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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평점 :
연초에 올해는 최대한 고전을 많이 찾아 읽기로 작심한 바 있고,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은 1순위에 올라있었다. 사실, 이
작품은 중학생이던 시절(아마도 골딩이 노벨문학상을 타던 즈음일 것이다) 읽었고, 그 여운이 오랫동안 남았던 작품이다. 그렇지만 성인이 된
이후에는 작품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만 또렷이 기억날 뿐, 어떤 내용이었는지 줄거리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던 작품이기도 하다. 그래서
'언젠가 다시 꼭 읽어봐야지...'하고 결심만 십여년 이상을 해오던, 나와는 나름 특별한 인연이 있는 작품이다. 이런 작품을 마침내 다시 읽을
기회를 갖게 되었고,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듯 거침없이 단 하루만에 완독했다.
소년들이 불시착한 무인도의 배경을 설명하는 부분이 처음에는 다소 지루하게 전개되는가 싶더니 인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맨 먼저, 앞으로 소년팀의 리더로 뽑히는 랠프와 그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돼지(필)'가 조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 두명은
'소라'를 발견하고 줍는다. 천식을 앓는 '돼지(필)' 대신 랠프가 소라를 부는 연습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라를 불어 그윽한 소리를
뿜어올리자,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오다가 불시착한 아이들이 한명 두명씩 소라 소리를 듣고 모여든다. 작품 속에서 소라는 민주, 평등, 법과 제도를
상징한다.
만5살에서 12살로 이루어진 소년들은 처음엔 랠프를 지도자로 뽑고, 지나가는 배가 볼 수 있도록 산정에 불을 피우고 오두막집을 짓는 등
나름 질서정연하게 움직인다.
섬 안에는 식용가능한 과일 열매들과 마실 물이 있어서 굶어 죽을 걱정은 없다. 그러나 성가대의 리더인 잭 메리듀는 멧돼지 사냥에 집착하면서
소년들 사이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는 권력과 폭력 지향적인 인물로 악(惡)을 대표한다. 자신이 리더가 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팀을
분열시킨다. 초반부터 완력으로 필의 안경을 망가뜨리는가 하면 그나마 한쪽 알만 남은 안경마저 어둠을 틈타 급습하여 빼앗아간다. 힘과 폭력에
의지하여 인간 문명과 진보에 대항하고 이를 파괴하려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이성적으로 랠프를 따르던 소년들이 잭을 따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일들이 왜 일어나는 걸까?
인간은 어째서 한순간에 악에 휘둘리고 어둠에 봉사하는 걸까?
소년들은 다들 이성적으로는 멧돼지를 잡는 것보다는 불을 꺼뜨리지 않는 게 중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마음 속에 자리잡은 '두려움'에
서서히 이성은 마비되어 간다. 그리고 어느덧 이성이 사라진 자리엔 본성이 소리없이 차올라 결국엔 사람마저 멧돼지처럼 사냥하는 폭력성을
보인다.
처음에는 멧돼지의 시선을 교란시키기 위해 얼굴에 바르던 진흙을 얼굴 뿐만 아니라 온몸에 색칠한 순간, 소년으로서 그들이 갖고 있던 호기심과
짓궂음은 피에 굶주린 잔인함으로 변해버린다.
낙하산을 타고 추락사한 시체를 괴물로 착각하고, 이 괴물에게 잡은 멧돼지의 머리를 재물로 받치는 장면 등은 초기 인류의 원시성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듯하다. 그리고 괴물의 실체를 깨닫고 이 사실을 알려주려고 하는 사이먼을 멧돼지로 인식(?)하여 집단적으로 학살하는 장면은 인간
근원이 악인지 아니면 선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소년들이 전부 잭의 수하로 들어가버린 후, 랠프와 돼지(필)는 잭의 무리를 찾아가 마지막 남은 인간성에 호소해보지만, 그들의 기대는
가학성을 타고난 인물인 로저가 밀어낸 바윗덩이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산꼭대기에서 굴러내려오는 돌에 돼지(필)가 맞아 죽은 후, 숲속에
간신히 숨은 랠프를 잭 일당은 마치 멧돼지 사냥하듯 포위망을 쳐서 점점 좁혀온다. 유색의 진흙으로 온몸을 색칠한 잭 일당은 살기등등하여 랠프를
죽이기 위해 달려든다. 이건, 더 이상 놀이도 사냥도 아니었다.
인류 문명을 상징하는 랠프의 죽음이 임박한 순간, 숨 가쁘게 달려오던 작품은 거칠지만 드라마틱하게 막을 내린다.
사이먼은 죽고ㅡ잭은......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는 몸부림치며 목메어 울었다. 이 섬에 와서 처음으로 그는 울음을 터뜨린
것이었다. 온몸을 비트는 듯한 크나큰 슬픔의 발작에 몸을 맡기고 그는 울었다. 섬은 불길에 싸여 엉망이 되고 검은 연기 아래서 그의 울음소리는
높아져갔다. 슬픔에 감염되어 다른 소년들도 몸을 떨며 흐느꼈다. 그 소년들의 한복판에서 추저분한 몸뚱이와 헝클어진 머리에 코를 흘리며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소년들의 울음소리에 둘러싸인 장교는 오히려 약간 난처해했다. 그는 그들이 기운을 회복할 시간적 여유를 주기 위해 외면을 하였다. 멀리
보이는 산뜻한 한 척의 순양함에 눈길을 보내며 그는 기다렸다.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p303-
윌리엄 골딩은 학교 선생님으로 근무하다가 해군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는 교사로서 남학생들의 또래문화와 집단행위를
관찰했을 것이고, 군인으로서 전쟁의 참상과 인류를 멸망시킬 수도 있는 핵무기의 위력을 보면서, 인류가 자랑하는 문명이란 언제든지 한순간에
야만성으로 둔갑할 수 있다는 걸 꿰뚫어보지 않았나 싶다.
무인도에 불시착한 소년들이 '두려움과 공포' 그리고 '집단 무의식'에 매몰되어 문명을 상실하고 야만으로 회귀하는 과정은 원시성에 입각한
인간성(공포, 두려움, 질투, 과시, 지배욕 등등)을 조금도 버리지 못한 인류의 모습이라고 하겠다.
짐승으로 추락했던 소년들은 섬을 찾은 해군과 순양함에 의해 구조되어 다시 인간 문명의 세계로 되돌아오지만, 해군과 순양함으로
상징되는 전쟁지향적 인류는 과연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보물섬> 등으로 대변되는 모험소설로부터 모티브를 따왔지만, 이 작품을 단순히 모험소설이 아닌 인류 문명에 대한 세기말적
예언서로 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