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숲속 작은 집 마리의 부엌
김랑 지음 / 달 / 2024년 11월
평점 :
10년 전, 어딘지 모르게 답답했던 도시생활을 뒤로하고 지리산 산청에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저자 김랑은 오래되었지만 아름다운 집과 함께 여러 인연을 쌓아간다. 정성껏 밥을 짓고, 아낌없이 마음을 내어주며, 민박집 손님들에게 소소한 행복을 선물한다. 그들에게 전해진 선의와 온기는 또다른 사람에게 가닿을 테니.
가끔 지칠 때면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느긋함을 즐기는 저자답게 여행지에서도 자신만의 속도를 만끽하며, 보고 먹고 걷는다.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한두 마디 나누며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기도 한다. 그렇게 저자의 날들을 짙게 칠해준 인연들이 모여 책 <숲속 작은 집 마리의 부엌>이 되었다.
저자는 갑자기 시작된 시골살이 일은 순조롭게만 흘러가지 않았고 마음고생도 톡톡히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먹고사는 일로 여기서도 골머리를 앓았지만 도시에서 살던 과거와 달리 마음만은 자유로웠다고 이야기한다. 세 식구만큼의 고생과 시련이었기에 충분히 이겨낼 수 있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우리 부부는 남들처럼 열심히 생계를 살아냈지만 도시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항상 이방인 같았다. 밥 먹어먹는 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어도, 기어코 모든 시간을 생계에만 집중할 수는 없는 사람들이었달까. 주말마다 집에 있으면 당장 목숨줄을 내놓아야 하는 것처럼 쏘다녔다. 매주 도시락이나 주먹밥 또는 누룽지를 싸들고 아이와 들로 산으로 나가야 숨이 트였다. 각지를 다니면서 나물도 캐고 조개도 줍고 꽃도 땄다. 발이 닿지 않는 맡바닥으로 삶이 한없이 내려가면서도, 우리 가족 셋이 있을 때만큼은 그 어떤 시간보다 행복하게 보냈다."
저자는 민박집 단골손님이 은주와 후회하는 것, 그럼에도 잘한 것, 이제 와 하고픈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덕분에 많은 것이 정리되었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늘 운명을 저 건너에 두고 살았던 자신이 남편을 만난 것이 잘한 일이고, 지금 하고 싶은 것은 가족과 여행을 자주 가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 하고 싶은 것은, 기회만 된다면 가족과 여행을 자주 가는 것이다. 누군가 한 사람이 우리 곁에 없어도 같이 보낸 시간의 힘으로 일어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게, 우리만의 시간을 모아두고 싶다. 그리움이 아픔 없이 담백하게, 내 어린 날처럼 아프지 않게, 그리움이 그리움만으로만 남도록. 정신없이 살다보니 하루하루 의미가 있었든 없었든 모든 게 쏜살같이 사라져서, 나는 여기쯤 와 있고 어느새 아이는 훌쩍 자라 우리 품을 떠날 나이가 되어버렸다. 아직도 함께 하고팠던게 엮어둔 굴비처럼 줄줄이 있는데, 이제는 할 수가 없네. 앞으로의 시간을 잘 나누는 수밖에 없겠지."
저자는 민박집에 등장하는 마리는 자신의 별명으로, 인터넷을 시작할 때부터 사용해온 초창기 아이디 '꽃마리'에서 따온 것이라고 말한다. 아주 작은 청보라색 야생화인 꽃마리는 땅으로 자세를 한껏 낮추어야지만 자세히 볼 수 있다. 저자는 아주 낮은 꽃, 자신을 아는 사람들이 부르기 쉽게 마리라고 하기 시작한 것이 별명으로 굳어졌다고 이야기한다. 뿐만 아니라 저자가 민박을 시작하며 남편과 함께 우리가 꿈꾸는 민박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가, 놀러오시는 분보다 쉬러 오시는 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항상 이야기의 맺음말이었다고 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참고로 방에는 TV나 별다른 전자제품이 없다. 자연 속으로 찾아들어오신 분들인 만큼 도시로부터 벗어나서 충분히 쉬다 가시게 하자는 우리만의 목표였다. 티가 덜 나더라도 우리가 여행자일 때 제일 힘들었던 부분을 정성스럽게 챙기고, 규정은 좀 구체적으로 까다롭게 잡았다. 그래서 일단 오시면 잘 쉬다 가실 수 있기를 바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뒹굴기, 멍 때리며 지내기, 책 읽기, 마당에서 음악 듣기, 우리가 이곳에서 만끽해온 이 느긋한 즐거움을 손님들도 느끼기를 바라며 시작한 민박이다."
"아직은 미래의 일이지만, 아이가 대학을 졸업하면 손님 수를 줄여서 그때부터는 우리에게 더 집중하자고, 쉬는 날을 늘여서 여유를 가져보자 했다. 나는 밥 짓는 일이 무엇보다도 좋다. 남편은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마리의 부엌'은 우리 부부가 선택한, 우리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이다. 그러니 이 일을 지치지 않고 오래하고 싶다. 오시는 분들에게 안식처가 되기 위해서는 일단 우리가 행복하고 여유로워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저자는 돌아가신 어머니와의 기억을 떠올리며 홀로 청아했던 엄마가 어느 날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날, 자신이 무섭거나 두렵지 않게 마중나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고 말한다. 엄마가 자신의 손을 잡아줄 그때까지 지금을 살겠다는 저자의 글이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한다.
"그 어떤 조건도 이유도 상황도 설명도 필요 없이 딸이라는 이유 하나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나를 지켜줄 유일한 내 편이, 이제는 없다. 예전에는 나의 오만함으로 내가 우리 가족의 모탕인 듯 스스로에게 생채기를 내며 살아가고 있다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엄마가 우리의 모탕이었다. 그렇게 내 편은 가고 나는 살아남아 숨을 쉬고 밥을 먹고 걷는다. 나는 엄마 당신 때문이라도 함부로 살지 않을 것이고, 쉽게 살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떠올리면 말보다 눈물이 먼저 흐르지만 예전처럼 가슴이 뜨겁게 아프지는 않는다."
저자는 지리산 자신의 집은 처마마다 빗물 떨어지는 소리가 다 다르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은 음악을 따로 들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지붕에 내리는 비의 연주곡을 제대로 감상할 준비만 하면 된다는 저자의 글은 자연과 함께 만족하며 살아가는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한다.
"자연에서 살면 다들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바람이 쓰다듬으며 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고, 해도 드러누워 편안해지는 오후에는 낯익은 햇살과 이야기하고 하늘을 볼 때마다 시시각각 변해가는 구름도 붙잡아 놀고 싶다. 여름밤에는 밖에 앉아 있기를 즐긴다. 뜰에 나와 앉아 있으면 골바람은 어느새 어깨부터 발목까지 조물조물 한여름의 열기를 시원하게 풀어준다. 덥고 고단한 오늘을 어루만지면서 수고했다고 애썼다고, 다 알고 있다고 나를 위로해준다."
"삶의 만족도가 백 프로인 사람이 흔하겠냐만은 누가 뭐래도 나는 지금의 이 삶에 만족한다. 그러기 위해 내가 제일 아끼고 늘 잊지 않으려고 되뇌는 말이 있다. 오유지족. 내 안에 들어 있는 것에 만족하며, 남과 비교하는 대신 내가 가진 것을 즐기고 감사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함께 알아가기. 사람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저자는 여행을 다니면서 가끔 멍해지는 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은 자신에게 온전히 빠지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조지아 여행이 바로 그러기에 충분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트레킹할 때에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았고, 회귀점도 생각해두지 않고 걷다가 누구 하나라도 지치면 쉬거나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떠나온 이유가 그저 걷기 위해서였기에 그럴 수 있었다는 저자의 글이 눈길을 끈다.
"사유가 필요할 때, 마음이 어지로울 때, 분노가 일어날 때, 가슴이 답답할 때, 간결해지고 싶을 때, 명쾌한 답이 필요할 때 나는 걷는다. 무작정 걷다보면 모든 것이 풀어지고 명료해질 때가 많다."
저자가 고대도시 유적지인 에페수스로 유명한 셀추크를 여행하면서 느꼈던 추억을 이야기하는 글이 인상적이다. 저자는 자신에게 여행은 늘 '사람'이라고 말한다. 조금은 부족하고 조금은 덜 보고 서툴러도, 사람이 좋으면 다 만족스러운 여행이 되고 만다는 저자의 글에 깊이 공감한다. 아무리 풍경이 좋고 아름다워도 사람과의 이야기가 없다면 그 순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색과 향이 옅어지지만 그 풍경 안에 사람이 있다면 순간은 영원이 된다는 저자의 글은 우리는 결국 사람으로 인해서 온기를 느끼고 다양한 추억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전한다.
"얼마쯤 지나야 그의 빨간 코와 웃음기 있는 굵은 목소리가 잊힐까. 사람에게 정을 주면 떠나기가 싶지 않다. 아 이곳 사람들은 왜 이렇게 다정한지. 그분들과 1층 펍에서 만나 맥주 한 병으로 시간을 흘러보냈던 그 순간 덕분에 오늘 본 하늘과 어제 본 하늘이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떠나는 순간에는 모든 장면이 소중하니 이곳의 어떤 것들이 추억으로 남을지 알 수 없다. 훗날 다시금 돌이켜보면 그제야 이 풍경이 마음에 오래 남아 있음을 알게 되겠지."
저자는 흙을 만지며 농작물을 거두고, 나무와 꽃을 가꾸는 사람들은 이들이 주는 위안과 치유의 힘을 알 것이라고 말한다. 고운 빛깔의 감은 저자 자신에게 묵상이며, 시골생활의 순간순간을 넘기면 참 아름다운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저자의 글이 인상적이다.
"곶감이 우리에게 꿈이라면 감말랭이는 묵상이다. 껍질을 깍고 반으로 가르고 씨앗을 들어낸다. 채반에 눕힌 후 이틀에 한 번, 날이 흐르면 하루에 한 번 감들을 뒤집어줘야 한다. 이 광합성 과정은 우리집 뜰에서 진행된다. 남편이 틀어놓은 음악이 가득 흐르는 뜰에서 나는 햇살을 등에 업고 뒷덜미가 뜨겁도록 감을 뒤집는다. 고된 작업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무아지경에 빠져 모든 잡생각을 비우고 그저 감을 뒤집는 일은 제법 즐겁다. 누군가 전화나 문자로 나를 끄집어내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그대로 있을 정도로 온전히 나에게 빠지는 시간은 흔치 않다. 이렇게 느린 작업들이 좋다."
작은 마당에는 춤추듯 향유하는 꽃들이 피고 지고, 시간과 계절을 달리하며 새들과 벌레들이 울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저자는 이 충만함이 벅차 가끔은 마당에서 기쁘게 울 때가 있다고 말한다. <숲속 작은 집 마리의 부엌>은 지리산 작은 집에서 민박을 운영하면서 자연과 함께 하며, 편리함보다는 고단함이 주는 생의 아름다움과 사람들과의 따뜻한 우정을 느끼는 저자의 삶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는 책으로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