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았던 집 - 2001년 제26회 한국소설문학상 수상작품집
은희경 외 지음 / 개미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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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에게는 두 가지 눈이 있나 보다. 하나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는 냉정한 시선이다. 거기에는 꽤 큰 대가가 따르는데, 우선 많은 적이 생긴다. 진실을 밝히거나 변화를 추구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들에게 소설가란 '요란 떠는' 족속에 다름 아니리라. 하지만 소설가는 모두가 아니라고 하는 길을 기꺼이 걸어가기에 그러한 시선에 잠시 주눅이 들지라도 멈추지는 않는다. 다른 하나는 상처 받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하려는 따뜻한 시선이다. 소설가는 어둠 속에 있는 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라도 줄 수 있다면, 자신의 인생이 다치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감수한다. 그때 그들은 묻는다. "당신은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인데, 왜 이렇게까지 하시나요?" 소설가는 대답한다. "나도 한때 당신이었습니다."


 모든 수상작이 선명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상을 받은 은희경 작가의 『내가 살았던 집』이 초반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몇몇 특정한 표현을 제외하면 서사가 뚜렷하지 않다. 그렇다고 후반부 작품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았다고 할 수는 없다. 아무래도 인상 깊었던 것은 「자미원에는 어떻게 가는가」가 아닐까 싶다. 베트남 전쟁에서 희생된 자들의 혼을 달래기 위해 무당 은혜와 닥터 정, 참전용사 박 등이 현지에 방문하면서 겪은 일들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는 독자를 베트남 땅에 올려놓고, 거기서 있었던 역사적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킨다. 새삼스럽지만, 2000년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작품을 떠올리게 했다. 비록 단편이지만, 아직까지 남아 있는 베트남 전쟁의 상흔과 후유증을 고스란히 현대에 옮겨 놓는 데에 성공한다.


 또 하나 기억나는 단편은 「삭매와 자미」이다. 중국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몇몇 수사적인 표현이 추가되었을 뿐, 역사와 크게 달라진 서사도 없다.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용맹한 장군 삭매와 그가 사랑했던 자미, 굽이치는 강을 달래기 위해서는 살아 있는 여인을 바치라는 말을 애써 무시하고 급류에 활을 쏘고 돌격을 명령하는 어리석음, 사랑에 눈이 멀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비극을 초래한 역사가 거기에 담겨 있다. 아마 작가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집단보다 우선시 여겨 그 공동체를 위기에 몰아넣는, 또는 파멸 시키는 우화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약 25년 전에 쓰인 작품이지만, 현대의 지도자들에게 꼭 필요한 자질이 아닐까 싶다. 사리사욕보다는 공공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마음 말이다. 안타깝게도 그것이 지켜지는 일이 상당히 드물지만.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단편은 「사심」이다. 한 여배우의 회고록 형식으로 쓰인 이 작품은 불우한 가정 환경에 성장한 주인공에게 그 상처가 어떻게 발현되고, 이후의 결혼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다루고 있다. 주인공의 내면에 존재하는 감각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찾아와 괴롭게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그녀가 느끼는 바는 조금 다르다. 물론 그 안에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넘나드는 인식이 잠재한 것은 분명하다. 좋은 어른에게 양육되지 못한, 사랑에 결핍을 느끼고 있는 주인공이 이후에 어떤 감정적인 어려움을 겪는지 보면서, "아이들에게는 좋은 어른이 필요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낀다.


 이외의 작품들도 있었지만, 전반적인 감상평은 비교적 오래된 단편 소설을 많이 봐서 좋았다는 것이다. 문학의 길을 담담히 걸어가는 이들은 이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으며, 앞으로 존재할 것이다. 내가 가볍게 읽은 단편을 쓰기 위해 혹자는 수 개월을, 혹자는 수 년을 공들였으리라. 그 노력의 결과를 편하게 감상하며, 비판까지 하고 있자니, 문득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다만 내가 할 일은 그들의 정신, 즉 냉정하게 현실을 바라보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놓지 않는 작가 정신을 전달하는 것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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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은혜 - 예수님의 은혜를 늘 누리며 그분을 닮아가고 싶은 당신을 위한 묵상집
햇살콩 지음 / 규장(규장문화사)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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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받아서 읽게 된 책. 활자 간의 간격이 지나치게 많은 책을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지만, 전하는 내용이 나의 신앙을 돌아보게 만든다. 묵상에 도움이 되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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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보급판 문고본) C. S. 루이스 보급판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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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안에 작은 악마가 살고 있어요. 날 떠나지 않는 유일한 친구죠. 그 얜 끊임없이 내게 말해요. You are the most useless, worthless person I've ever met." - 디어클라우드 <Bye Bye Yesterday> 중


 퇴마나 오컬트 영화에서 보는 악마의 형상은 기괴하고 공포스럽긴 하지만, 우리 삶에 작용하는 지점은 매우 작다. 그러나 내 안의 보이지 않는 악마가 부추기는 자기 연민과 자기 혐오는 가장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악마는 아주 교묘하고 은밀하게 우리의 욕망을 자극한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이길 힘이 전혀 없기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인 인간을 무너뜨리고 그 영혼을 잡아먹으려고 한다. 악마는 오로지 자기의 생존에만 관심이 있으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버러지 같은 존재'인 인간은 물론이고 동료 악마를 희생하는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C.S 루이스의『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읽을 때는 다른 신앙 서적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마음가짐을 지녀야 한다. 악마가 지껄이는 말들에 현혹되지 말 것, 그들도 인정하는 그리스도의 위대함과 사랑을 잊지 말 것. 내가 악마의 꾀임에 넘어가고 있지는 않은가, 스크루테이프가 계속 언급하는 '환자'에 해당하지는 않은지,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심각한 상태인지 짚어보아야 한다. 형식적인 종교 생활, 교만한 마음, 세상의 가치관을 우선시하는 태도 등은 악마들이 바라는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이 자신의 영적 타락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그들은 원한다. 악마들은 조금의 유혹에도 인간이 흔들리고 스스로 넘어질 수 있음을 알기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낀 이들에게도 고난과 시험을 아낌없이 준다. 그러나 악마들은 그것이 구원자의 큰 뜻 아래에 있는 일임을 결코 모른다.


 특이한 것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인류 최대의 비극이, 악마의 사역에 있어서는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언뜻 보면 신의 존재에 대한 회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논쟁이 예상될 테지만, 악마들은 그것보다는 개인을 공략하는 일에 집중한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조금씩 얻어간다.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우리의 마음의 중심이 하나님이 계시다면, 두려울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외부의 사건들은 나의 믿음을 흔들 수 없다. 진정 경계해야 할 것은 우상이나 그릇된 욕망이 내 마음을 차지하는 상황이다. 사랑으로 포장된 욕망, 상대를 지배하려는 갈망,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우며 자신의 이익을 채우는 행위가 나에게는 더 무서운 일이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분명 독특한 책이다. 철저히 악마의 시점에서 인간을 무너뜨리는 법을 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우리는 그들이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신실함을 찾게 되니까. 역사적으로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를 반박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의 위대함을 부인하려고 했으나, 도리어 자신의 죄인됨을 발견했다. 예수님을 '원수'라고 부르며, 그를 조롱하는 듯 보이지만, 악마들조차 그를 인정하고, 또 존경한다. 세상의 어떠한 가치도, 어떠한 업적도 그분의 놀라우신 사랑에 비견될 수 없다. 악마의 입장에서 우리가 자랑하는 모든 성취가 얼마나 하찮겠는가? 또한, 예수님의 눈으로 볼 때, 우리가 믿음의 증거라고 내세우는 모든 업적들보다 우리가 얼마나 귀하겠는가? 악마와 그리스도의 영적 싸움에서 누가 이겼는지는 자명하다. 우리가 할 것은 그저 그분의 품에 안기는 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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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한가운데 - 윈스턴 처칠 수상록
윈스턴 처칠 지음, 조원영 옮김 / 아침이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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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통에도 책은 읽어야 한다. 아니, 전쟁이 한창일수록 책을 읽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없는 지혜는 거기서부터 비롯된다. 안타깝지만, 그 지혜는 단기간에 얻어지는 것도 아니요, 좋은 책만 읽는다고 얻어지지도 않는다. 많은 좋은 책과 소수의 나쁜 책을 읽음으로써 비판적인 사고를 확보해야 하며, 어떤 현상에 공감하는 동시에 거리를 두고 분석하는 힘을 얻는다. 그 끝에는 자신만의 고유한 세계관으로 주변 사물과 사람을 이해하는 어떤 '정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예술은 일종의 프로파간다다"라는 조지 오웰의 말은 꽤 일리가 있다. 윈스턴 처칠의 수상록을 보고 있자면, 그의 글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가 묻어나기 때문이다. 다만 특정 정당을 지지하거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처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끔, 그리하여 독자들이 자신과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설득하고 있다.


 처칠은 실패도 많이 겪었고, 실수도 많았다. 대신, 그만큼 역사에 기록될 업적과 성취를 이루기도 했다. 그의 개인사가 이토록 굴곡진데, 세계대전을 통과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기를 겪었을까? 하지만 그의 정신은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고취되었다. 역경과 갈등을 겪을수록 그는 무엇이 더욱 중요한지 선명하게 보았다.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그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힘을 가졌다. 현재 사람들의 동향과 지향점에 대해 유독 민감하기 때문이다. 특히, '오십년 후의 세계'라는 장에서 처칠의 통찰력이 돋보였다. 

 그러나 이 모든 물질적이 풍요도 인류의 이성이 눈뜬 이래로 품어온 단순한 질문에 대한 해답은 풀어주지 못한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p.404~405)

 

 기술과 문명의 발전이 인간의 삶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들이 인생의 모든 문제의 정답이 될 수는 없다. 할 수 없이 우리는 문제에 직면하고 부딪혀야 한다. 처칠은 정치가였기에 그의 모든 도전들이 역사에 기록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실패에 아파하긴 했으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도망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를 20세기 현대사의 중요한 인물로 생각하고, 혹자는 그를 영웅으로 여기지만, 그는 자신이 역사의 주인공이 아님을 알았다. 

 영웅이 역사를 만들어내는가, 아니면 그들은 단지 역사의 흐름을 주도하는 거대한 집단의 선두에 서 있을 뿐인가? 인류의 발전은 개개인의 불굴의 의지와 그들이 이룬 업적의 결과인가, 아니면 이러한 의지와 업적 자체도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낸 작품에 불과한 것인가? 역사란 걸출한 남녀의 연대기인가, 아니면 단지 시대의 흐름과 성향, 기회 등에 부응해온 그들 삶의 기록인가? 세상을 밝혀주는 이상과 지혜를 몇몇 탁월한 개인의 작품으로 돌릴 것인가, 아니면 말없는 다수의 삶이 농축된 모습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p.367)

 당연하게도 개인은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동시에 모든 개인이 역사의 주체이기도 하다. 기록되지 못하고 소리 없이 사그라진 이들의 삶과 행적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줄지는 인간의 미약한 지식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 처칠의 사소한 선택 또는 중대한 선택의 결과가 우리가 보는 세계사이며, 거기서 조금이라도 다른 선택을 했다면 당장은 티가 나지 않을지 몰라도 반드시 어긋나는 지점이 있다. 우리는 하나의 세계선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에 살았던 모든 조상들의 선택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 역사를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과거를 모두 껴안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과거를 돌아보는 까닭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서이다.


 갈수록 "나는 중요하다"라고 외치는 것이 많아지는 시대이다. 일시적 명예에 만족하지 못한 시대는 구독을 요구한다. 자본의 충성이야말로 마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어서 마치 그것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즘은 그런 것들이 불편하고 거북하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 정말로 옳은 길이 맞을까? "좋은 게 좋은 거다"라고 서로를 위로하며 낭떠러지로 달려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것을 깨달았을 때 너무 늦지 않으려면, 돌이킬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야말로 중요한 것을 발견할 최적의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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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트로피
제레미 리프킨 지음, 이창희 옮김 / 세종연구원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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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만 보면 물리학에 관련된 책처럼 보이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아니나 다를까 인류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열역학 제1법칙(우주 안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는 불변하며, 따라서 창조될 수도 없다"와 제2법칙(물질과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만 변한다)을 이용해 세상의 법칙을 설명하려는 그의 시도는 어찌 보면 대담하다고 할 수 있다. 그야말로 복잡성이 가속화되는 21세기에도 그는 불변의 법칙을 정립하여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무질서를 없애기 위해 무엇인가를 더하는 것은 무질서를 더할 뿐이라는, 허무주의적인 접근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의 삶을 바꾸기 위해 우리가 하는 모든 노력이 무용지물이라니,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니, 얼마나 절망적인가?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맞으면 좋겠다. 20세기 말미에 나온 이 책의 예측이 틀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리프킨의 예측이 점점 맞아 떨어지는 것은 왜일까? 엔트로피 법칙이 터무니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한다. 세계가 걷잡을 수 없는 잘못된 것은 아닌가?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세상은 안녕한가? 인류의 지식이 이토록 축적된 적이 없는데, 이제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알 것 같아서 두려워 한다. 무질서를 불러일으킬 요소는 더욱 많아진다. 팬데믹, 세계대전, 자원 고갈, 태양 폭풍, 인공지능....... 디스토피아를 초래할 수 있는 변수는 예측할 수 없이 늘어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인류학자가 지적하는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자원 고갈이다. 그는 전 인류가 쓸 수 있는 자원이 50년도 채 남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앞으로의 인구 증가를 감안하면 석유나 석탄뿐만 아니라 식량도 부족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낙관주의자들은 재생가능한 에너지나 친환경 에너지를 내세우지만, 앞으로의 인류가 소모할 자원을 생각하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그들도 안다. 지구에 쌓인 엔트로피가 절정에 달할 때, 그로 인해 발생할 무질서를 무엇이 막을 수 있을까? 정말로 인류는 다가올 재앙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일어나지 않기를 어렴풋이 바랄 뿐일까? 각 개인이 할 수 있는 노력은 없을까?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는 이제 남아 있지 않을까?


 지켜야 할 가치에 대한 대답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저자는 미래에 대한 일종의 보고서를 쓰고 있기 때문에 모든 잠재적 변수를 담아 놓았다. 정답이 하나도 없을 수도 있지만,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교육'과 '노동'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어떤 가능성을 엿본다. 쓸모없음으로 나아가는 여정이 필요하다. 시험 기간에 엔트로피를 최대로 축적했다가 끝나고 나면 모두 비워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소모적이다. 그러한 교육이 반복되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필요한 정보만 취하려고 하는 선별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그들은 다가오는 모든 정보에 회의적으로 변한다. "그게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는데?" 다시 말해, 정보에게 자신의 쓸모를 따지는 것이다. 하지만 지식은 아무 것도 대답하지 않는다. 결국 학생들은 모든 것을 취사 선택하려는 어른으로 자란다. 하지만 누가 그들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할까? 다른 어른들 역시 "너의 성공"이 중요하다고 주입 당하면서 자라온 것을. 누군가의 성공에는 다른 이의 실패가 전제되어 있고, 누군가의 휴식은 또 다른 사람의 노동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애써 외면해 온 것을. 수십 년간, 아니 수천 년간 인류를 지탱해 온 그 잘난 이기심의 법칙이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을 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이타심이라는, 와 닿지도 않는 교훈을 내세우지 않겠다. 대신 '엔트로피의 순환'이라는 가치를 믿고 싶다. 정말로 물질과 에너지가 한 방향으로만 간다면, 나의 엔트로피를 필요 이상으로 축적할 때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물질의 총량이 지나치게 축적되었다면,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달해야 한다. 그 방식은 쇼핑, 기부, 콘서트 가기, 도서 구매, 후배에게 밥 사주기 등 다양한 방식이 될 것이다. 지식의 총량이 필요 이상으로 있다면,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글쓰기나 강의, 아니면 대화와 경청이 좋은 방법이 되리라. 행복의 총량이 나에게 넘친다면, 기꺼이 흘러 보내야 한다.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나누어 보자. 그리고 누군가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보자. 나를 떠난 엔트로피가 어떤 식으로 역사를 작동시킬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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