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1996년의 기억 조각보
중에는 <새의 선물>이 있다. 불문학을 동경하던 어린 취향 때문인지 프랑스 작가의 소설만 열심히 찾아 읽던 시절, '책 사랑'으로
말하자면 머리 조아리고 모셔야 할 고수 친구가 소개해주었다. <새의 선물>은 그 당시 막 유행하던(?) 알랭 드 보통이나 미셀
트루니에의 소설과 완전 다른 매력을 뿜고 있었다. 작정하고 두 달만에 써내린 소설이 이 정도? 와우! 이후로도 은희경의 소설을 종종
찾아 읽었지만 <새의 선물>이 워낙 압도적이라, 그 기억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주말, 본격적 두뇌회전을 위한 책을
읽기엔 한가해지고 싶어서 일부러 낭만이 뚝뚝 떨어지는 긴 제목의 소설을 골랐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작가 이름에 은희경이란 세글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자발적으로 선택해서 읽게 될 책 제목은 아니었다. 뭔가 감상에 질질 늘어질 것
같은 분위기랄까?
*
새벽 1시까지 한 번에 다 읽었다.
재미있었다. 은희경의 사람보는, 세상 보는 눈이 보였다. 감히 추정하기엔 작가에게 미안해지는데, 은희경은 마음이 따뜻해서 국밥 막 퍼주는
스타일의 아줌마가 아니다. 차갑다. 사람을 대상으로서 관찰하지, 깊이 연민을 느끼거나 사랑하지는 않는다. 이지적이다. 냉정한 관찰자.
*
굳이 그런 성향을 감추려고 하지도
않는다. 소설의 내용적인 측면보다도, 은희경이 세상을 관찰하고 사람을 대상화하는 방식에 끌렸다. 예를 들어, 한국 노인들의 성별에 따른 언어용법
차이을 묘사하고 비아냥 거리는 저 문장을 보아라. 삼할은 공감하면서도 그 기저의 냉소적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새의 선물>과
연장선에서..... 한국, 스페인, 아이슬란드, 공간을 옮겨다니면서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풀어낼 수 있음은 은희경이 글쓰기 작업 뿐 아니라 "사는
데" 정말 능동적이고 정열적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녀가 어마한 양의 글을 써내려간다는 걸, 새벽 1시에 검색으로 다시 확인하고는 질투와 부러움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책을 덮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