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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리타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권택영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평점 :
절판
소설이란 무엇인가?
17세기까지 고전주의자들은 소설을 선과 악, 옳고 그름을 알려주는 교훈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반면,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은 고단하거나 따분한 현실을 잊게 해주는 자극제로써의 소설의 역할만을 중시했다. 그러나 19세기 리얼리스트들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곧 소설이라고 생각했으며, 20세기 예술지상주의자들에게 소설이란 작가와 독자의 정신적 유희('희열')를 위한 것이었다.
예술로서의 소설이 인간의 정신적 유희의 결과이자 목적이라면, 인간은 소설을 통해서 어떻게 예술적 감흥을 경험하는가?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소설을 읽으면서 전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순간 정신적 충격과 함께 깊은 희열을 느끼곤 한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ㅡ리ㅡ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빨을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 리. 타.
그녀는 로, 아침에는 한쪽 양말을 신고 서 있는 사 피트 십인치의 평범한 로.
그녀는 바지를 입으면 롤라였다.
학교에서는 돌리. 서류상으로는 돌로레스.
그러나 내 품안에서는 언제나 롤리타였다.
고전 명작이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아무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품이라고 했던가.
그래서 그만큼 오해와 착각도 많이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예를 들자면, <백경>과 <모비딕>이 사실은 같은 작품이며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이 아니라 괴물을 만든 박사의 이름이라는 것, 그리고 '로리콤(롤리타 콤프렉스)'이라는 말을 만들어낸 <롤리타>에는 롤리타가 없다는 것 등등...
아무튼, 여러가지 이유 등으로 고전 명작은 읽기가 쉽지 않다. 설령 어렵사리 읽었다 하더라도 재미나 감동을 받기는 더더욱 어렵다. 고전 명작이니까 무언가 특별할 것이라는 '기대치(고정관념)'를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 역시 이 작품을 읽기 위해서 여러 번의 결심과 상당한 용기를 내지 않으면 안되었다.
『롤리타』는 우려했던 것만큼 불쾌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음 편히 읽히는 작품도 아니었다. 야하거나 충격적인 장면이 거의 나오지 않아서 오히려 의외였다. 예술과 외설 논란을 불러일으킨 작품치고는 너무 非외설적이라고나 할까.
일단,『롤리타』는 메타픽션의 시조격인 작품으로 손꼽힌다. 메타픽션이란 작가가 독자에게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꾸며낸 이야기일 뿐'이라는 걸 끊임없이 상기시키면서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글쓰기 기법을 말한다. 지금이야 이와 같은 메타픽션이 널리 알려져있지만 『롤리타』가 씌여지고 출간되던 당시에는 그럴 듯하게 이야기를 꾸며서 독자로 하여금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이도록 작품을 쓰는 것이 작가의 임무요 소설의 진리처럼 받들여지던 시대였다. 이를 감안해 볼 때, 나보코프가 그 당시 『롤리타』라는 작품을 통해서 얼마나 전복적인 글쓰기를 시도했었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나보코프는 이미 소설에 '대한'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고,『롤리타』를 완성한 후 외설 시비가 일자 이렇게 역설한 바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소설이 이렇게 쓰여질 수도 있구나! 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썼는지보다는 무엇을 썼는지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소설의 소재는 주제를 위한 하나의 도구 혹은 장치일 뿐, 주제를 압도하거나 넘어서서는 안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일까?
작가가 처음부터 명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써내려간 소설을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점에 있어서 만큼은 나보코프의 견해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문학을 가르치는 선생들은 흔히 <저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아니면 좀 덜 점잖은 표현으로 <그 친구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거야?> 하는 질문을 떠올리기가 쉽다. 나는 책을 쓰기 시작할 때 이 책을 끝내버리겠다는 것 외에 달리 생각이 없는 그런 작가이다. 어떻게 그걸 쓰게 되었느냐, 어떤 과정을 거치느냐 등의 질문을 받았을 때, 영감과 배합의 상호작용이라는 낡은 용어들에 의지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어쩌면 이 말은, 내가 한 가지 요술을 설명하기 위해 또 다른 요술을 부리는 마술사인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롤리타』라고 제목이 붙은 책에 관하여 423쪽-
작가가 특정한 주제의식을 가지고 작품을 쓴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독자에게 전달하겠다는 불순한(?) 의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누군가가 '어떤' 생각과 느낌을 누군가로부터 불러일으키고자 하는 의도를 처음부터 가지고 쓴 작품을 읽는다는 건 누군가(독자)로서 매우 불쾌하기 그지없다.
『롤리타』는 분명 페도필리아(pedophillia)를 소재로 삼고 있지만, 이를 찬양하지도 조장하지도 않는다. 성적 금기를 다룬 정도와 강도만 놓고 본다면,『롤리타』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귄터 그라스의『양철북』이 더했으면 더했지 조금도 덜하지 않는다. 『양철북』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반전소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재에 대한 외설시비 논란을 거뜬히(?) 잠재우고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했다.
사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역시 얼마든지 서구사회에서 환영받는 반전 혹은 반공산주의 작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그는 러시아 태생으로 볼셰비키 혁명 이후 타국으로 망명했으며, 그의 부친은 러시아 공산주의자에게 저격 당해 사망했고 형은 독일 내 나치 캠프에서 굶어 죽은 슬픈 가족사를 갖고 있다. 게다가 그의 아내 베라는 심지어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남다른 신분이나 과거를 이용(?)하기를 끝까지 거부했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예술이 현실에서 지나치게 벗어나 미화되는 것 역시 문제지만 현실참여라는 미명 하에 정치적 색채를 공공연히 드러내는 것 역시 反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도덕적 잣대로 예술을 재단하거나 예술가에게 도덕적 임무를 부여하고 요구하는 사회 역시 위험하다. 과거 전체주의 국가와 오늘날 일부 사회주의 국가를 보라. 그들의 예술은 얼마나 도덕적이고 교훈적인가. 선이든 악이든 어떤 경우든 예술이 목적성을 띠게 되면 그 목적을 위해 복무하는 시녀로 전락할 따름이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작품이다. 한편, 내가 생각하는 정말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반면,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작품이란 인간이 어떤 존재일 수 있는지를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나에게『롤리타』는 이런 작품 중에 하나다.
나는 그녀에게 현찰로 사백 달러, 그리고 수표로 삼천육백 달러가 든 봉투를 건네주었다.
조심스럽게,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녀는 내 작은 선물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마는 아름답게 꽃피었다. 『정말』 그녀는 고통스럽게 힘주어 말했다. 『사천 달러를 주시는 거예요?』 나는 내 얼굴을 손으로 감싸안고 지금까지 흘렸던 어떤 눈물보다 더 뜨겁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손가락 사이를 빠져 턱으로 흘러내렸고 몸은 불덩이가 되었으며 코가 막혀 왔다.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자 그녀가 내 손목을 잡았다.
『날 만지면 그대로 죽을 것 같다. 넌 정말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같이 갈 희망이 전혀 없는 거야? 그것만 말해 줘.』
『네』 그녀는 말했다. 『네, 여보, 전혀 없어요』
그녀는 전에 한번도 나를 여보라고 부른 적이 없다.
『가지 않아요. 그건 분명해요. 큐에게 돌아가는 게 차라리 나아요. 제 말은ㅡ』
그녀는 이 상황에 알맞은 말을 찾고 있다. 내가 마음속으로 그 말들을 대신해 준다 (<그는 내 마음을 망가뜨렸고, 아빤 그저 내 삶을 망가뜨렸어요.>)
『 제 생각엔』 그녀는 말을 잇는다ㅡ『아이쿠』ㅡ봉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주워올린다.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그 돈만 있으면 우린 다음주쯤, 떠날 수 있어요. 제발 울지 마세요. 이해해 주세요, 아빠. 맥주를 더 갖다 드릴게요. 아, 제발 울지 마세요. 그동안 너무 속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그런 게 삶인가 봐요.』
나는 내 얼굴과 손가락을 씻었다. 그녀는 선물을 보고 웃었다.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딕을 부르려고 했다. 나는 곧 갈테니 그를 부르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대화에 궁색해진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롤리타』 381쪽-
험버트 험버트,
그는 짐승으로 살았지만 인간으로 죽었다.
비록, 사랑이었지만...
돌로레스 헤이즈,
그녀는 자기만의 세계가 있었기에 결코 정복당하지 않았다.
설령, 사랑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