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풀의 구원 - 부서진 땅에서도 왕성하게 자라난 희망에 관하여
빅토리아 베넷 지음, 김명남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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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의 구원>은 영국의 시인 빅토리아 베넷이 야생 정원을 가꾸면서 피할 수 없는 상실과 고통을 자연의 생명력으로 바꿔나갔던 10년의 회고를 선연하게 그려낸 에세이다. 저자는 언니의 죽음과 아들의 지병 등 자신이 지나온 삶의 조각들을 치유의 힘을 지닌 90개의 들풀과 연결 지으면서 한 권의 압화집처럼 펼쳐낸다. 회복력을 상징하는 데이지, 역경에 맞설 힘을 주는 서양민들레, 외로움을 물리치는 붉은장구채, 희망을 안겨주는 보리지. 아름다운 들풀로 무성한 야생 정원에 서서 시인은 말한다. "때로 우리는 부서짐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부서진 덕분에 살아갈 수도 있다"고.

"우리가 심는 잡초가 언젠가 야생의 약초원이 될 줄 몰랐던 것처럼, 내가 이 글을 쓰기 시작할 대는 이것이 책이 될 줄 몰랐습니다. 망가진 애도의 땅에서, 나는 그저 무엇이 자랄 수 있는지 보고 싶었습니다.

삶의 이상하된 정원에 들어맞지 않는 것, 이를테면 외로움과 상실과 그 모든 분투를 너무나 열심히 뽑아내는 바람에, 우리는 가끔 그것이 품은 아름다움을 못 보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말로 아름답지요.

그러니, 씨앗을 심어요. 당신의 희망이라는 선물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작은 것을 찾아보아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것이 자라리라는 것을 믿어요. 비록 그것이 꽃피우는 것을 당신이 볼 수는 없을지라도."

이 책은 '1장 이것은 내가 꿈꾸던 정원이 아니다, 2장 애도와 모성, 그 가혹한 순환 속에서, 3장 삶이 우리를 진흙탕으로 이끌 때, 4장 생명은 내내 굳세게 들이닥친다, 5장 돌무지에서도 쉽게 자라나는 사랑, 6장 어머니 식물은 시앗에 기억을 남긴다, 7장 내 모든 야생의 어머니, 8장 들풀의 구원'이라는 8개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인 빅토리아 베넷은 늦은 나이에 학업을 시작해 문예창작학 석사를 취득했고 30여년간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몇 번의 유산 끝에 어렵사리 아이를 갖게 된 그는 장미 정원 같은 미래를 꿈꿨으나 출산을 석 달 앞둔 어느 날 새벽, 한 통의 전화가 그 정원을 짓밟는다. 강에서 카누를 타던 언니의 익사 사고를 알리는 전화였다. 그날 이후 5년이 지나도록 베넷은 깊은 상실과 돌봄 사이에서 고통받는다. 그의 아들은 겨우 세 살에 제1형 당뇨를 진단받아 간병이 손길이 절실하고, 예술가의 삶은 늘 가난하다. 베넷은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영국 캡브리아주 석공장터에 지어진 공공 주택단지로 이사한다. 그리고 어머니와 언니가 가르쳐준 대로, 그 역시 아들과 함께 돌무지 마당에 들풀의 씨앗을 받아 뿌린다. 누군가는 잡초라 부르는 풀들이 부서진 흙과 길러진 바위틈에서 무심하게 자라나더니, 어느새 그곳을 재생과 희망의 약초원으로 탈바꿈시킨다.

이 책에서 저자가 언니의 죽음이라는 상실을 경험한 후 지병이 있는 아들과 함께 야생 정원을 가꾸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담은 글이 인상적이다. 사랑받지 못하는 식물인 잡초가 얼마나 악착스럽게 버티는지, 그 씨앗이 길러내는 생명이 얼마나 굳센지 생각해본다는 저자의 글에 깊은 공감을 느낀다. 잡초는 사람이 그것을 원하지 않을 때만 잡초다.

"나는 정원사가 아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정원사의 모습에는 맞지 않는다. 나는 제때에 심지 않고, 심어야 할 곳에 심지 않는다. 무엇을 심어야 하고 무엇을 심지 말아야 하는지 모른다. 그저 호기심과 우연에 이끌려서 되는 대로 가꿀 뿐이다. 내게는 여기 교란되고 망가진 땅에서도 새 생명이 자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사전은 잡초를 '사람이 원치 않는 곳에서 자라는 야생 식물'로 정의한다. 하지만 그 운명은 누가 정할까? 여느 야생화와는 달리, 우리 주변에 흔한 잡초에는 인류가 어떤 때는 일부러 그것들을 재배하고 또 어떤 때는 내쫓으면서 개입한 상호 의존의 역사가 있다. 이 역사는 마법과 치유, 음식과 전설, 식물학자와 표본실과 여자 주술자의 주문을 떠올리게 하는 식물들의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때 사람들은 이 끈질긴 식물들이 우리를 먹이고 치료하고 입히고 채색해주는 것을 귀하게 여겼고, 그래서 그 씨앗을 받아 거뒀다."

저자는 출산을 3개월 앞두고 언니의 죽음을 알게 된 순간의 감정을 내밀한 언어로 드러낸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기가 영원히 언니에 대해서 모를 것이라는 저자의 글에서 죽음이라는 상실의 고통과 그리움이 깊이 전해진다.

"문득 내 갈비뼈를 차는 발길이 이 고통의 안개 속에서도 생명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나는 쉬고 먹고 품고 준비하고 강해지고 낳고 놓아줘야 한다. 어떻게 그걸 해낸다지? 말은 넘 작고, 상실은 너무 크다. 시인들과 신비주의자들은 삶이란 다 지나가는 것이고 한 생명이 끝나면 다른 생명이 태어나기를 기다린다고 말하지만, 지금 그 비유는 내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저자는 삶은 그 끝에 도달하는 길을 아주 다양하게 제공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 길을 안다고 상상하기를 좋아하지만 대체로 모른다고. 대체로 길을 잃는다. 저자는 우리가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지점을 넘어서고 나서야 비로소 걸어온 길이 보일 뿐이며, 바로 그때 어쩌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이끼는 마법 같은 성질이 있다고 말한다. 이끼는 도깨비와 요정, 그 밖에 비밀스러운 것들이 사는 곳에 자란다. 저자는 그곳에 햇빛이 가 닿으면, 이끼는 관능적인 몸을 부풀리고 뻗어서 서서히 모난 돌을 덮어 돌담을 부드럽게 만들고, 그것은 돌과 포자가 함께 아주 느리게 추는 춤이라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이끼는 연약해 보이지만 사실 회복력이 뛰어나고 강인하며, 시간이 충분하다면 이끼는 화강암을 흙으로 바꿔놓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끼는 4억 5,000만 년 넘게 불, 가뭄, 얼음, 혹서를 견디면서 천천히 세상을 바꿔왔다. 자발적으로 생장을 멈춰서 더 나은 기후가 올 때까지 기다림을 아는 능력 덕분에 이끼는 죽음의 목전에 다다르다가도 첫 비에 되살아난다. 불탄 땅에 맨 먼저 옮겨오는 생명 중 하나로서,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위 표면도 생물 다양성이 넘치는 세상으로 바꿔놓는다. 딱딱한 돌에서도, 푹신한 숲 바닥에서도 자라며 모든 곳을 고대 생명체의 메아리로 바꿔놓는다."

저자는 "내 못생긴 슬픔은 분홍색으로 물든 모성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죽음에 대해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토록 죽음이 탄생에 가까운 일인데도 말이다."라고 말하며 산산이 부서진 세상에서 자신을 현실에 묶어두는 것은 아이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첫 아기를 떠나보낸 유산의 경험에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죽음을 노폐물로 취급했던 의사의 언어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독자에게 모성애와 슬픔 사이를 비틀비틀 오가고, 마음이 날카롭고 낯선 풍경에 찢겨서 너덜너덜해진 이야기를 건넨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애도의 노파는 밤에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줄 때 지켜준다고 말한다. 애도는 죽음이 있는 곳에는 생명 또한 있어야 함을 알기 때문이라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모성은 달콤한 젖과 감미로운 꿈으로 이뤄진다. 하지만 애도는 숲에서 사는 음침한 노파다. 그는 다정함을 불러들이지도, 사랑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는 진흙탕에서 사는 야생의 사나운 존재이고, 결코 그곳을 떠나지 않는다. 그가 나를 할퀸 상처는 분홍색으로 벗겨진 채 영영 아물지 않는다.

나는 해야 하는 일을 한다. 조각난 자신을 꿰맞추고, 모너지려는 중심에 실용적 기능이라는 핀을 박아서 그것을 떠받친다. 빨래를 하고, 이야기를 읽어주고,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목욕을 시키고, 보살핀다. 나는 가끔 울지만 무슨 수를 쓰든 살아서 버텨야 한다. 비가 오는 날에는 빛이 들어올 수 있도록 창문을 닫는다."

저자는 어머니의 다른 모든 행동처럼 정원 가꾸기는 어머니가 별달리 애쓰지 않고도 해내는 일인 양 보였고, 자신의 세상을 뒤덮은 감각을 불러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또한 저자는 어머니는 자연을 끊임없이 매만짐으로써 자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이상에 맞도록 만들어냈다고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정원을 가꾸는 것은 조용한 반항의 행동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자연을 길들이려고 애쓸 때, 어머니는 자연을 격려했다. 어머니는 가방에 작은 휴대용 칼을 갖고 다니다가 눈에 띄는 잡초가 있으면 파내어와서 집 화단에 심었다. 아무 표시도 없는 봉투에 연중 야생화 시앗을 모았다가, 가을에 게릴라처럼 그 내용물을 정원 가장자리에 뿌렸다. 어머니는 자라난 꽃을 보고 깜짝 놀라기를 바랐다. 낡은 화분에 심은 양파를 라벤더 밭 속에 뒀고, 줄기 끝에 보라색 꽃이 피는 병풀들과 흰점나도나불이 길게 늘어지게 놔뒀다."

저자는 아이의 일상은 끊임없는 탐구와 발견의 연속이고,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답해주는 것, 그리고 가끔은 답을 몰라고 괜찮다고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사람들은 아이의 당뇨병을 통제해야 하는 정복의 어휘로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고 전한다. 우리는 춤을 배우는 중이고, 당뇨병은 그저 까다로운 파트너일 뿐이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아들의 희망은 내 슬픔에 빛이 되어주고 내 용기는 아들의 비틀거리는 발을 지탱해준다. 헛디디고 미끄러지고 성공하기도, 실패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우리 인생의 이야기를 춤추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여운을 남긴다.

"아이에게는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교사가 필요 없다. 아이는 스스로 그것을 찾아가고 있다. 자신의 호기심이 이끄는 대로 아이는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우주에 무엇이 있는지, 땅속에 무엇이 묻혀 있는지, 식물이 어떻게 자라는지, 자기 몸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언어란 무엇인지, 믿음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생명이 어떻게 시작되고 끝나는지 알고 싶어 한다."

저자는 '만약', '이랬다면', 이것은 우리의 후회를 양쪽에서 떠받치는 북엔드지만 우리는 늘 어떤 선택이든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자는 어쩌면 사실 사람들이 덜 걸은 길이란 없고, 그거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는 작고 덧없는 순간만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모든 선택은 우리 인생에 영향을 미치지만, 누구도 처음에는 그 방식을 알 수 없다. 결과가 기대와 다르게 나올 때, 그제야 우리는 탓할 대상을 찾고 울부짖는다.

"언니가 죽고 나서 몇 달 동안 어머니는 '만약 그날 이해싿면 딸이 살았을 텐데' 하는 갖가지 길을 떠올리곤 했다. 만약 언니가 그냥 집에 있기로 선택했다면. 만약 언니가 급류를 만났을 때 카누를 계속 타지 않고 걸어서 지나가기로 선택했다면. 만약 언니가 다른 강을, 다른 동행을, 다른 날을 선택했다면. 선택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만약 언니가 야외 활동 교육가가 되지 않고 계속 정원사로 일했다면 어땠을까? 만약 아예 언니가 컴브리아로 이사 오지 않았다면? 만약 언니가 하나뿐인 소중한 인생에서 위험을 덜 감수하면서 살았다면?"

저자는 아이의 병이 곧 아이는 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아들은 흙탕물에 젖어도 활개치면서 세상을 탐구하는 소년이라고 이야기한다. 병에 따라오는 위험이 몹시 두렵더라도, 옆으로 비켜서서 아이가 빗속에서 놀도록 허락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나는 아이에게 내가 필요할 때에 대비하여 여기 서 있을 것이다. 비록 주머니의 내용물은 변하여 예전에는 물티슈와 장난감 기차를 가지고 다녔다면 지금은 혈당 측정기와 인슐린과 고당도 간식을 가지고 다니지만, 나는 아이가 삶을 살도록, 진흙투성이 손을 만끽하도록 나둬야 한다. 그리고 나 또한 그럴 수 있도록, 길을 찾아야 한다."

저자는 슬픔이 이 땅을 차지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서서히 땅이 변하고, 눈에 보이지 않은 땅속에서 결과물이 뿌리에 양분을 준다. 저자는 잎과 줄기가 펼쳐지고, 금세 모든 생명에 생명을 낳는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생명은 내내 굳세게 들이닥쳐서, 한때 돌밭이었던 곳을 무성하게 뒤덮는다고 말한다.

"슬픔은 우리와 함께 산다. 그래도 나는 것이 우리의 나날을 몽땅 차지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의 좁고 고불고불한 오솔길을 걸으면서 발밑에서 피어나는 사이프러스 향을 맡는다. 아들은 제 나무와 관목을 포옹하며 생명체 하나하나에게 무럭무럭 자라라고 격려한다. 길어지는 빛 속에서 우리 정원이 자란다. 우리는 비와 해를 선물처럼 반기고 그것들이 하는 일을 목격한다."

저자는 아들이 제 몸을 에워싼 하늘을 느끼기 바라고, 제 심장이 자신을 어디로 이끄는지 알기를, 제 비행을 자신만만해하면서 공중을 날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아들에게 차츰 형체를 갖춰가는 자신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려면 저자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글에 공감한다.

"애도하는 사람에게는 오직 순간뿐이고, 그 속에서 나는 살아야 한다. 다만 그것이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의 순간이 되도록 노력할 뿐이다. 내게 가르침을 주는 것은 아들이다. 내가 이러저러해서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며 물가에서 아이를 물러서게 할 때, 아이가 한 발짝 더 뛰려는 것을 막을 때, 아니는 내게 미소 짓는다.

"알라, 엄마.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 아들은 이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놓는다."

"내가 갖게 된 나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내 몸의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어디가 부러졌고 어디가 휘어지는지 알아봐야 한다. 엄마가 되는 법과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다 보면 가끔 양쪽으로부터 잡아당겨지는 기분이 들 테고, 그 틈새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양쪽 모두에 실패했다고 느끼는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런 날, 나는 스스로를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저자는 아이가 상냥함이라는 재능으로 빛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모든 생명은 연결되어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고 말한다. 한 생명을 기르려면 다른 생명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정원에는 많은 사람의 선물이 심겨 있다. 이것은 아들과 나 단 둘이서 해내는 일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것이 단절됐기에, 우리는 삶의 갈라진 틈에서도 민들레처럼 쉽게 자라나는 사랑을 미쳐 못 알아보곤 한다."

저자는 죽음을 향해가는 어머니와 자신을 묶어주는 끈을 언제까지 붙잡고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은 삶과 죽음이고, 그 사이에서 대부분 놓치고 마는 수많은 평범한 기적뿐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는 울면서도 우리가 가진 순간을 고맙게 여겨야 하고, 노래를 불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루가 깊어간다. 우리는 웃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엉망진창 음정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른다. 열일곱 살에 파리에 가면 쓰려고 산 챙 넓은 모자를 자전거 앞에 매어두고서 훗날 결혼할 남자와 함께 전후 유럽을 자전거로 누볐던 여자에게. 야생의 스코틀랜드 해안을 그림으로 그렸던 여자에게. 30년간 매일 우리에게 도시락을 싸줬던 여자에게. 자주 울었고 가끔 죽으려고 했지만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는 자신이 날 수 있는지 보려고 두 팔을 퍼덕였던 여자에게. 나는 어머니에게 그 여자가 보인다고 말해주고 싶다. 세월이 극구 길들이려 했던 아름다운 야생의 여자가 보인다고. 그 여자가 되어낸 어머니가 보인다고."

"이윽고 다가온 죽음은 조용하다. 죽음은 시계가 조용히 자정을 넘기듯이 은근슬쩍 다가온다. 이별의 약속도, 사랑의 다짐도 없다. 가냘픈 호흡 세 번, 그 끝에 어머니의 입에 맺힌 가벼운 갈색 거품, 뒤이어 마치 한숨 같은 날숨. 그리고 어머니는 떠난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빛나는 별을 본다. 밤이 되니 바람이 차다. 어머니가 마침내 가벼워져서 떠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벽을 기어오른 덩굴에서 마지막으로 핀 장미 꽃봉오리는 꺽어와 그것을 어머니 옆 작은 화병에 담는다.

"안녕, 내 아름다운 엄마." 나는 속삭인다. 반은 어른으로서, 반은 아이로서."

저자는 과거로부터 자신의 펜이 조급하게 또각거리며, 말이 영영 사라져버리기 전에 우리 삶의 해설지에 뭐라도 적어넣고 싶어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본다고, 기억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한 인생에 담긴 그 수많은 작은 사랑의 행위들은 어머니가 매일같이 자기 힘으로 만들어낸 선물이었으며, 어머니는 그 하나하나의 행위를 통해서 자기 꿈의 씨앗을 뿌린 것이었다. 어머니는 이 얼마나 멋진 정원을 우리에게 만들어줬는지."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아들과 자신은 너무 많은 것을 상실에 바쳤고, 그 시간은 우리가 영원히 되찾을 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는 너무 큰 사랑을 발견했으며, 그 사랑은 스스로 빛을 향해 나아간다고 말한다. 저자는 자신의 어둠에서 나온 아이를 보고, 자신에게 아이는 여전히 보고 있기만 해도 기적적인 존재라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야생의 어머니가 곁에 있으니, 혼자가 아니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나는 미래를 두려워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제 그 마음을 내려놓는다. 우리가 살아가는 나날은 한 단위의 기쁨과 한 단위의 슬픔으로 이뤄진다. 우리가 도달해야 할 행복의 봉우리란 없고, 성취해야 할 완벽한 삶도 없다. 그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어지럽고 끔찍하고 아름다운 삶뿐이며, 나는 이 삶에 감사한다."

저자는 언니가 죽음 뒤로 열다섯 번의 봄이 흘렀고, 눈가에 거미줄이 모였고, 머리카락에는 은색 실이 쉬었지만 삶과 죽음은 계속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슬픈 세상, 내가 뒤에 남기는 것은 이 세상이라고 이야기한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어둠에 지지 않고 희망을 지켜내는 씨앗이다. 그리고 우리가 한때 돌과 쓰레기와 모든 망가진 것으로부터 정원을 길러냈으며, 게다가 그 정원이 번성했다는 기억이다."라고 이야기라는 저자의 글이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나는 슬픔으로부터 벗어날 길을 찾기 위해서 이 땅을 팠지만, 땅을 갈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야생으로 돌아가는 길, 세상의 경이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우리가 집으로 삼은 좁은 땅은 이후 10년간 계속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겼다. 우리는 매년 새 생명을 발견한다."

"나는 기다리고 있는 흙 위에 씨앗을 뿌린다. 그리고 정원이 내게 가르쳐준 것을 기억한다. 달리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을 때는 앞으로 자라날 작은 것들에게 돌아가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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