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클베리 핀의 모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
마크 트웨인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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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고 미루다가 개학을 얼마 안 남겨놓고 몰아쳐서 하는 방학 숙제처럼 읽었다.  사실 마크 트웨인의 작품들 뿐만 아니라 내용을 잘 알고 있어서 당연히 원작을 읽었다고 오랫동안 착각했던 작품들이 제법 많다. 어린시절 읽었던 아동용 문고들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지 않은 축소판이 대부분이라서, 올해 독서계획은 '읽은듯 (하지만) 안읽은 책읽기'로 정해놓고 보니, 본의 아니게 고전명작들을 찾아 읽게 된다. 원래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만 읽으려 했으나, 톰을 빼놓고는 헉을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아서 먼저 씌여진 <톰 소여의 모험>부터 읽었다. 

 

 

일단, 톰의 눈에 비친 헉은 이런 아이다. 
  

허클베리는 동네 어머니들이 하나같이 몹시 미워하고 두려워하는 아이였다.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제멋대로인 데다가 상스럽고 질이 좋지 않은 아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동네 아이들이 모두 그를 우러러보고 어른들이 말려도 그와 어울려 놀고 싶어 하면서 그 애처럼 되었으면 하고 바랐기 때문이다. 다른 점잖은 집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톰도 허클베리와 같은 화려한 떠돌이 생활이 부러웠지만, 그 아이하고는 절대로 같이 놀아서는 안 된다는 엄중한 경고를 받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톰은 기회만 생기면 그와 함께 놀았다. 허클베리는 언제나 어른들이 입다 버린 헌옷을 입고 다녔는데 넝마 조각 같은 누더기 옷을 사시사철 피는 꽃처럼 펄럭거리고 다녔다. 모자는 낡아 빠진 폐물로, 천이 큼지막하게 떨어져 나간 챙이 초승달 모양으로 너덜거렸다. 외투를 걸칠 때면 옷자락이 발뒤꿈치까지 내려와 닿았고, 뒤쪽에 달린 단추는 등 아래쪽 엉덩이 근처에 매달려 있었다. 멜빵 하나로 흘러내리지 않게 고정시킨 바지는 엉덩이 부분이 나지막하게 축 쳐져 있어 마치 빈 부대를 걸치고 있는 듯했다. 술 장식을 단 밑단은 접어 올리지 않을 때는 진흙에 질질 끌렸다.  - <톰 소여의 모험> 84쪽

 


톰은 폴리 이모와 동생 시드 등과 같이 살았지만 헉은 비록 아버지가 있어도 술주정뱅이여서 학교도 교회도 안가고 아무 곳에서나 잠을 자는 등 떠돌이와 다름없이 생활한다. 말하자면, 헉은 백인이지만 비기독교인에 비문명인으로 배척의 대상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톰과 헉은 평등한 친구사이라기보다는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고 리드하는 관계일 수밖에 없다. 헉 역시 두뇌회전이 빠르고 겁이 없는 톰을 자신보다 한수 위라고 추켜세우면서 고분고분 톰의 말을 따르기만 한다.

 

더글러스 과부댁은 나를 양자로 삼고 <교양 있는> 사람으로 만들 거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 아줌마가 어찌나 매사에 엄격하고 격식을 따지는지 밤낮 그 집안에서 지내는 일이 갑갑해서 죽을 맛이었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나는 그만 그 집에서 토껴버렸지요. 옛날에 입던  헌 누더기옷과 설탕을 담던 큰 나무통으로 되돌아와 다시 한번 자유를 누리는 몸이 되었지요. 그러나 톰 소여가 끝내 나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갱단을 조직하는 중인데 만일 내가 과부댁 집에 다시 돌아가 얌전히 굴면 이 갱단에 끼워주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나는 다시 그 집으로 돌아왔지요.  -<허클베리핀의 모험> 16쪽

 

 

내 기억 속의 헉 역시 늘 지저분하고 불량한 아이로, 그저 주인공 톰을 빛내주는 조연 정도로만 남아 있었는데 이번에 원작을 읽으면서 깜짝 놀랐다. 톰은 처음부터 끝까지 악동일뿐이지만 헉은 아니었다. 헉은 굳이 주일학교에 가지 않아도, 학교 교육을 받지 않아도, 선한 지혜로움을 발휘하는 인물이었다. 


톰이 겉으로는 자유분방한 것 같지만 돈과 명예를 숭상하는 세속주의와 영웅주의에 물들어 있는 반면, 헉은 곤경에 처한 사람을 남몰래 도와주고 흑인 노예를 고발하지 않는 등 사회적 가치보다는 인간적  가치를  우선시한다. 특히, 도망치는 흑인 노예를 고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싼 헉의 갈등과 결심 부분은 이 작품의 백미 중에 백미로 꼽힌다.  헉은 자신이 타인의 재산인 검둥이가 도망가도록 방조하는 건 법을 위반하는 행위로 당연히 벌을 받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헉은 영웅심에 젖어 나중에 칭찬을 받기 위해 용기를 발휘한 게 아니라 법과 질서 대신 자신의 양심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슬아슬한 고비였습니다. 나는 종이를 집어 손에 쥐었습니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둘 중에서 어느 하나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나는 숨을 죽이고는 생각한 끝에 이렇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습니다.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 
그러고는 편지를 북북 찢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끔찍스런 생각이었고 무서운 말이었지만 벌써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내뱉은 말을 취소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내버려두었지요. 그러고는 이제 두 번 다시는 마음을 고쳐 먹는 일에 대해서 신경을 끄기로 했습니다. 그 모든 생각을 머리에서 말끔히 씻어버렸지요. 다시 나쁜 짓을 하기로 하자고 했습니다. 나란 놈은 자라나기를 그런 식으로 자라났으니 나쁜 짓이 내 천성에 맞고, 착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말입니다. 맨 첫번째 일로 나는 짐을 다시 한번 노예 상태에서 훔쳐내자, 아니 그보다 더 나쁜 일을 생각해 낼 수 있다면 그것도 하겠다고 다짐했지요. 나쁜 짓을 하기로 한 이상, 더구나 끝까지 하기로 한 이상, 철저하게 해내는 것이 좋을 테니까요.  - <허클베리핀의 모험> 451~452쪽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오에 겐자부로는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들을 포기하지 않고 키우기로 결심했을 때, 어린시절 읽었던 허클베리핀의 '좋아, 난 지옥으로 가겠어!'라는 말이 그무엇보다 큰힘이 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60년대 전후(戰後) 힘들었던 일본사회는 장애아는 국가와 후손을 위해서 자연도태시키는 게 암묵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만약 이를 어긴다면  애국자가 아니며 반민족주의자로 인식되었다.


우리는 흔히 남이 하려하지 않는 일을 하려고 할 때  용기있다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용기란 결국은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위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간혹 순수하게 타인의 이익을 위해 나서기도 하지만, 그대가로 자신에게 심각한 불이익이 따른다면 '오지랖' 이니 '만용'이니 하면서 비아냥거리기 일쑤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일수록 지옥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감옥에 갇히거나 벌금을 내는 등 속세의 처벌을 두려워할 뿐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옥에 가야 할 짓들을 서슴없이 저지르는지도 모르겠다.


천당과 지옥이 신의 영역이라면 감옥은 인간의 영역이다.
만약 헉이 "지옥은 내가 가겠어!" 라고 외치지 않고 "감옥은 내가 가겠어!"라고 외쳤더라도 15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두고두고 읽히면서 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으리라.
이런 의미에서 헉은 단순히 동시대의 규범적 제약만 뛰어넘은 게 아니라 인간 본성을 가로막는 벽을 허문 것이다. 종종 법과 질서로 대표되는 악이라는 '벽' 말이다.


오늘날에야 흑인노예제도의 비합리성이 당연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마크 트웨인이 살았던 19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흑인 노예를 풀어주거나 도망친 노예를 숨겨주는 것은 국가 정의를 훼손하고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중대 범법 행위로 처벌이 뒤따랐다.  그래도 헉은 '나쁜 짓'을 하기로 한다. 그것도 끝까지 제대로 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댓가로 신이 자신을 지옥에 떨어뜨린다면 기꺼이 지옥에 가겠노라고 결심한다. 헉은 인간이라면 모르겠으나 신이라면 인간의 생명을 구한 자신을 결코 지옥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았다.


선과 악은 본능이다.
나는 인(간)성에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능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대다수가 선을 선택하지 못하는 건, 선과 악을 구별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나 혹은 내가 속한 집단(대표적으로 가족)에 조금이라도 피해가 올까 두렵기때문이다.  선이라는 본성은 악이 아니라 경제적 보상이나 사회적 안정 등을 내세우는 법과 규정 등에 가로막힌다. 


마크 트웨인 역시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이 논란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헉을 끝까지 지키고 싶었으리라. 그래서 그는 작품의 초입에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내걸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20세기 초반까지 수십 년이 넘도록  <허클베리 핀의 모험>은 청소년에게 욕설과 불법과 악행을 사주한다는 이유로  오랫동안 禁書목록에 올라 있었다. 그리고 이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이 루이자 메이 올컷이란다.  바로 <작은 아씨들>로 여전히 세계적 명성을 누리고 있는 '그분'이다.  


고전명작에서 재미를 찾으려고 하는 자 기소당할 것이다.
고전명작에서 위안을 찾으려고 하는 자 추방당할 것이다.
고전명작에서 웃음을 찾으려고 하는 자 총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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