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에 관하여
정보라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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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에 관하여>는 <저주토끼>로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오르며 국내를 넘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작가 정보라의 신작이다. 이 책은 붉은 칼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장편소설로, 정보라 작가 특유의 치밀하고 치열한 설정과 서늘하게 파고드는 문장, 어둡게 번뜩이는 사유가 더욱 돋보인다. 이야기는 고통을 무력화시킨 진통제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와, 고통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주장하는 종교단체의 갈등에서부터 시작된다. 정보라 작가는 소설이라는 매혹적인 가능성의 도구를 통해, '고통'이라는 감각의 뿌리까지 낱낱이 해부하며, 독자들에게 철학적 통찰과 내면을 집요하게 찌리는 이야기의 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중독성이 없고 부작용이 없는 완벽한 진통제의 등장. NSTRA-14가 보편적인 진통제가 되자, 고통에 대한 패러다임이 바뀐다. 그러나 고통이 사라지자, 오히려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신흥 종교 '교단'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고 주장하며, 제약회사를 테러한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테러 사건 후, 잠잠해진 교단에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온몸이 고문 흔적으로 가득하고, 체내에서 다량의 약물이 검출된 사건의 피해자는 모두 교단의 지도자들이다. 형사들은 진범을 밝히기 위해 무기징역으로 수감되어 있던 테러 사건의 범인 '태'를 세상으로 불러들인다.

'태'의 기억은 교단에서 시작된다. '태'는 형인 '한'과 교단의 시설에서 자랐다. 고통을 섬기며, 고통의 무게를 모든 사람들에게 지우려 했던 '태'의 신념은 무고한 피해자를 낳았을 뿐이다. 제약회사를 경영한 '경'의 부모도 이때 목숨을 잃었다. '태'의 도움으로 형사들은 교단에서 떨어져 나와 은거 중인 '한'을 붙잡지만, 어떤 진실도 밝히지 못한 채로 풀어준다. 호수 근처, 제약회사가 철수하며 사람이 모두 떠나 폐촌이 된 황무지를 조사하던 형사들은 그곳에서 불법 약물 제조 시설과, 유치장에서 풀려난 뒤 숨어 있던 '한'을 발견한다. '한'은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태'도 형은 범인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하지만 무수한 증거가 '한'을 범인이라고 가리킨다. 한은 다시 유치장에 갇힌다.

토네이도가 들이닥친다며 기후 경보가 울리던 때, 또다시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유치장에 갇혀 있던 '한'이 시체로 발견된 것이다. CCTV는 고작 3분 동안 작동을 멈췄고, 그 3분을 전후로 유치장에 드나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경찰서에 설치된 CCTV를 모조리 뒤지며 조사해 보아도 모든 사람의 알리바이는 완벽하다. 단 한 명, '태'의 담당 정신과 의사 '엽'을 빼고. 형사들은 CCTV를 돌려 거기 찍힌 의사를 찾으려 하지만, 그 순간 불어닥친 토네이도에 경찰서 건물이 정전된다. 한참이 지나 토네이도가 물러가고, 다시 불이 들어왔을 때, 의사는 어디에도 없다. 유치장에 혼자 남겨진 '태'는 그를 떠올린다. 테러에 관한 질문, 교단을 향한 냉철한 태도, 고통에 관한 특별한 통찰력. '태'와 그를 둘러싼 '고통'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했던 '엽'의 정체와 교단과 제약회사의 싸움에서 그는 얻고자 했던 것이 무엇일까.

<고통에 관하여>는 인간이 고통을 느낀다는 것이 어떤 경험인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살아 있는 내내 삶의 일부로서 고통을 느끼고 삶의 끝으로 갈수록 고통이 심해지고 결국 고통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이 어떠한 존재 방식인지, 무엇을 바라고 어떤 이유에서 그 고통을 견디는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건네며 고통에 대한 삶의 통찰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여 삶을 견딥니다. 고통에 초월적인 의미는 없으며 고통은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무의미한 고통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생존의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서 인간은 의미와 구원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의사가 신증 종교 고단으로부터 어렸을 때부터 절대적이고 큰 믿음을 갖도록 길어진 태에게 건네는 이야기가 삶의 의미와 믿음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글로 흥미롭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요. 뭘 크게 믿기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 닥치는 상황들에 자신이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내리고 의미는 그 뒤에 찾는 거죠. 절대적인 믿음 같은 게 없어도 살아갈 수 있어요."

이 책에서 긴 투병생활을 하면서 고통을 경험한 욱이 삶의 의미를 직접 찾기 위한 과정에서 신흥종교 교단에서 활동하며 파국으로 나아가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이 책에서 통증이라는 고통을 생생하게 표현하며 자신의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들로 인한 외로움을 경험하는 욱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어 인상적이다.

"가족이나 친구들은 긴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욱을 떠났다. 욱이 겪은 것과 완전히 같은 방식으로 욱의 투병과 회복을 경험할 수 없었으므로 욱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자신의 신체를, 신체의 감각과 기능을 타인과 공유할 수 없다. 그 어떤 환희나 쾌락도 오로지 감각하는 사람 자신만의 것이며 고통과 괴로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육체가 경험하는 감각과 사고를 언어 혹은 다른 방식으로 타인에게 전달할 수는 있으니 인간은 오랫동안 그렇게 전달하고 소통하고 공유하려 애썼으나 그 어떤 표현의 방식도 결국은 불충분했다. 완전한 의사소통의 방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신체 안에 고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욱을 매료시킨 것은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한 뒤에 혹은 고통을 경험하고 극복해야만 초월을 얻을 수 있다는 교단의 주장이었다. 한의 설명에 따르면 욱의 삶과 경험이야말로 초월에 가장 가까운 형태였다. 고통에 의미는 없으며 고통을 겪고 나면 사람은 초월이나 경험이나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몸과 마음이 지쳐 쇠약해질 뿐이라는 욱의 절망을 한은 의미와 목적으로 바꾸어주었다. 욱은 한의 말을 믿었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잃었다가 되찾는 과정을, 자신이 경험한 방식 그대로 혹은 그에 가장 가까운 형태로, 타인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오로지 고통만을 통하여, 절망만을 통하여."

여기에 더해 이 책에서 고통을 무력화시킨 진통제 'NSTRA-14'를 만든 제약회사를 만든 부모로부터 실험 대상이 되며 자라온 '경'이 고통에 관한 깨달음을 얻는 이야기를 통해 깊은 공감을 느낀다. 경은 부모가 이룩한 세계로, 경을 가루었던 과거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음을 선택함으로서 점차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경은 사람의 삶은 모두 다르고 고통의 경험도, 고통에 대한 대응도 각각 다르며, 자신의 고통은 자신만의 것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경은 고통의 탐색에 매몰되면 결국 과거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돌아보아야 했고, 그러다 보면 어떻게든 벗어나려 했던 그 고통으로 돌아가 결국 다시 그 속에서 살아가야 했다고 말한다. 경은 태가 상처 입은 방식은 자신과 유사했으나 같지 않았고, 회복의 과정과 고통의 기억을 이해하는 자신의 방식과 달랐다고 이야기한다. 고통과 공포가 지배하던 과거를 지나 사랑하는 현과 함께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방향으로 삶을 나아가고자 선택한 경의 모습이 독자에게 위안을 선사한다.

"흉터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흉터는 상처와 고통과 회복의 과정과 회복에 동반하는 망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복 뒤에 남는 감정과 기억을 대표했다. 경이 탐색했던 것, 탐색해서 되찾으려 한 것은 그 기억이었다. 신체에 새겨진 고통의 기억을 간직한 채, 상처 입은 흉터투성이 존재를 떠안고 죽는 순간까지 망가진 채로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었다. 그러한 삶이 무엇인지, 어떤 것인지, 경험을 통해 이해하는 존재를 그녀는 찾고 있었다. 그것은 사랑도 성욕도 아니었다. 사랑이나 성욕보다 더 깊은 어떤 것이었다. 망가졌더라도 살아갈 수 있고 살아갈 자격이 있다는 사실. 망가진 채 살아가도 괜찮다는 승인을, 같은 경험을 가진 다른 존재를 통해 재확인하고자 하는 생의 가장 깊은 추동이었다."

"고통스럽지 않은 기억으로 삶을 채우고 흉터가 아닌 증거들로 남은 생을 함께 축복하고 기념하기를 원했다.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지 경은 알지 못했고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자신도 없었다. 그러나 시도는 해봐야만 했다. 현이 자신의 눈앞에 있었고 경은 현을 사랑했으므로 최대한 노력을 해봐야 했다."

끝으로 이 책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정보라 작가의 '작가의 말'의 깊인 여운을 선사한다. 정보라 작가는 의미 없는 고통은 거부해야 하며, 힘들고 괴로운 일이 모두 다 가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충분히 잘 먹고 충분히 잘 쉬고 내 몸을 잘 돌보았을 때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그러면 괴로운 상황을 탈출할 길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탈출할 길이 있어야 한다. 삶의 선택지가 늘어나야 한다. 다른 선택지를 고를 수 있어야 하고, 그렇게 탈출해서 잘 살 수 잇어야 한다. 이런 얘기들을 나는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받으면서 좀 더 구제척으로 배웠다. 그래서 나는 계속 떠들고 글 쓰고 집회하고 행진하고 요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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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혁명 - 인간적인 기술을 위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성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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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사회에 대한 비판과 인류에 대한 희망의 통찰을 담은 책으로 인상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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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혁명 - 인간적인 기술을 위하여
에리히 프롬 지음, 김성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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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1968년 집필한 저서 <희망의 혁명>에서 인류가 두 가지 대조적인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고 진단한다. 두 갈래의 길 중 하나는 완전히 기계화되고 자동화된 사회로 인간 개인은 그 시스템의 작은 톱니바퀴 같은 존재로 전락하는 상황이다. 다른 하나는 기술이 전적으로 인간의 복지를 향상하는 데 복무할 뿐인, 인본주의와 희망의 르네상스를 이룩한 상황이다. 에히리 프롬이 지지하고 꿈꾸는 인류의 미래는 물론 후자다. 그러나 현실의 흐름은 전자 쪽으로 기우는 듯하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기술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현상을 경고하면서 자신의 해법을 제시한다.

책 <희망의 혁명>은 50여 년의 시간적 간극에도 낡았다거나 시대적 유효성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거의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놀랍다. 에리히 프롬이 이 책에서 진단하고 우려했던 점차 기계화되는 사회, 인간의 두뇌보다 더 정밀하고 더 빠르게 작동하는 컴퓨터가 인간의 사고를 대체하면서 인간이 기계에 의존하고 부차적 존재로 전락하는 상황은 그 범위가 넓어지고 정도가 심해졌을 뿐 에리히 프롬이 예견한 그대로다. 몇몇 거대 기업과 기관이 전체 사회를 좌지우지할 것이라는 예측 또한 구체적인 상황과 맥락은 다를지라도 구글, 아마존, 페이스북, 애플 등 초거대 IT 기업이 전 세계 경제와 인류의 일상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을 연상시킨다.

<사랑의 기술>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혁명>에서 기술사회와 기계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탁월하게 분석하며 우리가 직면한 상황을 뚜렷이 인식하게 한다. 나아가 '사물의 소유'와 '죽음'에서 '인간 존재'와 '삶에 대한 사랑'으로 우선순위를 바꿀 용기와 상상력이 있다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있다고 역설한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인류의 미래에 관한 논의가 어느 때보다 활발한 지금, 세계는 이미 첨예한 신냉전 시대로 들어섰다. 20세기 대표 지성 에리히 프롬의 영민한 시각과 통찰은 우리가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는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이 책은 '1장 교차로, 2장 희망, 3장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고, 어디를 향하고 있나?, 4장 인간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5장 기술사회의 인간화를 위한 단계, 6장 우리가 할 수 있을까?'라는 6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에리히 프롬은 지금 가장 불길한 것은 우리가 시스템의 통제권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컴퓨터가 계산을 통해 우리를 대신해서 결정을 내리면 우리는 그저 그 결정을 실행에 옮길 뿐이다. 인간으로서 우리의 목적은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밖에 없다.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무엇도 하려 하지 않고, 하지 않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과학적 진리를 찾으려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을 우연히 발견하고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술과 물질 소비만 일반적으로 강조하는 과정에서 인간은 자신 및 생명과의 교감을 상실했다는 에리히 프롬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에리히 프롬은 종교적 신념과 그와 얽힌 인본주의적 가치를 잃어버린 인간은 기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에만 집중해서 깊은 정서적 경험을 하고, 거기에 따라오는 기쁨과 슬픔을 느낄 능력을 상실해버렸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가 워낙 막강해지다 보니 기계가 자체적으로 자신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됐고, 이제는 기계가 인간의 생각마저 결정하게 됐다고 이야기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자연을 두고 승리의 정점에 서 있던 인간이 어쩌다 자기 창조물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심각한 위험에 처하게 됐을까?"

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대상이 어떤 사물이 아니라 더 충만하고 활력이 넘치는 삶일 때, 끝없는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해방일 때 진정한 희망이 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에리히 프롬은 희이 약한 사람은 안락이나 폭력에 안주하지만 희망이 강한 사람은 새로운 생명의 모든 신호를 눈으로 보아내고 소중히 여기며, 매 순간 태어나려 하는 것의 탄생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희망이란 존재의 상태라고 말한다. 준비가 되어 있는 내면의 상태, 열정적이지만 아직 쓰이지 않은 능동성이다. 또한 에리히 프롬은 희망은 생명과 성장에 수반되는 정신 상태라고 이야기한다. 햇빛을 받지 못하는 나무가 햇빛이 오는 방향으로 몸을 구부린다고 해서 그 나무가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희망'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희망에는 그 나무에는 없는 느낌과 인식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리히 프롬은 그 나무가 햇빛을 희망하고, 태양을 향해 몸을 구부림으로써 자신의 희망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해도 틀린 얘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불굴의 용기는 희망과 신념을 공허한 낙관론이나 비합리적인 신념으로 바꾸어 파괴함으로써 위태롭게 만들려는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을 말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불굴의 용기는 세상이 당신에게 '예'라는 대답을 듣고 싶어할 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에리히 프롬은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는 상태를 향해 나아가려 노력하는 사람이라면 겁 없음을 향해 새로운 발걸음을 내니딜 때마다 강해지는 느낌과 기쁨이 확실하게 깨어난다는 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생명의 본바탕인 희망과 신념은 그 본질상 개인적, 사회적으로 현재의 상태를 초월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모든 생명의 특징 중 하나이기 때문에 생명은 항상 변화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어느 한순간도 동일한 상태로 남아 있지 않는다. 정체된 생명은 죽는 경향이 있다. 그 정체가 마무리되면 죽음이 일어난 것이다. 그럼 항상 움직이는 속성이 있는 생명은 현재의 상태를 깨고 나오거나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는 더 강해지거나 더 약해지고, 더 현명해지거나 어리석어지고, 더 용감해지거나 겁이 많아 진다. 모든 순간은 더 좋아지든 나빠지든 결정의 순간이다. 우리는 자신의 태만, 탐욕, 마음에 먹이를 주거가 굶긴다. 먹이를 주면 줄수록 더 강해지고, 굶기면 굶길수록 더욱 약해진다."

에리히 프롬은 절망의 신호는 어디에서나 보인다고 말한다. 지겸움이 가득한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필사적으로 사람들과 '접촉하려' 하는데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접촉이 결핍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에리히 프롬은 도시의 물과 공기는 날이 갈수록 독성이 강해지고, 가난한 국가에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기근이 닥치고 있는데도 이를 극복하기 위한 진지한 계획을 내놓지 못하는 모습을 봐도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희망에 관해 우리가 무슨 말을 떠들고, 무슨 생각을 하든, 우리가 생명을 지키기 위한 행동에 나서거나, 계획을 수립하지 못하는 있다는 것은 우리의 절망을 드러내 보여주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조직화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인간을 기계의 리듬과 요구에 종속된, 기계의 부속물로 격하시킨다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을 오직 더 많은 것을 갖고, 더 많은 것을 사용하는 것이 목표인 호모 컨슈멘스로 바꾸어놓는다. 에리히 프롬은 이런 사회는 쓸모없는 것들을 많이 생산해내고, 또 쓸모없는 인간도 그만큼 많이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생산 기계의 톱니바퀴에 불과한 인간은 더는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나의 대상으로 변질된다. 그는 관심도 없는 일을, 관심도 없는 사람과 함께하며 시간을 보내고, 자신은 관심도 없는 것들을 생산해낸다. 그리고 생산하지 않는 동안에는 소비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아무런 노력도 들이지 않고, 아무런 내부의 활력도 없이 담배, 술, 영화, 텔레비전, 스포츠, 강의 등 지겨움 방지 산업이 강요하는 것은 무엇이든 입을 열고 받아먹는 존재가 된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살아 있지 않은 것에 끌리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구조보다는 '법과 질서'를 선호하고, 자발적 방법보다는 관료주의적 방법을, 생명체보다는 가전제품을, 독창성보다는 반복을, 활기찬 것보다는 깔끔함을, 지출보다는 비축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생명의 통제 불가능한 자발성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명을 통제하기를 운한다. 이들은 자신을 생명에 노출해서 주변의 세상과 합쳐지기보다는 생명을 죽이려 든다. 이들은 생명에 뿌리를 두지 않았기 때문에 종종 죽음과 도박을 벌인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반자동으로 조절해주는 일련의 본능으로 무장하지 못해서 선택에 직면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에서는 만약 잘못된 선택을 할 경우 자신의 목숨에도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에리히 프롬은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의심이 그 사람을 괴롭히고 그 의심은 고통스러운 긴장을 유발해서 심지어는 신속한 결정을 내릴 능력을 심각하게 저해할 수도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 결과 인간은 확실성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낀다. 그는 자기가 결정은 내리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옳았음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고 믿고 싶어 한다. 뿐만 아니라 에리히 프롬은 확실성을 보장하는 존재는 인간의 믿지 못할 지식이나 감정이 아니라 예측을 가능하게 하여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컴퓨터라고 말한다.

"사실 인간은 '올바른' 결정을 내리고 과연 옳은 결정이었나 의심으로 고통스러워하느니 차라리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 선택을 확신하는 쪽을 선택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 우상이나 정치지도자를 믿는 심리적 이유 중 하나이다. 우상이나 정치지도자는 사람이 의사결정에서 의심과 위험을 지워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 그 사람의 목숨, 자유 등에 대한 위험이 사라진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그가 결정을 내리는 방법이 틀렸을 위험이 없다는 의미다."

"우리 시대는 신의 대체품을 찾아냈다. 인격이 배제된 계산이다. 이 새로운 신은 모든 인간이 희생해야 할 우상이 되었다. 신성함과 확실성의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고 있다. 바로 계산 가능성, 개연성, 사실성이다.

이제 우리는 자신에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우리가 컴퓨터에 모든 사실을 제공해주면 컴퓨터가 미래의 행동에 대해 가능한 최고의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원칙이 뭐가 잘못일까?"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생존을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말고 싶어 하지만,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이해하고 싶어 한다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을 인식하는 생물로는 유일한 존재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은 역사 과정에서 개발한 이런 능력, 그저 생물학적 생존 이상의 과정에 역할을 하는 능력을 이용하고 싶어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위대한 예술은 본질적으로 자기와 공존하는 사회와 충돌한다고 말한다. 예술은 진실히 해당 사회의 생존 목표에 부합하는 것이든, 방해하는 것이든 따지지 않고 실존에 대한 진실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위대한 예술을 혁명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의 현실을 건드리고, 인간 사회의 다양한 과도기적 형태의 현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때문이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 과정에 해당했던 모든 범주가 소유의 범주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정적이며 움직이지 않는 에고는 대상을 소유한다는 측면에서 세상과 관계를 맺지만, 자아는 참여하는 과정을 통해 세상과 관계를 맺는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인은 '소유'할 뿐 '존재'하지 않는다는 에리히 프롬의 글이 인상적이다.

"에고 대 자아, 소유 대 존재에 대한 강조가 커지면서 우리 언어의 발달에서도 화려한 표현들이 생겨났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가고 있다. "나 잠을 잘 못 자" 대신 "나 불면증이 있어", "나는 슬프고 혼란스러워" 대신 "나 문제를 갖고 있어", "내 아내와 나는 서로를 사랑해" 대신 "나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갖고 있어"라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인간 특유의 능력이 더 위대하게 펼쳐지는 데 기여하고, 생명을 조장하는 것은 모두 가치가 있거나 선하다고 말한다. 반면에 생명의 목을 조르고 인간의 능동성을 마비시키는 것은 모두 부정적이거나 나쁘다. 에리히 프롬은 불교,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위대한 인본주의적 종교, 혹은 소크라테스 이전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위대한 인본주의 철학자들의 모든 규범은 이런 보편적인 가치관의 원리를 고유의 형태로 정교하게 다듬은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계와 컴퓨터는 생명 지향적 사회시스템에서 기능하는 일부로 자리 잡아야지,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결국에는 죽이는 암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기계나 컴퓨터는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하고, 그 목적은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 결정해야 한다. 사실의 선택을 결정하고, 컴퓨터의 프로그래밍에 영향을 미치는 가치관은 인간의 본성,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다양한 발현에 대한 지식을 기반으로 습득되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술이 아니라 인간이 가치관의 궁극적인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계획에서 최대 생산이 아니라 최적의 인간 발달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산업적 진보가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전개가 사회 조직화의 우선적 원리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계가 모든 노동, 모든 계획, 조직화와 관련된 모든 결정, 심지어 모든 건강 문제까지 도맡을 수 있다고 해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문제까지 도맡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대인관계, 인간적 판단, 반응, 책임감, 판단이라는 영역에서는 기계가 인간의 기능을 대체할 수 없다. 에리히 프롬은 물질적으로 충족되지 않은 욕구가 사라지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문제, 갈등, 비극도 사라지리라는 가정은 유치한 몽상일 뿐이라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소비와 생산 패턴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금욕주의나 가난이 아니라, 삶을 부정하는 소비에 반대하고 삶을 긍정하는 소비여야 한다고 말한다. 에리히 프롬은 이를 구분하려면 삶이 무엇인지, 능동성이 무엇인지, 자극이 무엇인지, 이 각각의 반대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각이 밑바탕을 이루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에리히 프롬은 기술사회를 인간화하는 데 필요한 혁명적 변화, 즉 기술사회를 물리적 파괴, 비인간화, 광기로부터 구원하는 데 필요한 변화는 반드시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영역 모두에서 동시에 변화가 진행되어야 한다. 에리히 프롬은 시스템의 어느 한 부분에서만 변화가 일어나면 시스템 자체의 변화로 이어지지 못하고 그 병적 증상을 다른 형태로 재현할 뿐이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실천이 없는 아이디어는 메마른 장소에 보관된 씨앗과 같고, 그 아이디어가 영향을 미치려려면 흙에 심어야 하며, 그 흙은 사람 그리고 사람의 집단이라는 에리히 프롬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문화혁명은 반드시 서로 다른 여러 이데올로기와 사회집단을 관통하는 급진적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 새로운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을 공유하며, 자신을 알기 원하고, 자신과 타인으로부터 더는 숨지 않으려 하며, 자신이 문화혁명의 목표로 구상하고 있는 인간의 핵심을 바로 여기서 실현하기를 원하는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소규모 대면 집단을 바탕으로 삼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들은 분권화된 탈관료주의적 기능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집단의 구성원이 되기 위해서는 소비자적 태도를 반대하고 능동적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며, 급진적 인본주의를 이해하고, 그 목적을 긍정하고, 광신과 파괴는 극복해야 할 인간의 약점이지, 다양한 합리화의 가면 아래 고양 시켜야 할 인간의 특징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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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퓨마의 나날들 - 서로 다른 두 종의 생명체가 나눈 사랑과 교감, 치유의 기록
로라 콜먼 지음, 박초월 옮김 / 푸른숲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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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퓨마가 서로 교감하고 치유하며 성장해가는 여정을 담아낸 책으로 여운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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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퓨마의 나날들 - 서로 다른 두 종의 생명체가 나눈 사랑과 교감, 치유의 기록
로라 콜먼 지음, 박초월 옮김 / 푸른숲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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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아마존 회고록 분야 1위, 굿리즈 초이스 어워드 '최고의 회고록' 후보에 오른 책 <나와 퓨마의 나날들>은 서로 다른 두 종의 생명체가 나눈 사랑과 교감, 치유의 기록이자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한 인간의 성장기다. 저자인 로라 콜먼은 20대에 직장을 그만두고 남아메리카에서 배낭여행을 하던 중, 우연히 야생동물 보호구역 자원봉사자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불법 밀매로 학대당하다 구조된 퓨마 '와이라'를 돌보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야생을 두려워하는 퓨마, 삶이 두려워 도망친 한 여성이 서로를 믿으며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아슬아슬하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내,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책은 환경 파괴로 살 곳을 잃은 동물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전하며, 야생동물들이 안전한 삶을 이어갈 수 있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법을 모르는 새,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원숭이, 사냥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재규어와 퓨마까지, 자연을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독자라면 정글 한복판, 동물들의 교향곡이 들리는 듯한 이 책을 내려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은 '1부 껍질 속의 나, 2부 깨어나는 나, 3부 새로운 나'라는 3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인 로라는 런던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방황하다 새로운 삶을 찾고자 2007년 스물넷의 나이에 볼리비아 여행을 떠나고 그곳에서 야생동물 보호구역(생추어리) 자원봉사자로 일하다 자신의 삶을 변화시킨 퓨마 '와이라'를 만난다. 이 책에서 로라가 불법 포획되어 정글 밖 암시장에서 애완동물로 거래되거나 서커스와 동물원에 갇혀 다시는 풀려나지 못하는 동물들이 있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케추아어로 '바람'이라는 뜻을 지닌 퓨마 '와이라'를 만나며 자신의 규칙을 깨뜨리고 호기심, 기대감, 희망이라는 깊고 강렬한 감정으로 시작되는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와이라는 야생동물이에요. 케이지 밖으로 꺼내줄 어예요. 잠시라도 자유를 맛보고 다리를 쭉 뻗을 수 있게. 야생의 삶을 누렸더라면 느꼈을 그런 기분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게요."

"케이지에 있던 와이라는 작아 보이기만 했던 게 아니었다. 짓눌린 것처럼 보였다는 게 맞다. 밖에서 보니, 그는 자신이 채워야 했던 공간을 이제야 채운다는 듯 부풀어 있다."

저자인 로라는 네 살이 된 퓨마 '와이라'가 어떻게 야생동물 보호구역까지 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어릴 적 작은 상자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상상한다.

"새끼일 때 어미와 헤어졌어요." 마침내 말문을 연 제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하다. 몇 번이고, 수도 없이 되풀이한 이야기라는 듯이, 나 같은 봉사자들을 얼마나 많이 가르쳐야 했을까. "샤냥꾼들이 어미를 총으로 쏘고 와이라를 도시로 몰래 들여왔을 거예요. 암시장에서 팔아넘기려고요. 한 거리 예술가가 와이라를 사와서 작은 상자에 가둬놓고 시끄럽고 더러운 곳에 방치했어요. 그다음에 재주를 부리도록 시켰죠. 그 어린아이를요. 이건 정말......" 제인이 이를 악무는 모습이 또렷이 보인다. "야생에서 살았더라면 두 살이 될 때까지 어미와 지냈을 거예요. 그런데 사슬에 묶여서 채찍질을 당하고 영양실조에도 시달렸죠.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법은 전혀 배우지 못했어요. 자라서 난폭해진 뒤에야 이곳에 버려졌어요. 태어난 지 열 달쯤 됐을 때예요."

저자인 로라는 캠프에서 나와서 퓨마 와이라에게 향하는 길에서 극도의 피로도 현기증이 난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라는 오솔길을 걸을 때마다, 발걸음을 땔 떼마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익숙지 않고 감각이 대비하지 못하는 새로운 경험이 펼쳐지는 탓에 마음 한구석에서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다시는 눈을 뜨지 않게 바라게 되는 반면에 다른 한구석에서는 절대 그렇게 눈을 감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인 로라가 퓨마 와이라가 자신을 처음으로 핥는 순간을 이야기하는 장면이 흥미롭다. 로라는 몸의 나머지 부분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고 와이라와 접촉한 이 좁은 살갗만이 감각의 대상이 되며, 그저 그 부분만이 자신의 일부로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밖의 다른 모든 것, 이를테면 놓친 버스, 시내를 구경할 기회, 이전의 생활 모두가 흐릇해져가며, 와이라는 자신을 케이지가 실재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로라의 글이 눈길을 끈다. 로라는 똑같이 생겼지만, 결코 똑같이 않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이야기한다.

"와이라가 처음으로 나를 핥는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핥고 있어!" 목소리를 낮춰 감탄한다.

문 반대편에서 무릎을 감싼 채 쭈그려 앉아 있던 제인이 웃는다.

"너무 들뜨지는 마. 소금기 때문일 거니까."

와이라는 도도하게 이마를 들이밀어 나의 팔을 뒤집더니 다른 쪽까지 핥기 시작한다. 하마터면, 정말이지 하마터면 와이라는 케이지 안에, 나는 바깥에 있다는 것조차 망각할 뻔했다. 마치 정반대로 느껴진다. 와이라가 바깥 정글에, 우리가 케이지 안에 있는 것처럼. 정글이 암녹색을 드리워 와이라를 감싼다. 와이라의 혀는 거칠다. 살갗이 벗겨질 정도다. 생각보다 아프지만, 그만두지 않으면 좋겠다. 지금 와이라의 낮은 소리는 지칠 대로 지친, 자포자기한 나의 귀에는 그가 나를 받아들였다는 뜻으로 들린다."

저자인 로라는 "나한테는 구조된 동물이 양파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하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자원 봉사자 밀라의 말에 대해 이야기한다. 구조된 동물을 양파와 같다. 로라는 불안의 껍질을 힘겹게 한 꺼풀 벗겨내면 예기치 못한 다른 껍질이 나오고, 전혀 달지 못했던 또 다른 껍질이 그 아래에 숨어 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로라는 우리 모두는 이곳 동물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기에, 전부 제각기 엉망이고 망가져 있기에, 우리 또한 양파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로라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돌보는 동물들과 자신에 대한 껍질을 벗겨가면서 함께하는 것의 아름다운 힘을 발견한다.

저자인 로라는 야생동물 보호구역 자원 봉사자로 일하면서, 이곳이 물을 모조리 빨아들여 다른 것들이 들어설 공간을 남기지 않는 나무뿌리 같은 공간이라고 말한다. 로라는 머릿속의 다른 생각들, 불안과 야심과 끝없이 맴도는 걱정이 사라지고, 이제 남은 곳은 이곳에 대한 생각뿐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집으로 가는 길, 들판이 점차 사라지고 지면이 솟아오르며 인간 존재가 옅어지는 흔적이 전부 자취를 감추고 텅 비어 별만 남은 하늘에 대해 말하는 로라의 글이 인상적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인 로라가 야생을 두려워하는 퓨마 '와이라'를 보면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깊은 공감을 느낀다.

"물속을 응시하는 와이라를 보면 이따금 그가 용기를 내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두려워하고 있다. 나는 이해한다. 허세 부리기, 하악거리기, 으르렁대기, 전부 그의 대처 방식이다. 미소 짓기와 괜찮은 척하가기가 나의 대처 방식인 것처럼. 내가 나뭇가지를 밟자 와이라가 1미터가량 공중으로 뛰어오른다. 제 그림자조차 무서워하는 퓨마다. 야생을 두려워하는 퓨마."

저자인 로라는 산불이 나면서 퓨마 '와이라'가 몇 주간 케이지에 홀로 있었던 시간들에 대해 말하며, 물을 무서워하던 와이라가 물속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수면 바로 위에 눈을 내놓고 있는 와이라와 긴 시간 눈빛 교환을 하며 교감하는 장면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어쩌면 몇 주간 케이지에 홀로 있어서 그랬을지 모른다. 어쩌면 통제력을 잃어서 그랬을지도, 열기와 불과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와이라의 본능이 물로 뛰어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와이라가 너무도 두려워하던 일을 해냈다는 사실이다. 수년간 이곳에 머물며 호숫가에 몇 시간이고 앉아 있으면서도 하지 못했던 일. 와이라가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목이 메여 침을 삼키기가 어렵다. 보이는 것은 오직 물방울과 석호 진흙이 튀고 햇살에 갈색을 띤 와이라의 뒤통수와 반들반들한 회색 귀 끝, 휙휙 움직이며 물을 가르는 꼬리 끝의 짙은 털 뭉치가 전부다. 와이라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전부 부풀어 오른다. 뜻밖에 나를 완전히 때려눕히는 그 모든 감정들. 나는 여지없이 망가진다. 몸이 부서지고 마음도 산산조각 난다. 이게 사랑일까? 모르겠다. 확실한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저자인 로라는 부서진 내면을 따라서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떠나는 결정을 하지만, 다시 찾아온 숲에서 와이라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에서 로라가 와이라를 다시 찾게 된 후 자신을 기억하리라 확신할 수 없었던 와이라와 교감을 나누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동물원에 항의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내 몸을 쇠사슬로 철조망에 묶어 지역 언론과 전국 언론에 호소해야 했을까? 내가 듣기로는 그것이 파르케의 설립을 도운 불리비아인 자원봉사자, 후안 카를로스의 방식이었다. 그는 전국을 돌며 스스로를 철조망에 묶고, 마을 광장의 케이지에 자신을 가두고, 서커스단에서 다리가 부러진 퓨마를 양팔로 안은 채 나왔다. 폐장한 동물원을 뒤로하고 나오기 전까지, 나는 내가 생각했던 그 어떤 것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다. 손이 하얘지도록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기도했다. 훗날, 그 퓨마가 누려야 할 삶을 결코 누릴 수 없다면,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면, 언젠가 파르케로 오게 되기를."

"와이라는 나무를 타고 올라가 덩굴 사이로 내려오다가 걸려서 바닥에 떨어졌고 바로 달아났다. 와이라는 로렌소와 달리 삶을 헤쳐 나가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다른 퓨마를 만나보지도 못했고, 경계하는 법을 배운 적도 없었다. 어미가 필요한 시기에 어미는 희생양이 되었다. 와이라에게는 봉사자밖에 없었고, 우리는 그에게 절대로 알려줄 수 없었다. 사냥하는 법을, 자신을 보호하는 법을, 인간의 도움 없이 먹이를 구하는 법과 사랑하는 법을, 와이라와 같은 동물들을 방생하지 않는 이유가 있따. 밖에 나간 와이라에게 좋은 선택지란 없다. 굶어 죽을 수도, 다른 고양이와 영역권을 두고 다투다 죽을 수도, 차에 치일 수도, 다시 포획되어서 도시의 끔찍한 동물원으로 보내지거나 쇠사슬에 묶여 애완동물이 될 수도, 총에 맞을 수도 있다."

""와이라!" 마음이 부풀어 오른다. 이해할 수 없는 감정. 너무나 커서 불쑥 두려워지고, 우는 동시에 춤추고 싶어지는 감정. 나는 와이라에게 손을 뻗으며 조용히 쿡쿡 웃는다. 와이라가 몸을 동그랗게 구부려 나의 손에 파묻힌다. 나는 솜털처럼 푹신하고 부드러운 목을 쓰다듬는다. 행복하게 그르렁하는 진동이 나의 피부 층을 뚫고 전해진다. 와이라는 이제 피곤한 듯 장화 위에 고개를 누인다. 계속해서 쓰다듬자 와이라가 눈을 감는다."

저자인 로라는 자신이 자원봉사자로 일하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에 비하면 저 밖의 세상은 텅 빈 것처럼 느껴지고, 전부 시시하고 평면적이라고 말한다. 로라는 모든 것이 다채로운 빛깔로 불타오르는 이곳에, 한때는 자신을 공포에 떨게 했던 이 정글에, 그때는 미지의 오솔길을 걸을 때, 머릿속 피가 꼭 기관총을 쏜 듯 귀 밖으로 튀어나오고 무수한 심장 박동이 자신의 몸을 풀어 헤쳤다가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 같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로라는 지금은 정반대로 자신의 몸은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해." 갈라지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해본다.

햇살 아래로 굽은 와이라의 목이 금빛을 머금는다. 우리는 하늘 한 조각을 가로질러 높이 날아오르는 독수리를 함께 바라본다. 소리 내 말하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다니, 믿기지 않는다. 와이라가 나를 바라보고 꼬리를 부드럽게 흔들며 호응한다.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 오래전부터. 그러고는 볼을 양발에 기대고 나를 응시한다. 경이로 가득한 눈빛. 왜 그러느냐는 듯한 눈빛. 독수리가 저 멀리 구름 속으로 사라진다."

저자인 로라는 와이라의 시선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지 알 수 없고,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고, 어쩌면 변함없이 자리한 미지의 호숫가, 그 최면 같은 끌림을 좋아할 뿐인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로라는 와이라와 함께 했던 처음을 떠올리며, 양파 껍질이 뼛속까지 달라붙어 있던 때를, 그 껍질들이 오래된 피부처럼 서서히 벗겨지던 것을 기억한다고 말한다. 로라는 계절이 바뀌고 몇 달이 흐름에 따라, 정글이 번성하다 스러지고, 펼쳐지다 줄어들고, 살아가다 죽음에 따라, 옆쪽으로 몸을 돌려본다고 이야기한다.

"와이라와 나는 수천 년간 이곳에 자리 잡았던 야생의 석호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어쩌면 수백만 년 동안 있었을가. 우리가 죽고 나서도 수백만 년간 계속해서 이곳을 지킬지 모른다. 혹은 그 안에 사라질지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볼 수 있길 바랄 뿐이다. 계절을 거스르는 동안 저 광막한 정글을 누빌 수 있다면, 바람과 비와 햇살을 헤치고 나갈 수 있다면 무엇이든 주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는 순간, 와이라의 어미를 잡으러 온 사냥꾼이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으로 돌아가 당연히 그를 멈춰 세울 것이다. 그것이 와이라와 결코 만나지 못함을 의미하더라도, 나를 둘러싼 이 모든 일들이 결코 일어나지 않음을 의미하더라도, 와이라가 그런 일을 겪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바꿔놓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난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지금처럼 와이라가 나를 바라볼 때면 와이라도 그걸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와이라는 언제나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따라잡느라 시간이 걸렸던 것뿐이다."

저자인 로라는 자신과 퓨마 '와이라'의 관계를 많은 변화를 겪었다고 말한다. 서로를 믿는 법을 배우고 그 믿음을 부서뜨리길 반복했다. 로라는 그럴 때마다 자신도 부러졌던 것 같지만 그것 덕분에 더욱 강해졌다고 이야기한다. 로라는 그럴 때마다 와이라를 좀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서 자신을 믿어본 적 없었던 로라가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퓨마 '와이라'를 만나 진정한 자신을 찾고 새로운 길을 떠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떠난다고 해서 실패는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자랑스러워할만한 일을 하기로 선택한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선택할 수 있다. 특권이 남긴 선물이다. 와이라는 선택조차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결코 부서지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것에 의문을 품기로 선택했다. 결혼 그리고 성공의 의미,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자본주의, 종차별주의를 비롯한 '주의'들. 이러한 파멸을 떠받치는 것들. 나를 나 자신과 나의 욕망을 두려워하는 사람으로 만든 모든 것들. 수많은 사람을, 수많은 집을, 수많은 동물을 다치게 한 모든 것들. 그것들에 의문을 품고 맞서 싸우기로 선택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어떻게 와이라의 얼굴을 다시 볼 수가 있겠는가?"

이밖에도 저자인 로라는 불법 야생동물 거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고 말한다. 로라는 야생 동물 거래는 수십억 달러 규모의 산업인데, 소셜 미디어의 등장으로 성장만을 거듭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로라는 전 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의 수많은 동물과 사람이 집을 잃었다고 말한다. 혹은 집이 있더라도 끔찍한 악조건 속에서 살아간다. 로라는 스태프와 봉사자가 없기에, 정부의 지원과 돈이 없기에, 아니면 그저 지독하게 피곤하기에 그렇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 책의 끝부분에서 로라가 자신의 바람을 담은 글들을 써내려간 이야기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와이라는 가지들 속에 우뚝 서 있다. 꼬리가 거세게 요동치고,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럽다는 듯 입을 떡 벌린다. 희미한 금빛을 머금은 분홍색 하늘을 우리는 함께 올려다본다. 비가 이제 막 내리기 시작했다. 종이처럼 얇고 유리처럼 짙은 암녹색 나뭇잎과 우리 얼굴에 빗방울이 후두두 떨어진다.

이 책을 여기서 끝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말하고 싶다. 파르케는 번성 중이라고. 열성적인 봉사자들로 흘러넘친다고. 모든 스태프를 현지 출신이며 이 튼튼한 유대가 일의 균형을 맞춰주는 덕분에 돌봄 작업이 더 오래도록 지속 가능하고 전도유망해졌다고. 동물들은 전부 다 건강하다고. 불법 애완동물 거래가 급감했기에 사실상 더는 아무도 우리에게 동물을 맡기지 않는다고.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비행기를 타지 않는다고. 산림 파괴는 끝났고 기후 변화는 일어나지 않으며 오스트레일리아는 불타지 않는다고. 남반구의 아마존과 지역 공동체는 휴대폰 생산에 필요한 광물을 찾아 헤매는 광업 회사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다고. 석유 회사는 송유관을 새로 건설하지 않고, 다국적 기업과 정부는 숲은 단작 농경지로 바꾸지 않는다고......"





이 포스팅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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