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라는 세계 - 30년간 연기를 가르치며 생각한 것들
신용욱 지음 / 부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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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것 같지만, 실은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 무대 위에서, 혹은 사각형의 프레임 속에서 언제나 우리를 울고 웃게 만드는 '배우'라는 직업이 그렇다. 많은 사람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정작 베일에 가려진 일. 책 <배우라는 세계>는 배우라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살며시 문을 열어준다.

강동원, 원빈, 한지민, 한효주, 김지훈, 이준혁, 홍경 등 수많은 유명 배우의 연기를 지도해 온 저자 신용욱이 보여 주는 세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무대 위 화려한 배우의 모습이 아니다. 이 책은 30년간 연기를 가르치며 겪어 온 지난한 시간이 페이지 곳곳에 새겨져 있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축적되어 온 경험이 오롯이 담긴 이 책 자체로 아주 특별한 배우 수업인 셈이다. 실제로 배우를 꿈꾸는 이들이 꼭 한 번 들어 보고 싶다고 정평 나 있다는 배우의 수업도 마찬가지다. 마치 앞에서 거울을 들어 주듯 배우 각자가 자신을 들여다보고 특성을 알아차릴 수 있게 도와주고, 그 발견을 토대로 연기를 발전시킬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한다. 수업 자체가 삶을 읽고 감각하고, 호흡하는 연습이다. 그래서 책을 읽을수록 알게 된다. 배우를 꿈꾸는 이들은 물론, 지금의 자리에서 더 나은 내가 되고자 애쓰는 모든 이를 위한 수업이라는 것을.

저자는 이 책의 프롤로그를 통해서 배우 홍경이 백상예술대상에서 영화 부문 신인상을 수상하고 자신에게 고마움을 전했을 때 오랜 시간 배우들을 가르쳐 온 의미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저라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알아 가야 되는지 마치 앞에서 거울 들어 주시듯 들어 주셨거든요."라며 바들바들 떨면서 전하던 홍경의 진심 어린 말은 자신이 여태껏 그렇게 가르쳐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가르칠 것이라는 걸 깨닫게 했다고 이야기한다.

"아마도 이 책은 잘 정리된 연기 고재가 아니라 연기를 하고 또 가르치며 겪은 시행착오들을 토대로 써 내려간 연기를 대하는 태도, 결국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정답이 없는 연기의 세계처럼, 이 글도 어떤 정답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그저 지난한 이 과정을 함께, 즐겁게 걸어갔으면 좋겠다. 나는 언제나 거울을 들어 주는 사람으로 남을 테니 그 거울 안에서 당신조차 몰랐던 수많은 가능성을 발견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저자는 탁구와 연기는 닮은 점이 많다고 이야기하면서, 탁구를 치다 보면 어느 순간 고도의 집중 상태에 놓일 때가 있다고 말한다. 머릿속의 잡음들이 일시에 사라지도 마치 명상을 하듯 마음이 차분해진다. 저자는 그럴 때면 배역에 완전히 몰입해 내가 그 사람이 되는 순간이 묘하게 겹쳐 보이곤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저자는 이어지는 찰나의 순간, 상대가 공을 어떤 식으로 나에게 넘겨주는지 잘 판단하고 반응하는 과정은 연기를 할 때 대사를 듣고 말하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연기 수업은 나만 잘하면 얼마든지 성취감을 맛볼 수 있지만, 오디션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내가 잘해서 생긴 성취감에 '합격'이라는 보상이 뒤따르지 않으면 좌절하게 된다. 따라서 저자는 모든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떨어지면서 불필요한 좌절감을 일일이 느끼는 대신 선택과 집중을 잘 하라고 조언한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곳에 도달했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 다음으로 나아가느냐라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공고가 올라오는 모든 오디션을 보는 일은 이제라도 중단하고, 해야 할 연기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 우선시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이미지의 배우인지 어떤 색깔의 캐릭터를 가지고 있는지 집중해서 면밀히 분석할 필요가 있다. 나라는 배우를 구체적으로 그려 본 이후에 도전할 오디션을 선택하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그리고 자신이 준비해 가는 대사가 누구나 쉽게 선택하는 대사는 아닌지 인터넷에 검색해 보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희소가치가 있는 독백 위에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연기를 울리려고 집중해야 한다. 독백의 참신함과 연기의 개성이 더해진 후에는 스스로를 믿고 자신 있게 연기하면 된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배우 원빈과 영화 <아저씨> 대본으로 수업할 때의 이야기를 전하여 흥미롭다. 저자는 배우 원빈의 가장 큰 장점은 연기하면서 어떤 문제에 봉착하면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점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조금 애써 보다가 슬쩍 못 본 체하거나, 차라리 일찌감치 포기하고 스트레스 덜 받는 쉬운 방법을 찾을 법도 한데 배우 원빈이 한번 물면 절대 놓는 없이 없었고, 무엇이든 온전히 자기 몸에 꼭 맞게 맞들려고 노력하는 인물이었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재능은 어느 한 가지로 단정 지을 수 없고, 인내심이 있는 것도, 소통 능력이 좋은 것도,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노력과 재능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이제 그만 멈출 때가 됐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마침내 영화 시사회에서 본 그 장면은 수업에서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훨씬 더 깊이가 느껴졌다. 수업 시간이 아닐 때도, 스스로 피나는 노력을 했다는 증거였다.

시작은 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을지 몰라도 배우 스스로가 연구하고 훈련해서 자신만의 연기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아이디어를 자기 것으로 착각할 만큼, 정말 그 정도로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원빈은 그런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성취를 즐길 줄 아는 친구였다."

이 책에서 저자가 배우 한지민이 주저 없이 영화 <미쓰백>이라는 작품을 선택하며, 작품을 통해 아동 학대의 심각성을 널리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전하여 인상적이다. 배우 한지민은 평소 관심 있던 주제인 아동 학대를 심도 있게 다루고 있는 영화를 선택한 것이다. 남자 주인공이 원 톱이 대부분인 영화계에서 여자 주인공이 극을 끌고 나가는 작품은 설 자리가 비좁은 게 현실이었고, 영화 <미쓰백>은 지금까지 배우 한지민이 맡았던 역할과는 또 전혀 다른 연기 변신히 필요한 작품이었지만, 영화 <미쓰백>으로 배우 한지민은 데뷔 15년 만에 첫 여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처럼 저자는 선뜻 선택하기 어려운 작품에 좀 더 확신을 가지고 임했던 배우 한지민을 통해서 개인의 취향이 약으로 작용한 것에 대해 말한다.

"내가 평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것에서 가치를 발견하는 사람인지 자신의 취향을 잘 알고 있는 것은 도움이 된다. 다만, 배우라는 직업인으로서의 취향은 내려 놓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취향은 '독'이 된다. 자신이 싫어하는 장르에 캐스팅되었다고 취향 타령하며 거절할 순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는 수업 때마다 로맨스물 연애 대사만 준비해 오는 제자에게 가족의 사랑 혹은 친구와의 우정에 관한 대사를 찾아보라고 권한다. 개인의 관심사를 토대로 배우로서 취향을 넓혀 가는 방법을 알려 주고 싶은 마음이다. 사랑에도 갖가지 모양과 폭이 있으니까 여러 사랑을 경험해 보면서 점차 한 장르만을 고집하는 것에서 멀어져야 한다."

저자는 대본은 나의 스토리가 아닌 작가의 스토리고 배우는 자신이 표현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가 표현해야만 하니까 초반에 자기 뜻대로 연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서 불편함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고 말한다. 그 불편함을 편함으로, 자유로움으로, 즐거움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이 배우의 과제라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하나의 작품을 고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내 경험에 따라 능동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작품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연기는 결국 상대 배우와 나, 감독과 나, 관객과 나라는 마음과 마음의 교류라고 말한다. 저자는 그 중에서도 가장 처음이 대본과 나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교류이기 때문에 대본을 처음 보는 단계에서는 공들여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문장 하나하나의 표현, 그 속에 담긴 감정과 의도를 오래도록 관찰해야 하고, 자신의 마음에 각각의 문장을 떨어뜨려 어떤 변화가 감지되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대본 분석은 인물의 스토리를 마음으로 이해하는 과정이자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정적인 작업'이며, 이 작업이 끝나고 해야 하는 것이 느끼고 표현하고 말하는 '동적인 작업'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두 작업을 분리해서 훈련해야만 효율적인 연습을 할 수 있으며, 대본을 읽는다는 것은 곧 그 인물의 삶을 읽어 내는 것과 같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연기란 그저 감정을 잘 느끼고 표현하면 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지만, 습득하는 감각이 다를 뿐 연기도 일종의 공부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감각을 시간을 들여 '배워야' 하는 것이다."

저자는 배우는 현실에서든, 연기할 때든 의도를 드러내는 방법을 영리하게 익혀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인간관계에서도 매 순간 나와 타인 사이의 분위기를 읽어 내는 힘을 길러야 하며 작품을 볼 때도 날카로운 눈으로 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목소리의 높고 낮음이나 소리의 질감에 의해 그 인물의 의도가 파악되기도 하고 자세나 움직임으로 의도가 드러나기도 한다. 때로는 열 마디 대사보다 순간의 표정 연기가 의도를 더 잘 드러 낼 때도 있다. 평소에 잘 알아챌 수 있도록 연습이 필요하다."

저자는 배우 강동원은 영화 <전우치>를 마지막으로 자신에게서 졸업했지만, 그가 다시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는 그동안 혼자 힘으로 연기를 하며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금 일깨워 줄 수 있는 '액팅 메이트'가 필요해서라고 말한다. 새로운 관점은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연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저자는 본인이 이미 캐릭터를 연구해 만들어 오면 좀 더 디테일한 부분에서 자신이 의견을 보태곤 하지만, 수업이라기보다는 대화에 가깝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배우 입장에서 작품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이 건네는 조언은 신선할 것이라고 말한다.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경각심을 일으켜 주는 메이트가 있다면 얼마나 운 좋은 인생인가?

어렸을 때는 부모가 그 역할을 해 주지만 혼자 힘으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나이가 되면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이럴 때 거울을 들어 서로를 보게 해 주는 메이트가 있다면 삶은 훨씬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저자는 연기 수업을 오래 하다 보니 처음 배우의 연기를 보고 에너지가 어떤지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에너지를 측정하는 능력을 터득하게 된 것이다. 저자는 에너지란 단순히 힘 있는 발성과 큰 목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작게 말해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에너지 있는 연기라고 이야기한다.

"작품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집중력이 훨씬 강력한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큰 에너지를 쓰는 것을 경험하다 보면 작은 에너지를 힘 있게 전달하는 요령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다. 대사 하나를 내뱉을 때도 앞뒤 맥락을 파악해 에너지의 시작점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기-승-전-결에 갇혀 무조건 처음에는 잔잔하다가 뒤에 가서 감정을 크게 터뜨려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한다."

저자는 배우는 작품이라는 여행지의 가이드와 같다고 말한다. 가이드는 직업 정신을 가지고 상세한 정보를 제공하며 여행객들이 여행지를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저자는 배우 또한 그래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좋은 연기는 진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저자의 글에 공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가장 중요한 것은 배우가 사회의 일원으로서 자기 자신을 좀 더 나은 상태로 만들려는 힘이자 자신을 부정적인 상태에서 긍정적인 상태로 바꿔 놓는 종합적인 연기력이라고 말한다.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것과 더 나은 배우가 되고자 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날카로운 연기 지적에 고개를 숙일 줄 아는 힘, 직업에 회의를 느끼는 상황이 오더라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힘, 오디션에서 떨어졌을 대 실패를 긍정으로 수용하는 힘, 외롭고 지루한 훈련을 끈기 있게 해내 결국에는 마침표를 찍고야 마는 힘, 질투를 내 훈련의 재료로 번역해서 쓰는 힘도 모두 연기력에 포함된다."

책 <배우라는 세계>는 30년간 연기를 가르치며 쌓아올린 배우들의 스승 신용욱의 사유의 조각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으로 깊은 여운을 남긴다. 특히 에세이 <배우라는 세계>는 연기 뿐만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필사할만한 문장들이많아서 연기에 대한 고민이 있는 배우 지망생들 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길을 잃어버린 분들에게 도움을 주는 책으로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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