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반양장)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18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올여름의 태양은 태양이 아니다.
이 정도라면 가히 죽음을 부를 만한 '흉기'다.


비수처럼 내리꽂히는 한낮의 햇볕 아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70여 년 전 강렬한 태양 아래서 아랍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이방인'이었다.   



나는 기다렸다. 뜨거운 햇볕에 뺨이 타는 듯했고 땀방울들이 눈썹 위에 고이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것은 엄마의 장례식을 치르던 그날과 똑같은 태양이었다. 특히 그날과 똑같이 머리가 아팠고, 이마의 모든 핏대가 한꺼번에 다 피부 밑에서 지끈거렸다. 그 햇볕의 뜨거움을 견디지 못하여 나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는 그것이 어리석은 짓이며, 한 걸음 몸을 옮겨 본댔자 태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 걸음, 다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랍인이, 몸을 일으키지는 않은 채 단도를 뽑아서 태양 빛에 비추며 나에게로 겨누었다. 빛이 강철 위에서 반사하자, 길쭉한 칼날이 되어 번쩍하면서 나의 이마를 쑤시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눈썹에 맺혔던 땀이 한꺼번에 눈꺼풀 위로 흘러내려 미지근하고 두꺼운 막이 되어 눈두덩을 덮었다. 이 눈물과 소금의 장막에 가려서 나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마 위에 울리는  태양의 심벌즈 소리와, 단도로부터 여전히 내 앞으로 뻗어 나오는 눈부신 빛의 칼날만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타는 듯한 칼날은 속눈썹을 쑤시고 아픈 두 눈을 파헤치는 것이었다. 모든 것이 기우뚱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바다는 무겁고 뜨거운 바람을 실어 왔다. 온 하늘이 활짝 열리며 비 오듯 불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나는 온몸이 긴장해 손으로 권총을 힘 있게 그러쥐었다. 방아쇠가 당겨졌고, 권총 자루의 매끈한 배가 만져졌다. 그리하여 짤막하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나는 땀과 태양을 떨쳐 버렸다. 나는 한낮의 균형과, 내가 행복을 느끼고 있던 바닷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나는 움직이지 않는 몸뚱이에 다시 네 방을 쏘았다. 총탄은 깊이, 보이지도 않게 들어박혔다. 그것은 마치,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알베르 카뮈  『이방인』 김화영 옮김, 민음사 69~70쪽-

 

사실 나는 지금까지 카뮈의  『이방인』을 서너 차례 읽었지만 단 한번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람을 죽여놓고, 고작 그 이유가 태양과 땀과 권태 때문이라니... 

도대체 이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내가 올 여름 카뮈의  『이방인』을 또다시 집어든 것은 기록적인 폭염 탓도 크지만 우연히 눈에 띈 한 권의 책 제목 때문이었다.

'뫼르소, 살인사건'

카멜 다우드라는 알제리 출신 작가가 카뮈의 『이방인』을 재해석했다는 작품 소개 문장을 보고는 '옳지, 바로 이거다!' 싶었다.  드디어 뫼르소가 응당의 벌을 그것도 피지배 지역 출신 작가에게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치 잘못 내려진 판결이 재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듯 통쾌했다. 그동안 나를 철저히 소외시켰던  『이방인』에게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마디로 말해주지. 두 번째 망자, 피살당한 그자가 바로 내 형이라네. 형의 흔적이라고는 남아 있는 게 없어. 형을 대신해 여기 이 바에 죽치고 앉아 있는 나 말고는. 결코 아무도 베풀어주지 않을 조의를 기다리며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내 꼴 좀 보게. 자네가 들으면 웃겠지만, 이건 어느 정도 내 사명이기도 하다네. 객석이 비어가는 동안에도 무대 뒤의 침묵 속에 감춰진 내막을 떠벌리는 것 말일세. 내가 이 언어를 배워서 말하고 쓸 줄 알게 된 것도 그런 목적에서였지. 그러니까, 죽은 자를 대신해서 얘기를 하려는 거야. 형이 하려던 얘기를 어느 정도라도 계속해보려는 거지. 살인자는 유명 인사가 되었고, 그의 얘기는 너무 잘 써져서 나로선 감히 흉내 낼 엄무도 못 내겠더군. 그건 그 사람이 아니면 쓸 수 없는 언어였던 거야. 이제 나도, 이 나라가 독립한 이후로 흔히 볼 수 있었던 짓을 한번 저질러 볼까 하네. 내 동포들이 프랑스인이 살던 옛집의 돌 등을 하나하나 가져다 자기만의 집을 새로 지었듯이, 나도 살인자가 썼던 단어들과 표현들을 가져다 내 언어를 만들어보려는 거지. -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사건』 7~8쪽

카멜 다우드는 『이방인』에서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의 동생 하룬을 내세워 형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리려 한다. 어머니와 함께 죽은 형의 분신처럼 살아야만 했던 하룬은 1962년 7월의 어느날 미처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프랑스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다. 달이 훤히 비치는 새벽 2시였다.  그는 체포되어 군장교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 장교는 프랑스인을 왜 죽였는지 묻지 않고 어째서 7월5일 이전이 아닌 , 이후에 죽였는지만을 따져 묻는다. (참고로, 1962년 7월5일은 알제리가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날이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고 그 다음날 데이트와 해수욕을 즐겼다는 이유만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듯, 하룬 역시 프랑스인을 죽인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왜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가 독립하기 이전이 아닌 이후에 죽였는지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알제리 독립 이전이었다면 프랑스인 한 명을 죽인 건 얼마든지 독립운동으로 둔갑될 수 있다는 뜻이리라. 20여 년 전 프랑스인이 해변에서 식민지 청년을 쏘아 죽였을 당시 그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했듯이 말이다. 



 

아주 오랜만에 다시, 나는 엄마를 생각했다. 그녀가 왜 말년에 "약혼자"를 갖게 되었는지, 왜 그녀가 새로운 시작을 시도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 거기에서도, 삶이 점차 희미해져 가는 그곳 양로원에서도, 저녁은 쓸쓸한 휴식 같은 것이었다. 죽음에 인접해서야, 엄마는 해방감을 느끼고,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됐다고 느꼈음에 틀림없었다. 누구도, 그 누구도 그녀의 죽음에 울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모든 것을 다시 살아 볼 준비가 되었음을 느꼈다.  마치 이 거대한 분노가 내게서 악을 쫓아내고, 희망을 비워 낸 것처럼, 처음으로 신호와 별들로 가득한 그 밤 앞에서, 나는 세계의 부드러운 무관심에 스스로를 열었다. 이 세계가 나와 너무도 닮았다는 것을, 마침내 한 형제라는 것을 실감했기에, 나는 행복했고, 여전히 행복하다고 느꼈다.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위하여, 내가 혼자임이 덜 느껴질 수 있도록, 내게 남은 유일한 소원은 나의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 카뮈  『이방인』  이정서 옮김, 새움 165~166쪽


내가  그 책에서 찾으려 한 건 형의  흔적이었는데, 정작 발견한 건 내 반영이었지. 내가 살인자와 똑닮아 있다는 걸 알게 된 거야. 마침내 책의 마지막 문장에 이르렀어." (....) 내 처형 날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날 맞아주기를 바라는 일만 남았다. " 맙소사, 이거야말로 내가 얼마나 바랐던 일이었는지 아나! 분명히 구경꾼은 많았었지만 그건 그의 죄 때문이었지 재판을 구경하려는 건 아니었어. 게다가 구경꾼들이란 게 어떤 자들이었나! 열성팬들, 우상숭배자들! 그 숭배자들의 무리 속에선 중오의 함성 따위는 전혀 없었지. 이 마지막 문장은 나를 뒤흔들어놓았어. 걸작은 걸작이지. 내 영혼을 비추는 거울. 이 땅에서 살아가는 내가 알라(이슬람교의 유일신)와 권태 사이에서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거울을 들이대고 보여주는 것 같았어. - 카멜 다우드  『뫼르소, 살인 사건』 180쪽


마치 햇볕에 따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결국 하룬 역시 뫼르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사회제도와 규범과 인습에 철저히 소외된 '이방인'일 뿐이었다.


결국, 이 작품은 카뮈의  『이방인』을 전복시킨 게 아니라 재현한 셈이다.

구성과 문장 등에 있어서 원작을 충실히 모방했으니 패러디요, 카뮈가 주장한 '부조리'라는 주제를 그대로 살렸으니 오마주에 가깝다.


잘 알다시피, 카뮈의  『이방인』에는 세 명의 망자(亡者) 와 세 개의 죽음이 등장한다. 

하나는 뫼르소 어머니의 죽음으로 자연사고, 두번째는 뫼르소의 총에 맞아 죽은 아랍인으로 타살이다. 마지막 세번째는 뫼르소 자신의 죽음으로, 사형을 언도받지만 뫼르소가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자살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과연 진정한 자살이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즉, 아이스커피에 샷 하나 추가하듯 그렇게 개인의 자발적 의지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자살은 어쩔 수 없는 최후의 순간에 단 하나밖에 남아 있지 않은 삶의 선택지 같은 건 아닐까? 이 고통에서 헤어나올 수 있는 건 오직 죽음밖에 없다면 과연 그와 같은 죽음을 '선택'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뫼르소가 휴가를 얻기 위해 모친의 부고 사실을 알리자 사장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때 뫼르소는 "그건 제 탓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국선 변호사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울지 않았던 건 너무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식으로 변호하겠다고 하자 뫼르소는 "안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니까요. " 라고 말한다.

 

 

 

(이런 식으로 말한) 뫼르소는 정말 매정하고 사악한 인물일까?

(그래서) 그는 정말 죽어 마땅한 걸까?

(그렇다면) 그의 죽음으로 얻는 건 무엇인가?


양로원 원장과 예심 판사와 변호사와 배심원을 불쾌하게 만든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은 가지고 있지 못한 아니 한때는 가지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일찌감치 내던져버린 인간 본연의 모습을 뫼르소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출세와 권력에서는 한걸음 물러나 푸른 바다와 태양에 마음껏 몸을 맡길 줄 알고, 그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며,  비굴하게 용서를 구하거나 구차하게 삶을 구걸하지 않는 뫼르소의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가 괘씸했던 건 아니었을까.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렸던 건 뫼르소의 삶에 대한 권태가 아니었을까.

사실 권태로움은 예나 지금이나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전유물이다. 먹고 살기 위해 기를 쓰지 않아도 되는 계급에게서나 풍겨나오는 고상함 바로 삶의 여유로움이다.

만약 뫼르소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높은 사회적 신분과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장례식에서 눈물 한방울 흘리지 않은 그의 태도는 몰인정이 아닌 슬픔을 억누를 줄 아는 세련된 태도로 인식되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가족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한 비유한계급(Non leisure class)인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하늘이 무너진듯 슬퍼하고 통곡해야 한다. 일개 선박회사 직원이라는 별볼일 없는 자신의 사회적 신분일망정 그 속에서ㅡ주어진 기회 속에서ㅡ라도 최고가 되고 고소득을 얻기 위해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아야 옳다.


 

그런데 뫼르소는 어떤가?

그는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장례식에서 딱히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가식적으로라도 울었어야 했건만 굳이 그렇게까지 연극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높은 연봉과 승진이 보장된 파리 지사로의 파견근무를 사장이 제안했을 때도 여기서 계속 일하는 것과 파리에서 일하는 것에 별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파리는 지저분하고 소란스러워서 삶의 질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거절한다. 

우연히 권총을 소지하고 해변을 산책하다가 태양 아래서 아랍인이 치켜든 흉기가 예리하게 번쩍거리자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땀이 눈으로 들어가 시야를 가리자 (아랍인이 자신에게 달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만 방아쇠를 당기고 만다. 당연히 정당방위였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따른 처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는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카뮈의 『이방인』은 어처구니 없는 재판 과정을 거쳐 주인공에게 사형 판결을 내림으로써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을 만인 앞에 구현해 낸다. 하지만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면 할수록 개인은 소외되는 부조리만 더욱 가시화될 뿐이다. 마찬가지로 카멜 다우드의  『뫼르소, 살인 사건』 역시 이슬람 교리에 따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식의  복수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일견 합리적으로 보이는 복수의 교리를 강조하면 할수록 부정의(不正義)는 오히려 확대된다는 역설을 재확인시켜 줄 뿐이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재미없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작품일수록 내 지적수준의 낮음과 집중력 부족을 상기시켜주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피해왔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에  제대로 깨달았다. 이런 책들이야말로 나를 또 한 걸음 앞으로 내딛게 만들어준다는 걸.... 비록 강렬한 태양과 무더위를 피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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