 일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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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음, 이민아 옮김 / 궁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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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듯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파스칼[팡세]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 것일까? 그 본질을 파헤치고자 125가지 단상을 적고 있다. 대중운동의 생성과 체계를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과 선전과 구호를 도구로 삼아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며 그들을 조종하고 행동하게 하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보여준다. 일단 대중운동이 인간의 자유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당히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다.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화 된 직후에 나온 책이라 그 당시로는 시기적절하고도 매우 중요한 책이었으리라 보아진다. 조직되지도 않고 절망과 증오로 가득찬 대중, 특히 어떤 숭고한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광신적 신념을 갖춘 맹신자들과  대중운동이 갖는 매력에 이끌린 잠재적 전향자들과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요구되며 행해졌는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어땠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정말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에릭 호퍼도 인간에 대한 불가해성과 환멸로 이 단상들을 적어나갔으리라 짐작된다.

모든 대중운동이 갖추어야 할 강령 중에 하나가 희망과 미래를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면  나치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 혁명 같은 대중운동은 성공한 셈인 것일까?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덧대어 볼 만 하다.  


' 대중을 통솔하고 그 지지에 힘입어 대중을 움직이는 운동에는 항상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다. 전체주의 정권은 이들에게 개인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거대한 운동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희생한다. 대중은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움직인다.'

  
 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충성심과 자기희생을 기꺼이 이끌어내고 현재를 거부하고 장미및 미래만을 바라보게 하는 힘은  조금의 의문도 의심도 없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 맹목적 신념과 모방, 자부심, 자신감, 목적의식, 숭고한 의무감, 희망과 보상 등 효과적인 대중운동은 사람들 마음 속에 죄의식을 키운다고 하였다. 대중운동은 추종자들에게 죄를 짓고 뉘우치는 범죄자의 심리와 정신 구조를 심어주는 기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 하다.

그렇다면 모든 대중운동의 다른 이름으로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는 것'으로 불리우는 것은 곤란하다.  에릭 호퍼가 바라보던 시대하고 지금 현재의 대중운동과는 분명 구별되거나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모든 대중운동 속에서 개별성과 자유를 보장받고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을 되새겨 볼 때, 에릭 호퍼가 바라보던 시대를 반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에는 불안한 사람들의 출현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양성의 존중과 소통과 열려 있는 공간 속에 놓여 있을 때에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연대와 인권과 개성을 존중 받을 곳에서만 가장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과 무자비하고 집요한 박해는 광적인 신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문을 품지 않으며 망설이지 않는 것 또한 맹신자의 악습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워둬야 할 것이다. 

'자기에 대한 불만과 너무 쉽게 믿는 경향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자신의 참모습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치에 맞는 것과 분명한 것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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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16 11: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1-16 17: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1-11-16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 이 책을 보지 못했습니다만, 저자의 이력으로 볼 때에 그가 당시 대중들을 바라보던 입장이나 관점은 현재의 우리들, 그리고 아마도 글 좀 쓴다는 지식인들의 입장과 많이 달랐으리라 생각됩니다. 그가 우리들보다 대중을 조금 더 정확히 보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역설적으로 보면 그는 아마도 대중운동의 힘과 그것이 가지고 올 수 있는 무한한 성취와 긍정적 가능성 또한 아마 충분히 믿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어쩌면 이 '맹신자들'로 조직되는 대중운동의 출현을 상당히 두려워했을지도 모르겠구요.

내일 서점에 가서 좀 읽어봐야겠군요!

꽃도둑 2011-11-17 15:1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현상만 보고 파악했던 것보다 그러한 현상이
생기기 전의 동기파악부터 했다고 보여집니다. 대단히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어요.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로요...대중운동을 마치 군대와 같다고 표현한 것에서만 봐도 알 수 있거든요.

대중은 항상 상황 속에서 움직이잖아요... 요즘의 대중운동과 에릭 호퍼가 살던 시대와는 분명 다르긴 한데...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호퍼의 단상들은 시대밖으로 밀어낼 수는 없을 거 같아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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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밤,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아 케이블 체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남자의 자격>을 보게 되었다. 시짓기가 과제였다. 김용택 시인이 시평을 맡았고, 멤버들은  일주일이라는 주어진 시간 안에 시를 써서 그것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그걸 보면서 시는 모든 사람의 가슴 안에서 숨을 쉬고 있구나... 어떤 마주침, 자신의 삶에서 안팎을 섬광과도 같이 순간에 꿰뚫어 마치 상처와 같은, 어떤 흔적과도 같은, 것을 남기는 모든 것들과의 조우가 바로 시가 아닐까 싶었다. 아버지의 틀니 부딪히는 소리가, 첫사랑의 아련한 그림자가, 어머니의 주름살이, 아들에 대한 오랜 열망이 시가 되어 읽히는 순간 가슴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는 바로 소통이 아닐까 싶다, 시와의 소통, 시 속에 숨 쉬고 있는 무수한 타자와의 포옹으로 인해 내 아버지가 되고 나의 첫사랑이 되고 내어머니의 주름살이 시로 확장됨을 보았다.

우연치고는 타이밍이 정말 절묘했다. 강신주의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 읽기를 막 끝내고 본 프로그램이어서 그런지 전경과 배경을 모두를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보았다고나 할까?  아니 여백과 행간을 읽어내려 했던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일 것이다.

철학적 시읽기의 즐거움에서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으로 이행하면서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아주 중요한 말을 하고 있다.  


시는 미래에 읽힐 숙명을 타고난 글입니다. 다른 글들이 지금 읽고 이해되는 경향이 강하다면, 시는 우리 내면을 엄습하여 그 이미지를 각인시킵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처처럼 남은 시는 아주 끈덕지게 기다립니다. 그 이미지를 다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삶을 살아내기를 말입니다.  


마침내 저자는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채워야만 하는 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괴로움으로 다가서는 시들에서 저자는  무엇을 사유했을까, 시는 항상 빨리 찾아들고 나중에 읽힌다고 한 것은 읽혀지는 그 순간 이미 빈그릇들은 채워진 뒤고  어떤 형상만 남아 있을 것이다, 저자는 시(詩)가 읽혀지기까지의 여정속으로 떠나면서 끝내 어느 한 지점에서 삶을 관찰하고 성찰하는 자세를 갖게 된 것은 아닌지 생각되어진다. 시가 비로소 철학과의 조우를 통해서 말이다. 여기서 요구되어지는 것은 집중과 몰입, 그리고 감수성이다! 무슨 글을 읽든 마찬가지일테지만 [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은 자신의 삶과 세상을 읽어내려는 수고로움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어두움속에서 허우적대다 말일이다. 히스테리와 강박증 사이에서 자본주의와 세속적인 종교 사이에서, 차별과 차이 사이에서,진짜와 가짜 사이에서, 뜨거움과 차가움 사이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사이에서, 오감과 육감 사이에서, 명사와 술어 사이에서, 자아와 타자 사이에서, 안과 밖의 사이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분명 괴로움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시(詩)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활자로 된 단문의 글이기 전에 詩는 이미 각인이고 흔적이고 이미지고, 사건이고 현상이라 보아진다. 하지만 시가 원래 가졌던 개별성과 고유성은 무수한 타자를 만나면서 새로운 모습을 갖게 됨을 본다, 그래서 강신주와 마주친 詩는 철학이라는 외피에 싸여 좀 더 진중해지고 깊어진 모습을 갖는다.  

어느 시인은 시가 내게로 왔다고 했지만  어느날 마주친 시에게 물어봐야 할 것도 있음을 강신주는 알려준다. 그것도 철학 안에서 진지하고도 다정한 목소리로

"내 안에 너 있다.  너 안에 나 있니?"       

시의 확장은 이 두 가지가 충족될 때야 비로소 모습을 가진다. 시의 세계와 무엇이 만나든 간에 관계짓고, 의미 확장을 통해 완성되어진다고 보아진다. 그런 측면에서 강신주는 시와 철학을 만나게 한 중매쟁이 역할을 아주 잘 해낸 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것을, 엎치락 뒤치락 거리다 서로를 알아보는 경지를 보여주기도 하고, 둘(시와 철학) 사이에 오해가 없도록 서로를 이해시키고 친절하게 보여주고 설명하기까지 한다. 난 그래서 강신주가 좋다. 변죽만 울리다 마는 사람은 신뢰가 가지 않는다. 중심을 향해 끝까지 손을 잡고 함께 가려함이 눈에 보여서 좋다.   

 

가을이다. 시를 받아들이기에 좋은 계절이다.  어쩌면 저벅저벅 가슴 안으로 절로 들어오게 될런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강신주가 만난 시들은 차가운 머리의 도움이 조금 필요할 듯 싶다. 느끼기보다는 생각하기를, 성찰하고 조망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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