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르미날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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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Germinal)'은 공화력의 일곱 번째 달(月)로 3월21(22)일~4월19(20)일이며, '씨앗' '희망' 혹은 '싹이 튼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제르미날은 혹독한 추운 겨울이 가고 만물이 소생하는 '생명의 달'이지만, 우리에게 4월은 유난히 '잔인한 달'이다.

4.3 제주 항쟁과 4.19 학생 의거가 있었고, 천안함과 세월호도 제르미날에 가라앉았다.



 

이런 제르미날에 에밀 졸라의『제르미날』을 읽게 된 건 우연히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 독서 인생에 한 획을 긋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다. '아'는 나를 말하고 '비아'는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말한다. 

역사는 곧 나와 다른 사람의 투쟁의 기록인 것이다.    -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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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엔이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깊은 밤 르 보뢰 탄광으로 흘러들어온 건 우연이었다. 그는 배가 고팠고 갈 곳이 없었으며 아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탄광촌 몽수에서는 열 살이 지나면 누구나 갱에 내려가 일을 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무려 50년 넘게 탄광에서 일하고 있는 본모르 영감도 그랬고, 그의 아들 마외도 그랬으며, 또 그의 아들 쟈사르와 장랭 그리고 딸 카트린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탄을 캤고, 탄을 캐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탄광촌 밖으로는 나가본 적도 없고 탄광일 이외의 삶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오락이란, 그저 사랑을 나누고 아이들을 낳는 것 뿐이었다.

 


한편, 탄광촌 사장 엔보 씨와 주주인 그레구아르 가족 역시 주어진 환경과 신분에 걸맞게 살아갈 따름이다. 재력을 바탕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지만 사악하지 않고, 욕망과 탐욕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오히려 그들의 연민과 자비심이 그들을 불행으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되고 만다.  

 


 

​이렇게 비참한 삶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고된 노동 끝에 파김치가 된 아직 어린 여자들이 저녁이면 또다시 끝없는 노동과 고통에 시달릴 생명을 만들 생각을 하다니, 이보다 더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녀들이 항상 굶주림으로 고통받을 생명들로 자신을 채워간다면 이런 악순환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다가오는 불행을 막는 것처럼, 배를 틀어막고 허벅지를 꽉 조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 201쪽

그레구아르 가문은 그들의 탄광에 대해 변치 않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주가는 다시 오를 터였다. 신이라도 앞날을 확실히 알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이런 종교적인 믿음에, 한 세기 전부터 가족이 무위도식할 수 있게 해준 가치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더해졌다. 그들이 보유한 주식은 그들에게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그들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극진히 섬기는 신이자, 그들로 하여금 커다란 침대에서 빈둥거리고 먹음직스러운 식탁에서 살찌울 수 있게 해주는 그들 가정의 수호자였다. 그런 삶은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존재를 의심하며 운명을 거스르고자 애쓴단 말인가. -128쪽



 

결국, 두 달 넘게 이어졌던 총파업은 군대의 발포로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서야 끝이 났다.

회사는 다시 문을 열었고, 사람들은 예전처럼 갱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의 테러로 갱이 무너져 또다시 사상자가 발생하고 탄광은 땅속으로 꺼져버린다.



 

러시아식 혁명주의 소설과 같은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건 아니었지만, 오늘날의 현실과 너무도 똑같이 작품이 끝나버리자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파업이었고 무엇을 위한 투쟁이었단 말인가?'


 

 

어쩌면 그들은 패배한 것인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돈과 목숨을 잃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리는 르 보뢰 탄광에서 울려퍼진 총성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치유될 수 없는 그 상처로부터 제정의 피 또한 흘러내리게 될 것이다. 산업의 위기가 끝나고 공장이 하나둘씩 다시 가동한다고 해도 전쟁 상태는 계속될 것이며, 더이상 평화로운 해결이란 있을 수 없다. 광부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렸고, 자신들의 힘을 시험하면서 정의를 향한 외침으로 프랑스 전역의 노동자들을 흔들어놓았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그들의  패배를 보며 마음을 놓지 못했다. 몽수의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승리 한가운데서도 파업 다음날에 대한 은밀한 불안감에 휩싸인 채, 주위의 깊은 침묵 속에 자신들의 종말이 필연적으로 다가오고 있는 건 아닌지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혁명은 끊임없이 되풀이되며, 어쩌면 내일이라도 총파업과 함께 다시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에 이른 것이다. 공제조합 기금을 확보한 노동자들은 한데 힘을 모아 몇 달 동안 굶주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다시 무너져가는 사회에 거센 충격을 가한다면, 부르주아들은 그들 발밑이 무너져내리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다른 충격이, 계속해서 또다른 충격이 아래에서부터 가해지면서 낡은 건물이 흔들리고 무너져 르 보뢰 탄광처럼 심연으로 빨려들어가고 말 것이다. - 2부 366~367쪽



 

이 작품은 파업을 위한 작품도 파업에 대한 작품도 아니었다.

나는 작품이 너무나 오늘날의 현실을 쏙빼닮아 있는 나머지 이 작품을 우리 시대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이 작품은 파업에 따른 결과보다는 파업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매우 중요한 작품이다.



 

개체로서의 개인은 (파업에) 실패할지언정, 전체로서의 인류는 (파업을 통해) 진보한다.



 

에밀 졸라는 다윈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아 인간도 주어진 환경과 타고난 성격 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인식의 바탕 위에 루공 마카르 총서를 기획하여 무려 이십여 년에 걸쳐 총 20권의 총서를 완성했다. 『제르미날』은 총서의 열세 번째 작품이며, 주인공 중 한명인 에티엔은 일곱번 째 작품인『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아들이며, 그 유명한『나나』는 총서의 아홉번 째 작품으로 제르베즈의 딸이다. 그러므로 에티엔과 나나는 남매지간인 셈이다.


제르베즈가 알콜중독에 빠져 삶이 불행해진 것인지 아니면 삶이 불행해서 알콜에 의존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듯, 에티엔과 나나 그리고 카트린의 삶이 어찌하여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는지 그 누구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분별력과 예의를 갖춘 마외 부부가 파업에 앞장서고 평소 순박하기만 하던 사람들이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폭력과 살인을 저지르게 되었는지 에밀 졸라조차도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다만, 그는 수천 년 인류 역사 속에서 단 한번도 무대에 서보지 못했던 하층민 중에서도 최하층민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의 몸짓과 목소리를 기록했을 따름이다. 그 기록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이었다.



 

에티엔은 밀밭 아래, 산울타리 아래 그리고 어린나무 아래에서까지 도처에서 그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하늘 높이 떠오른 4월의 영광스러운 태양이 생명을 배태하고 있는 대지를 따사롭게 비추고 있었다. 출산의 기운을 머금은 산허리에서 삶이 솟아나오고 있었다. 나무의 새순들이 기지개를 활짝 켜면서 초록빛  나뭇잎을 터뜨리고, 새로운 풀들이 대지를 뚫고 나올 때마다 들판 전체가 가늘게 떨렸다. 사방에서 따뜻한 기운과 빛을 갈망하는 씨앗들이 부풀어오르고 키가 자라면서 땅을 뚫고 들판 위로 솟구쳤다.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나무의 수액이 넘쳐흘렀고, 싹트는 소리는 뜨거운 입맞춤 소리가 되어 널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또다시, 여전히, 땅과 가까워지는 것처럼 동료들이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더 또렷이 들려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햇살이 비치는 젊은 아침에 전원이 잉태한 것은 바로 그 소리였다. 사람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복수를 꿈꾸는 검은 군대가 밭고랑에서 서서히 싹을 틔워 다가올 세기의 수확을 위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머지않은 그 싹이 대지를 뚫고 나올 것이었다. - 2부 369~370쪽



 

에티엔은 분명 들었다.

그 소리는 무너진 갱속에 갇혔을 때 울려온 희망의 소리요, 새봄 대지를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소리였다. 


1902년 에밀 졸라가 가스중독으로 사망하자 프랑스 북부 탄광촌에서 달려온 수백 명의 광부들이 그의 관을 둘러싸고 연호했던 바로 그 소리였다.  


'제르미날! 제르미날!'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건 그 이전의 수많은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2016년 촛불집회와 2017년 대통령 탄핵이 가능했던 건 그 이전에 있었던 수많은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과거에 비해 우리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졌다면 그건 앞선 이들의 실패한 투쟁이 있었기 때문이고, 오늘 우리가 투쟁한다면 그 결과는 후손들이 기억해 줄 것이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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