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성이 부르는 소리 잭 런던 걸작선 4
잭 런던 지음, 곽영미 옮김 / 궁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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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접한 명작이다.

1876년 출생한 잭 런던은 19세기 후반, 자본주의의 극단적인 발달로 배금주의가 난무한 미국의 사회상을 날카롭게 표현한 작가로 유명하다. 그의 대표작인 <야성이 부르는 소리>는 알레스카로 금을 캐기 위해 모여든 인간 군상을 따라 썰매끌이로 팔려온 '벅'이라는 '개의 시선'으로 쓰인 작품이다. 

 

캘리포니아 남쪽의 대저택에서 한가롭게 살던 네살배기 벅은 세인트버나드종인 아빠와 셰퍼트종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밀러 판사의 집에서 '왕'처럼 지내던 벅의 삶은 정원사의 조수인 매뉴얼에 의해 단돈 100달러에 팔려가면서 말 그대로 거친 세상 밖으로 내던져진다.

 

개몰이꾼들의 몽둥이질과 다른 개들의 엄니(어금니) 앞에서 벅은 서서히 잠재되어 있던 야성을 되살린다.

 

벅의 첫도둑질은 그가 험난한 극지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적격자임을 말해주었다. 적응력,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이었다. 그런 능력이 부족하면 당장에 무참히 죽을 수 있다. 이는 또한 무자비한 생존 싸움에서는 허영이자 약점에 불과한 벅의 도덕성이 부패하고 산산조각났다는 뜻이다.

 

-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p35 中-

썰매팀의 교활한 리더 스피츠...

애꾸눈 솔렉스...

썰매개답게 최후를 맞이하는 데이브...

등등... 다른 썰매개들과 어울리면서 벅은 법과 질서가 통하지 않는 또다른 세상의 법칙 즉, 생존의 법칙을 깨닫는다.

 

개의 시선으로 쓰여진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인 작품을 읽다보면, 어느 순간 사람과 개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생과 사를 가르는 극단적인 환경 속에서는 사람도 개도 그저 매순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생명체일 뿐이다.

 

썰매끌이 개로서 자신의 임무에 자부심을 느끼던 데이브의 최후는 인간과 동물(개)을 나누는 기준이란 과연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리고 그 둘을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몇 번을 다시 읽어도 감동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데이브는 너무나 약해져서 썰매를 끌다가 몇 번이나 쓰러지곤 했다. 그러자 스코틀랜드계 인디언 혼혈은 썰매를 멈춘 뒤 데이브를 팀에서 빼내고 솔렉스를 앞자리에 세우려했다. 그의 의도는 데이브가 쉴 수 있도록 썰매 뒤에서 자유롭게 달리게 하려는 것이었다. 아픈데도 데이브는 썰매끈이 풀리는 동안 자신이 쫒겨나는 것에 분개하여 투덜거리고 으르렁댔고, 자신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켜온 자리를 솔렉스가 차지하는 모습을 보고는 상심하여 낑낑거렸다. 썰매를 끄는 것이 그의 자부심이었기 때문에,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도 녀석은 다른 개가 제 일을 하는 것을 못 견뎌했다. (중략)

 

데이브는 썰매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편이 편할 텐데도, 한사코 그렇게 하지 않고 훨씬 가기 힘든 부드러운 눈을 밟고 허우적거리며 달리다 끝내 녹초가 되었다. 녀석은 쓰러졌고, 그렇게 쓰러진 채로 긴 썰매 행렬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지나갈 때 애처롭게 울부짖었다.(중략)

 

개몰이꾼은 당황했다. 그의 동료들은 개들이 비록 죽는 한이 있어도 일을 거부당했을 때 얼마나 상심하는지에 대해, 너무 늙어 일을 못하거나 부상을 당한 개들이 썰매팀에서 밀려난 것 때문에 죽은 사례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또한 그들은 데이브가 어차피 죽을 목숨이니 썰매를 끌다 마음 편히 죽게 해주는 것이 인정을 베푸는 일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데이브는 다시 썰매끈을 차게 되었고, 내상의 고통으로 무심결에 몇 번이고 비명을 지르면서도 전처럼 자랑스럽게 썰매를 끌었다. 녀석은 몇 번이나 쓰러져 질질 끌려갔고, 한번은 썰매와 부딪혀 그 뒤로는 뒷다리 하나를 절뚝거리며 걸었다.

 

그러나 데이브는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버텼고, 개몰이꾼은 불 옆에 녀석의 잠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이튿날 아침 데이브는 너무 약해져서 썰매를 끌 수 없었다. 썰매끈을 채울 시간이 되자 녀석은 개몰이꾼에게 기어가려 애썼다. 필사의 노력으로 겨우 일어섰지만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러자 녀석은 동료들이 썰매끈을 차고 있는 쪽으로 벌레처럼 천천히 기어갔다. 녀석은 앞발을 내밀었다가 몸을 앞으로 확 끌어당겼고, 다시 앞발을 내밀어 몸을 확 끌어당겨 조금씩 나아갔다. 그러나 힘이 완전히 소진됐다. 동료들은 눈 속에서 숨을 헐떡거리며 자신들 곁으로 오고 싶어하는 데이브를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강가의 삼림 지대 뒤로 사라질 때까지도 녀석이 애처롭게 우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갑자기 썰매 행렬이 멈췄다. 스코틀랜드계 혼혈이 방금 떠나온 야영지로 천천히 되돌아갔다. 사람들의 얘기 소리가 뚝 그쳤다. 그리고 한 방의 총성이 울렸다. 그는 서둘러 돌아왔다. 채찍이 날리고 방울이 경쾌하게 울리자 썰매들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그러나 강가의 삼림 지대 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벅도 알았고, 다른 개들도 알았다.

 

- 잭 런던, <야성이 부르는 소리> p69~72 中-

 

나는 존 손턴과 벅 사이에 흐르는 신뢰와 사랑보다도 데이브가 보여준 이 마지막 장면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사실, 인간과 교감하는 개의 이야기는 드물지 않다. 존 숀턴에게 보여준 벅의 신뢰와 사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의 생명을 구해준 주인에 대한 애완동물의 헌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반면,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썰매를 끌려고 했던 데이브의 모습은 본능을 뛰어 넘는 행위라 하겠다.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주는 주인에 대한 보답(give and take)으로써의 사랑과 헌신이 아닌, 자기 존재(삶)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추구하고 부여했다는 점에서 철학적 차원에까지 접근했다고 한다면 인간에 대한 모욕일까?

 

저자인 잭 런던 역시 벅의 손턴을 향한 유난한 사랑을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문명의 증거'로 봤다. 문명과 본능(야생) 사이를 오가던 벅은 손 턴이 죽자 미련없이 문명의 세계를 떠나 야생의 세계로 들어선다.

 

벽난로와 지붕에서 태어난 성실함과 헌신도 그의 본성이었지만, 그는 야성과 교활함도 잃지 않았다. 손턴의 불 옆에 앉아 있는 벅은 대대로 인간의 문명에 길들여진 따뜻한 남쪽 지방의 개라기보다는 야생의 세계에서 온 야생개였다. 주인을 사랑했기 때문에 주인의 물건을 훔치지는 않았지만, 다른 야영지에서 다른 사람들의 물건은 아무럽지 않게 훔쳤다. 아주 약삭빠르게 훔쳐서 들키는 법도 없었다. - p99 中-

 

벅은 온종일 웅덩이 옆에서 생각에 잠겨 있거나 야영지를 초조하게 배회했다. 죽음이란 움직임의 정지이자 살아 있는 삶과의 이별이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고, 존 손턴이 죽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의 죽음은 벅에게 허기와 유사하지만, 쓰리고 또 쓰리고 먹을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큰 공허함을 남겼다. 벅은 이따금씩 멈춰서서 이하트족의 시체들을 물끄러미 보며 그 고통을 잊곤 했다. 그럴 때면 자신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대단한 자부심-을 자각했다. 그는 삼라만상의 가장 고귀한 사냥감, 즉 인간을 죽였고, 몽둥이와 엄니의 법칙에 맞선 것이었다. 벅은 호기심에 차서 시체 냄새를 킁킁 맡았다. 그들은 너무 쉽게 죽었다. 허스키들을 죽이는 것보다 더 쉬웠다. 화살과 창과 몽둥이만 없으면 그들은 적수가 되지 안았다. 그 후로 벅은 인간들의 손에 화살과 창과 몽둥이가 쥐어있지 않는 한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 p134~135 中-

 

 

한 세기 전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사실적이고 감동적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야성)과 인간(문명) 세계에 대한 통찰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고전 명작의 반열에 오른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잭 런던이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을 최근에서야 알았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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