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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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올해는 최대한 고전을 많이 찾아 읽기로 작심한 바 있고,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1순위에 올라있었다. 사실, 이 작품은 중학생이던 시절(아마도 골딩이 노벨문학상을 타던 즈음일 것이다)  읽었고, 그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던 작품이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작품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만 또렷이 기억날 뿐, 어떤 내용이었는지 줄거리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꼭 읽어봐야지...'하고 결심만 십여년 이상을 해오던, 나와는 나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마침내 다시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고,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듯 거침없이 단 하루만에 완독했다.  

 

소년들이 불시착한 무인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는가 싶더니 인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맨 먼저, 앞으로 소년팀의 리더로 뽑히는 랠프와 그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돼지(필)'가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두명은 '소라'를 발견하고 줍는다. 천식을 앓는 '돼지(필)' 대신 랠프가 소라를 부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라를 불어 그윽한 소리를 뿜어올리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불시착한 아이들이 한명 두명씩 소라 소리를 듣고 모여든다. 작품 속에서 소라는 민주, 평등, 법과 제도를 상징한다.

 

만5살에서 12살로 이루어진 소년들은 처음엔 랠프를 지도자로 뽑고, 지나가는 배가 볼 수 있도록 산정에 불을 피우고 오두막집을 짓는 등 나름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섬 안에는 식용가능한 과일 열매들과 마실 물이 있어서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그러나 성가대의 리더인 잭 메리듀는 멧돼지 사냥에 집착하면서 소년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권력과 폭력 지향적인 인물로 악(惡)을 대표한다. 자신이 리더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팀을 분열시킨다. 초반부터 완력으로 필의 안경을 망가뜨리는가 하면 그나마 한쪽 알만 남은 안경마저 어둠을 틈타 급습하여 빼앗아간다. 힘과 폭력에 의지하여 인간 문명과 진보에 대항하고 이를 파괴하려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랠프를 따르던 소년들이 잭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이 왜 일어나는 걸까?

인간은 어째서 한순간에 악에 휘둘리고 어둠에 봉사하는 걸까?

 

소년들은 다들 이성적으로는 멧돼지를 잡는 것보다는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에 서서히 이성은 마비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덧 이성이 사라진 자리엔 본성이 소리없이 차올라 결국엔 사람마저 멧돼지처럼 사냥하는 폭력성을 보인다. 

 

처음에는 멧돼지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위해 얼굴에 바르던 진흙을 얼굴 뿐만 아니라 온몸에 색칠한 순간, 소년으로서 그들이 갖고 있던 호기심과 짓궂음은 피에 굶주린 잔인함으로 변해버린다.

 

낙하산을 타고 추락사한 시체를 괴물로 착각하고, 이 괴물에게 잡은 멧돼지의 머리를 재물로 받치는 장면 등은 초기 인류의 원시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하다. 그리고 괴물의 실체를 깨닫고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는 사이먼을 멧돼지로 인식(?)하여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은 인간 근원이 악인지 아니면 선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소년들이 전부 잭의 수하로 들어가버린 후, 랠프와 돼지(필)는 잭의 무리를 찾아가 마지막 남은 인간성에 호소해보지만, 그들의 기대는 가학성을 타고난 인물인 로저가 밀어낸 바윗덩이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내려오는 돌에 돼지(필)가 맞아 죽은 후, 숲속에 간신히 숨은 랠프를 잭 일당은 마치 멧돼지 사냥하듯 포위망을 쳐서 점점 좁혀온다. 유색의 진흙으로 온몸을 색칠한 잭 일당은 살기등등하여 랠프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이건, 더 이상 놀이도 사냥도 아니었다.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랠프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 숨 가쁘게 달려오던 작품은 거칠지만 드라마틱하게 막을 내린다.  

 

사이먼은 죽고ㅡ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메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소년들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인 장교는 오히려 약간 난처해했다. 그는 그들이 기운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외면을 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뜻한 한 척의 순양함에 눈길을 보내며 그는 기다렸다.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p303-

 

 

윌리엄 골딩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교사로서 남학생들의 또래문화와 집단행위를 관찰했을 것이고, 군인으로서 전쟁의 참상과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의 위력을 보면서,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이란 언제든지 한순간에 야만성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걸 꿰뚫어보지 않았나 싶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집단 무의식'에 매몰되어 문명을 상실하고 야만으로 회귀하는 과정은 원시성에 입각한 인간성(공포, 두려움, 질투, 과시, 지배욕 등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한 인류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짐승으로 추락했던 소년들은 섬을 찾은 해군과 순양함에 의해 구조되어 다시 인간 문명의 세계로 되돌아오지만, 해군과 순양함으로 상징되는 전쟁지향적 인류는 과연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보물섬> 등으로 대변되는 모험소설로부터 모티브를 따왔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모험소설이 아닌 인류 문명에 대한 세기말적 예언서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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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자
실비아 플라스 지음, 공경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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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정말 최선입니까?"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온 탄식이었다. 

이 말을 유행시킨 드라마는 정작 보지도 못했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 말이 나왔을까? 

 

 

비운의 천재 여류 시인으로 알려진 실비아 플라스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 직전, 자전적 소설 <벨 자>를 남겼다. 이 작품은 '죽기전에 꼭 읽어야 할 1001권 책 중 한권'이며, '가장 빼어난 첫문장으로 시작하는 명작'으로 손꼽힌다.

 

 

작품명 '벨 자(bell jar)'는 실험용 진공 용기를 말하며, 작품 속에서는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사회적 관습을 상징한단다.  

 

 

줄거리는 '특기가 장학금과 상 타기'일 정도로 어렸을때부터 다재다능했던 여대생 에스더 그린우드가 공모전에 당선되어 잡지사 수습사원으로 여름 한달을 뉴욕에서 보내는 전반부와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온 후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극심한 신경쇠약에 걸렸다가 일상으로 되돌아 오는 과정을 그린 후반부로 나뉜다.

 

 

 

 

 

'출세와 부의 상징' 뉴욕이라는 도시는 저자인 실비아 플라스와 주인공인 에스더 그린우드 모두 선망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짧은 머뭄은 권태와 부조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말하겠지.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보라니까. 십구년간 촌구석에서 살면서 잡지 한 권 못 사 볼 형편이었던 여자애가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가더니 이런저런 상을 받고 결국 뉴욕을 휩쓸고 다니네."

하지만 난 휩쓸고 다니지 못했다. 내 자신조차 마음대로 못했다. 호텔에서 사무실로, 파티장으로, 파티장에서 호텔로, 다시 사무실로 멍청한 무궤도 전차처럼 다닐 뿐. 다른 여자애들처럼 들떠서 지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마음이 가라앉고 공허한 느낌이었다. 주위가 소란한 가운데 둔하게 움직이는 폭풍의 눈 같다고 할까.

 

-실비아 플라스, <벨 자>p 11 中-

 

 

이 나이 또래가 대부분 그러하듯, 세상에 대한 냉소와 치기로 가득하다.

 

 

 

뭔가 내 인생은 특별할 것만 같고...

나 아닌 타인의 삶을 관조할 여유가 없으며...

세상은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대로 움직여줘야 하는 곳이다...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는 낯선 뉴욕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 무엇이 그녀를 화나게 했고, 그 누가 그녀를 엇나가게 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순결에 대한 의무와 이성에 대한 관심 사이에서 혼란스러워하고...

또래와 자신을 비교하며 동질감 속에서 자신만의 특별함을 추구하는 모순된 성향과....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엄마를 향한 이유 없는 반발들...

그리고, 자신의 삶을 하찮게 여기는 젊음 특유의 가벼움까지... 

 

 

작가 또한 이런 주인공(혹은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열아홉 시절, 내게는 순결이 가장 큰 화두였다.

세상을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 백인과 흑인, 남자와 여자로 나누지 않고, 섹스를 해본 사람과 해보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었다. 그것만이 사람과 사람을 가르는 분명한 기준인 것 같았다. 

 

 

-실비아 플라스, <벨 자>p 113 中-

 

 

 

내 눈에 이런 주인공의 모습은 사춘기를 다소 심하게 앓는 소녀처럼 보인다. 십대와 작별하고 성인으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혹독한 '성인식'을 거쳐야 한다. 성인식이란, 아이로서 자신의 유치함과 한계를 자각하고 더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서 어른으로서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을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이기 쉽다. 특히, 십대 시절 유난히 자의식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성인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하는 유년기와의 작별을 거부한다. 

 

 

이 작품은 전형적인 성장소설이다.

다만, 자전적인 요소가 너무 많아서 서른이라는 나이에 스스로 삶을 마감한 작가의 삶과 결합되어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 해석된 감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안타깝게도,

작품속 주인공 에스더 그린우드는 정신병원에 입원했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퇴원을 하지만, 저자인 실비아 플라스는 서른이라는 짧은 삶을 극단적으로 마무리했다. 어린 딸과 아들을 남겨둔 채...

 

 

그녀에게 묻고 싶다.

"이게 정말 최선입니까?"

 

그녀의 대답을 듣고 싶고, 그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작품에 희망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뛰어난 시들과 소설 작품을 남겼다면 최소한 남은 이들에게 '이별'의 이유만이라도 알려줘야하지 않겠는가?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그렇게 발버둥치다 떠났다면, 최소한 그 몸부림의 흔적에 새겨진 의미만이라도 남겨야하지 않겠는가?

 

 

 

부디, 이 작품을 통해 그녀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더랬는데... 

그녀의 생각과 느낌과 호흡까지도 공감하고 싶었는데...

그래야지만이 그녀를 마음껏 애도하고 영원히 기릴 수 있을 것 같았더랬는데...

 

아쉽게도,

나의 기대와 희망은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겨진 채, 작별을 고해야 할 것 같다.

 

 

굿바이! 실비아 플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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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이 부르는 소리 잭 런던 걸작선 4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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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접한 명작이다.

1876년 출생한 잭 런던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발달로 배금주의가 난무한 미국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표현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야성이 부르는 소리>는 알레스카로 금을 캐기 위해 모여든 인간 군상을 따라 썰매끌이로 팔려온 '벅'이라는 '개의 시선'으로 쓰인 작품이다. 

 

캘리포니아 남쪽의 대저택에서 한가롭게 살던 네살배기 벅은 세인트버나드종인 아빠와 셰퍼트종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러 판사의 집에서 '왕'처럼 지내던 벅의 삶은 정원사의 조수인 매뉴얼에 의해 단돈 100달러에 팔려가면서 말 그대로 거친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다.

 

개몰이꾼들의 몽둥이질과 다른 개들의 엄니(어금니) 앞에서 벅은 서서히 잠재되어 있던 야성을 되살린다.

 

벅의 첫도둑질은 그가 험난한 극지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격자임을 말해주었다. 적응력,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이 부족하면 당장에 무참히 죽을 수 있다. 이는 또한 무자비한 생존 싸움에서는 허영이자 약점에 불과한 벅의 도덕성이 부패하고 산산조각났다는 뜻이다.

 

-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p35 中-

썰매팀의 교활한 리더 스피츠...

애꾸눈 솔렉스...

썰매개답게 최후를 맞이하는 데이브...

등등... 다른 썰매개들과 어울리면서 벅은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의 법칙 즉, 생존의 법칙을 깨닫는다.

 

개의 시선으로 쓰여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사람과 개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생과 사를 가르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는 사람도 개도 그저 매순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명체일 뿐이다.

 

썰매끌이 개로서 자신의 임무에 자부심을 느끼던 데이브의 최후는 인간과 동물(개)을 나누는 기준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둘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데이브는 너무나 약해져서 썰매를 끌다가 몇 번이나 쓰러지곤 했다. 그러자 스코틀랜드계 인디언 혼혈은 썰매를 멈춘 뒤 데이브를 팀에서 빼내고 솔렉스를 앞자리에 세우려했다. 그의 의도는 데이브가 쉴 수 있도록 썰매 뒤에서 자유롭게 달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픈데도 데이브는 썰매끈이 풀리는 동안 자신이 쫒겨나는 것에 분개하여 투덜거리고 으르렁댔고,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를 솔렉스가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는 상심하여 낑낑거렸다. 썰매를 끄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기 때문에,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도 녀석은 다른 개가 제 일을 하는 것을 못 견뎌했다. (중략)

 

데이브는 썰매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편이 편할 텐데도, 한사코 그렇게 하지 않고 훨씬 가기 힘든 부드러운 눈을 밟고 허우적거리며 달리다 끝내 녹초가 되었다. 녀석은 쓰러졌고, 그렇게 쓰러진 채로 긴 썰매 행렬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갈 때 애처롭게 울부짖었다.(중략)

 

개몰이꾼은 당황했다. 그의 동료들은 개들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거부당했을 때 얼마나 상심하는지에 대해, 너무 늙어 일을 못하거나 부상을 당한 개들이 썰매팀에서 밀려난 것 때문에 죽은 사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그들은 데이브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썰매를 끌다 마음 편히 죽게 해주는 것이 인정을 베푸는 일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데이브는 다시 썰매끈을 차게 되었고, 내상의 고통으로 무심결에 몇 번이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전처럼 자랑스럽게 썰매를 끌었다. 녀석은 몇 번이나 쓰러져 질질 끌려갔고, 한번은 썰매와 부딪혀 그 뒤로는 뒷다리 하나를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데이브는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텼고, 개몰이꾼은 불 옆에 녀석의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튿날 아침 데이브는 너무 약해져서 썰매를 끌 수 없었다. 썰매끈을 채울 시간이 되자 녀석은 개몰이꾼에게 기어가려 애썼다. 필사의 노력으로 겨우 일어섰지만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러자 녀석은 동료들이 썰매끈을 차고 있는 쪽으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갔다. 녀석은 앞발을 내밀었다가 몸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고, 다시 앞발을 내밀어 몸을 확 끌어당겨 조금씩 나아갔다. 그러나 힘이 완전히 소진됐다. 동료들은 눈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들 곁으로 오고 싶어하는 데이브를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강가의 삼림 지대 뒤로 사라질 때까지도 녀석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갑자기 썰매 행렬이 멈췄다. 스코틀랜드계 혼혈이 방금 떠나온 야영지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는 서둘러 돌아왔다. 채찍이 날리고 방울이 경쾌하게 울리자 썰매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그러나 강가의 삼림 지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벅도 알았고, 다른 개들도 알았다.

 

-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p69~72 中-

 

나는 존 손턴과 벅 사이에 흐르는 신뢰와 사랑보다도 데이브가 보여준 이 마지막 장면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인간과 교감하는 개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존 숀턴에게 보여준 벅의 신뢰와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주인에 대한 애완동물의 헌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반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썰매를 끌려고 했던 데이브의 모습은 본능을 뛰어 넘는 행위라 하겠다.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주인에 대한 보답(give and take)으로써의 사랑과 헌신이 아닌, 자기 존재(삶)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추구하고 부여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차원에까지 접근했다고 한다면 인간에 대한 모욕일까?

 

저자인 잭 런던 역시 벅의 손턴을 향한 유난한 사랑을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문명의 증거'로 봤다. 문명과 본능(야생) 사이를 오가던 벅은 손 턴이 죽자 미련없이 문명의 세계를 떠나 야생의 세계로 들어선다.

 

벽난로와 지붕에서 태어난 성실함과 헌신도 그의 본성이었지만, 그는 야성과 교활함도 잃지 않았다. 손턴의 불 옆에 앉아 있는 벅은 대대로 인간의 문명에 길들여진 따뜻한 남쪽 지방의 개라기보다는 야생의 세계에서 온 야생개였다.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인의 물건을 훔치지는 않았지만, 다른 야영지에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은 아무럽지 않게 훔쳤다. 아주 약삭빠르게 훔쳐서 들키는 법도 없었다. - p99 中-

 

벅은 온종일 웅덩이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거나 야영지를 초조하게 배회했다. 죽음이란 움직임의 정지이자 살아 있는 삶과의 이별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존 손턴이 죽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죽음은 벅에게 허기와 유사하지만, 쓰리고 또 쓰리고 먹을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공허함을 남겼다. 벅은 이따금씩 멈춰서서 이하트족의 시체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 고통을 잊곤 했다. 그럴 때면 자신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대단한 자부심-을 자각했다. 그는 삼라만상의 가장 고귀한 사냥감, 즉 인간을 죽였고,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에 맞선 것이었다. 벅은 호기심에 차서 시체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들은 너무 쉽게 죽었다. 허스키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웠다. 화살과 창과 몽둥이만 없으면 그들은 적수가 되지 안았다. 그 후로 벅은 인간들의 손에 화살과 창과 몽둥이가 쥐어있지 않는 한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 p134~135 中-

 

 

한 세기 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사실적이고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야성)과 인간(문명) 세계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잭 런던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최근에서야 알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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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큘라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65
브램 스토커 지음, 이세욱 엮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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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뱀파이어(흡혈귀) 물 중, 고전 중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작품이다. 

1897년도에 발표된 이 작품은 순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발칸 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던 '불사귀(不死鬼)' 전설에 15세기 루마니아에 실존했던 블라드 체페슈라는 영주를 모티프로 한다.

'드라큘'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던 그는 오스만투르크제국의 공격을 막아낸 용감한 장수였지만 군법이나 법을 어긴 병사와 민간인들을 잔인한 방법으로 벌주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번역자(이세욱)에 따르면, 동유럽 발칸 지역은 서유럽에 비해 기독교의 수용이 수백년이나 뒤늦게 시작되었지만 그 과정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었단다. 그래서 동유럽 사람들 특히 슬라브인들이 조상 대대로 믿어왔던 토속 민간 신앙을 채 정리하기도 전에 기독교가 밀려들어오면서 기존의 전통과 신흥 종교가 충돌하게 되었고, 이런 현상이 가장 심했던 지역이 바로 작품 속에서 드라큘라 백작의 고향으로 나오는 트란실바니아 지방이었단다.

 

작품은 조너선 하커라는 신참 변호사가 영국에서 저택을 구입한 고객 드라큘라 백작에게 법률 서비스를 하기 위해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방에 있는 백작의 성(城)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괴기소설답게 긴장감 있게 전개되는 도입부분은 자연스럽게 에드가 앨렌 포의 <어셔가의 몰락>을 떠올리게 만든다. 찾아보니, 역시나 <어셔가의 몰락>이 50여년이나 앞선, 1839년에 발표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브램 스토커는 작품 속 등장인물들 중 한명에게 '아서(어셔)'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드라큘라>를 포함하여 17편의 작품 대부분이 공포 추리물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스토커가 그만큼 이쪽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는 뜻이고, 그렇다면 당연히 포의 작품도 애독 내지는 탐독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추측일 뿐이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스토커가 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이야기는 주요 등장인물 여섯 명 중, 조너선 하커와 미나 하커 부부 그리고 정신과 의사인 존 수어드 박사의 일기를 통해 전개된다. 이들은 펜으로 종이에 기록할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엔 새로운 발명품이었을 타자기와 축음기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1인칭 주인공 시점이지만 하나의 사건에 대해 세 사람의 일기가 번갈아가며 나열되어 있어, 마치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과 같은 효과가 있다.  이 밖에도 브램 스토커는 '일기(기록)' 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그 당시 영국 신사라면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기 절제와 반성(되돌아보기) 그리고 지성의 추구라는 시대적 가치관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인진 모르지만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한 망자(亡者)가 밤마다 무덤에서 나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피를 마신다는 발칸 지방의 민간설화가 지금처럼 널리 알려진 뱀파이어 법칙(?)을 형성하게 된 데에는 18세기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영국(서유럽)과 그들이 믿는 기독교의 영향 때문이었다.

 

소위, '뱀파이어 법칙'이란,

일출에서 일몰사이에는 그들은 주로 은신처(관 속)에서 죽은 듯이 휴식을 취하고, 해가 진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며, 신선한 피를 마시기 위해 살아 있는 사람들을 찾아 나선다. 그렇다고 해서 흡혈귀들이 아무나 공격할 수 있는 건 아니고 처음에는 반드시 사람의 초대를 받아야만 (집)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참고로, 영화로도 만들어져 인기를 얻은 바 있는 <렛미인> 이라는 작품이 이런 흡혈귀들의 습성을 가장 잘 이용한 것 같다. 

 

한편, 일단 흡혈귀에게 물린 사람은 흡혈귀를 '주인님'으로 모시면서 서서히 흡혈귀로 변해간다. 그리고 (존 수어드 박사의 환자인 동물탐식증에 걸린 렌필드를 드라큘라 백작이 조정했듯이) 일부 사람들은 흡혈귀에 의해 손쉽게 조정된다. 이들은 또한 신출귀몰하고 자연현상이나 짐승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들개나 다른 것들로 변신할 수도 있다. 

 

흡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으로는 햇빛, 마늘, 십자가, 성체 등등으로 하나같이 기독교의 상징물들이다. 이 점만 보더라도 19세기 후반에 쓰여진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을 필두로, 그후 100여년 넘게 재창조(?)된 뱀파이어 작품들이 결국은 '토속 신앙(기타 종교포함)에 대한 기독교의 압도적 승리'라는 일관된 주제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주인공들은 역마차와 전차, 기차 및 화물여객선 등을 자유롭게 이용할 뿐만 아니라 전화와 전보 그리고 축음기와 타자기 등등 당시 신기술에 의한 발명품들을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이성과 지성 및 과학적 탐구'로 대표되는 19세기 영국 빅토리아의 시대성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의사이자 변호사인 반 헬싱 선생을 비롯해서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부유하고 정의로우며 영국 신사 숙녀로서 일말의 손색도 없다. 이 점 역시 19세기 후반 영국인이 추구하던 가치관이 아닐까 싶다. 특히, 이름이 '믿음의 아버지'라는 뜻인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인 아브라함 반 헬싱 선생이야말로 선으로 악을 물리칠 수 있다는 신념과 용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과학적 지식과 지성을 갖춘 인물로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겠다. 미국인인 퀸시 모리스는 드라큘라 백작을 물리치는 마지막 순간에 죽음으로써 그 당시 미국인은 신대륙을 개척했으며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최강국으로 세계 질서을 새롭게 만들어가던 영국은 하루가 다르게 경제가 발달하고 사회질서가 재편되고 현대화되어가는 동시에 추리공포문학이 싹트고 발전하는 가장 좋은 터전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샤록 홈즈의 코난 도일과 애거사 크리스티가 모두 영국인이라는 점 역시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렸던 영국인들은 도대체 왜 공포 추리소설에 열광한 걸까?

 

브램 스토커의 <드라큐라> 역시 흡혈귀인 백작이 수 백년 동안 머물던 자신의 안식처를 떠나 영국으로 잠입해 들어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무려 동시에 3명의 남자로부터 청혼을 받은 매혹적인 여성인 루시를 첫번째 희생양으로 삼아 새로운 흡혈귀를 만들어내고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비록, 여섯명(이중 한명은 여성이다.)의 용감한 인물들에 의해 계획이 좌절되어 다시 고향 트란실바니아로 돌아가려다가 결국은 최후를 맞이하지만...

이처럼 영국인들은 어째서 나날이 부강해지고 발전하는 자신들의 영토 위에 흡혈귀가 출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걸까?

 

공포문학은 역설적이게도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고 경제적으로 윤택한 사회에서 유난히 발달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사회의 변화 속도를 당대인들이 따라가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감과 과거와 현대 사이의 정신적 간극으로 인해 생겨난 사회 부조리 현상들이 만연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인들은 이와 같은 심리적 불안전한 상태를 공포와 추리 소설을 통해 해소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 탄생을 단순히 토속 신앙에 대한 기독교의 절대적 승리만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작품 속에서 드라큘라 백작 뿐만 아니라 백작의 성에 감금되어 있을 때 조너선이 마주쳤던 세 명의 젊은 여성들 또한 수려한 미모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후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흡혈귀들은 성적인 매력이 더 한층 강조된다.

 

영원한 젊음과 어딘지 모르게 남다른 매력과 인간보다 더 강하고 인간적인 흡혈귀들이 출현하고 있다.

 

이제 '흡혈귀'는 공포를 통해 사회 부조리 현상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을 극복하려는 부산물이라기보다는 소비 지향적이고 외모 지상주의인 현대사회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된 듯 하다.

 

'거울'이라는 단어가 나와서 떠올랐는데, 드라큘라 백작의 성에 처음 도착했을때 조너선은 그 넓은 성 어디에서도 거울을 찾을 후 없어 면도를 하는데 애를 먹는다. 

 

잘 알다시피, 흡혈귀는 거울에 비춰지지 않는다. 이는 흡혈귀가 살아있는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좁은 틈 속으로 홀연히 사라지는가 하면 연기처럼 공중 위로 날아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흡혈귀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허상 즉 인간의 마음 속에 자리한 상상에 불과할 뿐임을 의미한다. 연기나 빛이 거울에 비춰 보이지 않는 것처럼...

 

 

그동안 우리가 접해왔던 현대 뱀파이어 물들은 하나같이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에 빚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이 작품을 고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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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3 (보급판) - 두 개의 탑 1
존 로날드 로웰 톨킨 지음, 이미애 외 옮김 / 씨앗을뿌리는사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드디어 <반지의 제왕>을 다 읽고 영화도 봤다.

꼬박 한달 걸린 것 같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확실히 읽기 전과 읽은 후의 '나'는 분명 달라졌으리라. 마치 프로도에게 간달프가 원정을 떠나면 돌아올지 어떨지 장담할 순 없지만 만약 돌아온다면 떠나기전과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라는 말처럼...

 

우선, 번역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1편 '반지원정대'와 2편 '두 개의 탑'에 해당되는 1권부터 4권까지는 황금가지 출판사(번역 한기찬)에서 출간되었으나 3편인 '왕의 귀환'은 어찌된 영문인지 출판사(씨앗을 뿌리는 사람들)도 역자(김번, 김보원)도 바뀌어 있었다. 양자의 우열을 가리기에 앞서, 고유명사가 통일성있게 번역되지 않아 어리둥절했다. 예를 들면, '이센가드'를 '아이센가드'로 '중원'을 '가운데 땅'으로 '흑기사'를 '어둠의 기사로 옮긴 것 등은 그나마 유추가 가능하다지만 '아르고르(순찰자)'를 '성큼걸이'로 '실롭(왕거미)'을 '쉴로브' 등으로 옮긴 이유는 뭘까? 시리즈 중, 전편 번역본이 있다면 후편 시리즈 번역작업할 때 전편 번역본을 먼저 확인해봐야 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행히도, 최근 출판사 한곳에서 반지의 제왕 시리즈 전편을 번역 출판했다고 한다. 나처럼 2000년대 초반 두곳의 출판사에서 1~4권과 5~7권으로 나눠 출판된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읽으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좋을듯...)

 

제3편 <왕의 귀환>은 절대반지의 파괴와 곤도르의 왕 귀환 그리고 샤이어의 상황과 그 뒷 이야기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제 막 악의 세력을 물리친 간달프(알고보니, 그는 악을 막기 위해 중간계로 보내진 5명의 使子 중 한명이었다.)일행은 그의 지략으로 프로도와 샘이 절대반지를 모르도로의 용암 속으로 던져넣을 수 있도록 사우론의 시선을 끌기 위한 전투를 펼친다. 

 

그 사이 오르크족에게 잡혔던 프로도는 샘에 의해 구출된 후, 계속해서 전진하여 마침내 사우론 영토의 심장부인 삼마스 나우르에 도착한다. 절대반지를 용암 속에 던져넣어야 하는 순간, 절대반지에게 지배된 프로도는 샘이 보는 앞에서 "절대반지는 이제 내 것이야!"라고 외치며 사라져버린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골룸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속에서 몸부림을 치는가 싶더니 골룸의 어금니사이로 번득이는 무엇인가가 언뜻 스치는 순간 손을 부여잡은채 쓰러진 프로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절대반지에 집착한 골룸이 반지를 끼고 사라져버린 프로도의 손가락을 깨물어 뜯은 것이다. 그런데 그만 기쁨에 겨워 반지를 손에 들고 날뛰던 골룸이 용암속으로 반지와 함께 떨어지고 만다. 영화에서는 프로도가 골룸을 떠밀어 떨어뜨리지만 원작에서는 골룸이 혼자 날뛰다가 스스로 미끄러 떨어진다. (영화 1~2편을 거치며 이미 영웅의 이미지로 떠오른 프로도의 마지막 모습을 나약하게 묘사하지 않으려는 감독의 고민과 배려가 엿보인다.)

 

때마침 독수리를 타고 나타난 간달프(미스란디스)에 의해 프로도와 샘은 무사히 구출된다. 아르곤은 곤도르의 왕이 되어 엘론드의 딸인 요정 에오웬과 결혼을 하고 에오메르는 로한을 통치하며 파라미르는 아르곤에 의해 영주로 임명된다.

 

다시 뭉친 네명의 호빗족은 고향 마을 샤이어로 돌아가는데...

샤이어가 가까워질수록 분위기가 심상찮음을 느낀다. 알고보니, 사루만이 샤이어에까지 악의 손을 뻗친 것이었다. 샤이어 호빗들은 샤르키라고 불리우는 우두머리를 섬기는 나쁜 무리들에 의해 지배받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도와 샘, 메리와 피핀은 전쟁터에서의 용맹을 다시 한번 발휘하여 호빗들을 봉기시켜 악의 세력을 무찌른다. 마침내 샤르키를 붙잡고 보니, 그는 다름 아닌 사루만과 뱀혓바닥(그리마)이었다!  그를 죽이려는 순간, 악을 악으로 막지 말고 선으로 막아야 한다며 프로도가 말려 사루만은 간신히 목숨을 지키지만 뱀혓바닥의 배반으로 결국 그의 손에 죽는다. 이리하여 미스란디스(간달프)와 함께 중간계를 지키기 위해 파견되었던 다섯 명의 마법사 중 하나인 사루만이 최후를 맞이하고 만다.

 

샘이 골룸을 죽이려고 했을 때도 그렇고 사루만의 목숨을 지켜준 것도 그렇고 프로도의 행동을 통해 엿본 톨킨의 세계관은 명확해보인다. 톨킨이 살았던 시대는 1,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였다. 그에게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킨 제국주의 열강들의 모습은 마치 중간계의 각 종족들이 '보물'과 '반지'를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것과 흡사하지 않았을까?

 

이런 점에서 볼면, 톨킨은 분명 반전(反戰) 평화주의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서양과 백인 위주의 세계관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남성우월주의와 신분계급사회를 당연하게 여긴 인물이기도 하다. 

 

부록을 통해 제1시대와 제2시대 그리고 제3시대의 주요 사건들과 인물들 그리고 생몰연도까지 자세하게 기록된 가계도를 만들만큼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세세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톨킨은 여성에게는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평범한 인물일지라도 영웅이 될 수 있으며 오히려 평범하기 때문에 영웅이 될 수 있다는 열린 세계관과 역사관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범한 인물의 절반이 여성이라는 점은 끝끝내 간과하고 말았다.

 

잘 알다시피, <반지의 제왕> 속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름 있는 인물도 많지만 이름 없는 인물들이 훨씬 더 많다. 그런데 그중 이름이 부여된여성등장인물은 고작 세네명에 불과하다. 꼽아보자면, 요정 여왕인 갈라드리엘과 엘론드의 딸 에오윈 그리고 로한의 공주 아르웬이 전부다. 그나마 갈라드리엘을 제외하면 에오윈과 아르웬은 주로 남자 주인공을 빛내줄 '짝'으로써의 역할이 강조될 따름이다. (아, 참! 나중에 샘과 결혼하는 호빗족 로지도 있었지...)

 

만약, 이 작품이 영웅이 등장하는 신화의 세계를 다루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인류 신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문외한의 변명일 뿐이다. 

 

잘 알려져있다시피, 영웅 신화의 원형을 살펴보면 인류 최초의 신은 여성이었다. 초기 인류는 여성의 생식능력을 무엇보다도 신비롭고 높게 평가했으며 이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잉여생산물이 생기고 이를 지배한 우두머리가 나타나면서 힘의 우열에 따른 역사가 펼쳐지고... 이 과정에서 힘으로 권력을 쟁취한 남성지도자들이 의도적으로 인류 신화에서 여성을 배제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성이 우위를 갖춘 분야라 할 수 있는 전쟁과 싸움에만 초점을 맞춘 신화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반지의 제왕> 역시 이와 같은 남성주의적 세계관의 확장 혹은 전형이라고 봐야 한다. 다만, 한 사람이 만들어냈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방대한 이야기와 배경 등은 분명 놀라움을 자아내며, 무엇보다도 그가 창조해낸 세계 속에서 후대 사람들에 의해 또 다른 이야기들이 잉태되고 성장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그는 분명 위대한 일을 했다고 평가받을 만하다.  

 

 

한편, 프로도와 골룸 그리고 샘이라는 세개의 캐릭터를 놓고 봤을 때 나의 마음을 마지막 순간까지 부여잡았던 인물은 단연 샘과 골룸이다. 주인공인 프로도 배긴스는 삼촌이자 자신보다 먼저 원정에 나섰다가 돌아온 빌보 배긴스와 같은 선상에 놓인 인물로 봐야한다. 즉, 절대반지에 대한 욕망과 욕구에서 완벽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정원사로서 프로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샘은 원정대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행동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깨닫지도 부여하지도 못한다. 그에게 원정이란 그저 '주인님(프로도)을 잘 모시고 따르기 위한 것'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이런 그의 모습은 분명 영웅적인 행동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전근대적인 신분제 사회의 가치관을 옹호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마지막으로 골룸(스메아골)이다. 

골룸은 이중인격과 자아가 분열된 존재로 '선'과 '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절대반지(권력과 물질)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타락해버린 인물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이런 골룸의 모습이야말로 이타심과 이기심 사이에서 매순간 선택을 해야하는 인간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 절대반지를 파괴한 인물도 다름아닌 골룸이다. 만약, 골룸이 없었더라면 프로도는 마지막 순간에 절대반지에 대한 욕망을 이겨내고 반지를 용암 속으로 던져넣었을까? 아니면, 프로도 주인님을 목숨 걸고 지켜왔던 샘이 주인님의 명을 어기고 그로부터 반지를 빼앗아 대신 파괴시켰을까? 피터 잭슨 감독 역시 이와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기쁨에 미쳐 날뛰는 골룸을 원작과는 달리 프로도가 밀어떨어뜨리게 만든 것이리라. 

 

 

1편(반지 원정대)과 2편(두 개의 탑) 모두 영화와 원작이 약간씩 차이가 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이야기 흐름이나 극적인 효과를 위한 작은 차이일 뿐 원작의 내용을 바꾸거나 누락시킨 부분은 거의 없었던 것에 반해 3편(왕의 귀환)은 원작에서 다룬 '샤이어 전투' 부분을 통째로 누락시켜 아쉬웠다. 아이센가드에서 쫓겨난 사루만이 샤이어까지 흘러 들어와 악의 손길을 뻗치다가 결국 고향으로 되돌아온 호빗들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는 내용인데...

 

빌보 배긴스와 빌보 프로도는 회색항구를 떠나 서쪽으로 가는 요정들과 동행함으로써 요정의 세상이었던 제3시대가 막을 내리고, 또한 배긴스家의 이야기 역시 마무리되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한편 앞으로 도래할 제4시대는 곤도르왕국을 중심으로 한 인간의 세상이자 샤이어의 호빗인 샘 와이즈 감지家의 이야기가 펼쳐질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요정들에게 주어졌던 3개의 반지인 빌랴, 네냐, 나랴는 각각 엘론드, 갈라드리엘 그리고 간달프가 갖게 된다.)

 

 

분명, 재밌고 놀라운 작품이다.

나 역시 <반지의 제왕>과 함께 했던 지난 한달 동안 매우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러나 많이 즐기고 좋아했기에 그만큼 안타까움과 아쉬움도 크다.

 

작품을 즐기는 내내 많은 것들을 생각했고...

또 앞으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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