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 물고기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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水草처럼 꾸불꾸불 이어진 書架 사이 사이

손끝이 닿는 곳마다 감겨오는 숨결들


끝없는 세월을 거슬러 오르고 수많은 난관을 헤쳐온

차곡차곡 강바닥에 쌓인 모래알같은 이야기들


그 속에서 나는 보았네

은빛 가득한 수면 위에 홀로 금빛으로 빛나는 단 한마리

바로 황금 물고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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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하다.

빠르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살짝 벗어나 책 속으로 숨어든 이 순간만큼은 '나'를 잊어버릴 수 있어서 좋다. 골치 아픈 세상만사 다 제쳐두고 오롯이 책 속의 등장인물과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지는 절대자유의 순간이랄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으며, 누구든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훨씬 더 자주 흔들렸을 테고 더 깊이 절망했으리라.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관계에 더 한층 집착했을 것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미래에만 매달렸으리라.


만약 책이 없었다면,

나는 답없는 질문들 앞에서 인내심을 잃어버리고 비관(판)주의자가 되었을 것이다. 


 

예닐곱 살 무렵에 나는 유괴당했다. 그때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너무 어렸던데다가 그 후에 살아온 모든 나날이 그 기억을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그 일은 차라리 꿈이랄까, 아득하면서도 끔찍한 악몽처럼 밤마다 되살아나고 때로는 낮에도 나를 괴롭힌다. 햇살에 눈이 부시고 먼지가 날리는 텅 빈 거리, 푸른 하늘, 검은 새의 고통스런 울음소리, 그때 갑자기 한 남자의 손이 나를 잡아 커다란 자루 속에 던져 넣고, 나는 숨이 막혀 버둥거린다. 나를 산 사람은 랄라 아스마이다. -9쪽


 

 

노벨상 수상 작가인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는 유괴당했을 때 초승달 귀걸이를 하고 있어서 '밤'이라는 뜻을 가진 이름으로 불리게 된 라일라의 이야기다.


라일라는 유대인 노부인의 수발이 되어 살아가다가 그녀가 죽자 창녀촌과 빈민촌을 떠돌아 다닌다. 품을 팔아 의식주를 해결하기도 하고 좀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의지하는 어른을 만나기도 하고 마음을 나누는 친구를  얻기도 하지만 늘 그녀를 붙잡으려는 그물이 사방에서 던져진다.  그녀는 그때마다 사력을 다해 도망을 쳐야만 한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더이상 도망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으면 아무곳에나 숨어들어 사흘 밤낮을 깊은 잠속에 빠져든다. 


사람들은 지친 그녀를 정성껏 보살펴 준다.

그러나 그녀가 기력을 회복하면 꼭 그녀를 가두거나 통제하려고 한다. 

그녀는 윤이 나는 검은 피부와 청량한 목소리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가질 수 없는 극한의 생존 조건 속에서도 그녀는 책을 읽었다. 책 속에서 또다른 세상을 만났고 또다른 삶을 보았다.  라일라에게 책은 좋은 친구처럼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면서 모든 걸 알려주었다.



 

나는 몇 달 동안 닥치는 대로, 어떤 순서도 따르지 않고, 나 자신의 기분에 따라, 원하는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지리학과 동물학에 관한 책을 읽었고, 졸라의 『나나』와 『제르미날』,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과  『세 가지 이야기』,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카뮈의  『이방인』과  『페스트』,  슈바르츠 바르의 『마지막 의인』,  얌보 우올로겜의 『폭력에 대한 의무』,  벤 젤룬의  『모래의 아이』,  크노의  『내 친구 피에로』, 엑스브라야의  『모랑베르 패거리』,  바슐르리의  『벙어리 여인들의 섬』,  뱅스노의 『혼돈』,  상드라르의 『모라바진』 같은 소설들도 읽었다.  또한 번역본으로 『톰 아저씨의 오두막』  『잘나의 탄생』 『내 예쁜 손가락이 내게 말해줬어요』 『순결한 성자들』도 읽었다.  그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책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이었다.  밖은 여전히 더웠지만 도서관은 무척 조용하고 시원했으며, 그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리라는 느낌을 받았다.  -73~80쪽 중-



불행으로 점철되는 라일라의 기구한 운명과 때론 자포자기하는 듯한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아팠고 내내 가슴을 졸이던 나는 그녀를 믿게 되었다. 그 어떤 가혹한 시련이 라일라를 덮쳐도 그녀는 결코 무너지지 않으리라. 


보라! 그녀는 에밀 졸라와 빅토르 위고와 카뮈와 플로베르를 만나지 않았는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가장 좋아하는 소녀가 어떻게 삶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읽은 사람이 어떻게 선을 악으로 갚으며, 졸라와 모파상을 만난 소녀가 어떻게 허영심과 순수함을 구별하지 못할 수 있단 말인가.     



라일라는 '나'이기를 기꺼이 포기한 순간 진정한 '나'를 만날 수 있고, 악착같이 움켜쥔 양 손의 힘을 뺀 순간 두 발로 땅 위에 설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연주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누군인지 알고 있었다. 내 왼쪽 귀 안쪽의 작은 뼈 하나가 부러졌다는 사실도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옛날의 그 검은색 자루, 새하얀 거리, 불길한 새의 잔뜩 쉰 울음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조라도, 아벨도, 들라예 부인도, 저프도, 도처에서 호시탐탐 노리고 뒤쫓고 그물을 치는 그 모든 사람들도, 나는 잊어버렸다.  -247쪽


 

허용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탐하고 취하는 사람들 속에서 라일라는 오히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고, 보호와 속박으로 포장된 사랑에 안주하지 않음으로써 자유로웠으며, 타인의 연민과 욕망의 시선에 굴복하지 않음으로써 홀로 설 수 있었고, 조건없는 도움과 선의에는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과 행복을 양보함으로써 보답할 줄 알았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어리고 약한 물고기에 불과했던 라일라는 마침내 길고 긴 여정을 마치고 자신이 태어난 고향으로 돌아간다.


 

더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리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275쪽



삶이란 누구에게나 떠나온 곳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아무도 돌아가는 길을 기억하지 못한다.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가 그옛날 그길을 따라 바다로 나갔었다는 걸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바다로 떠난 연어들이 모두 되돌아올 수 있는 건 아니듯 누구나 떠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고난을 극복한 ㅡ혹은 '선택(구원)'받은 ㅡ특별한 존재만이 귀향을 허락받는다. 


 

영국인 어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르 클레지오는 아프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서구적인 교육을 받기 위해 프랑스의 기숙학교로 보내졌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줄곧 아프리카와 남미 등지를 떠돌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에게 돌아갈 '그곳'은 어디일까? 아프리카일까? 프랑스일까? 아니면 영국일까? 작가의 이와 같은 체험은 낙인처럼 그의 정신 세계에 새겨져 그의 작품은 늘 '구원과 귀향 그리고 치유'라는 패턴을 갖는다. 



 『황금 물고기』의 라일라 역시 '유괴'라는 사건으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타향 등지를 헤매다가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1인칭 관찰자 시점처럼 읽힌다. 독자는 주인공인 라일라에게 동화되기보다는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나는 동행자이거나 목격자로서의 위치에 놓여진다.  

 

그래서 책이 끝나면서 라일라의 여정은 끝나지만 그녀와 함께 여행을 떠났던 독자로서의 나의 여정은 새롭게 시작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책을 읽기 전의 일상으로 되돌아가겠지만 그 일상 속의 나는 책을 읽기 전의 나와는 다른 나일 수밖에 없으리라. 여전히 나는 귀향 중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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