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벤구르 을유세계문학전집 57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윤영순 옮김 / 을유문화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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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한 보물은 숨겨져 있는 법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고전들은 읽어달라고 간청하며 스스로를 세상에 내보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더 많은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발굴된 것이다. 『체벤구르』라는 이 20세기의 숨은 고전은 저자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이 이름은 마치『국가』를 통해 이상향을 그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을 연상시킨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그의 책을 성경 책으로 삼은 윤영순 교수이다. 그는 플라토노프의 저작에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 그리고 그는 1928년에 출간된 이후 60년 간 세상에 빛을 내지 못한 『체벤구르』를 국내에 출간시켰다. 그래서 나는 참으로 기뻤다.

 

 이제 그토록 기다려왔던 『체벤구르』의 속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다, 이 작품은 출간되자마자 큰 파란을 일으킬 만큼, 실험적인 수법과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문제작이다. 작가는 조이스나 포크너와 같은 모더니즘 작가와 비교될 정도로, 창의적인 기법을 사용했다. 사실 난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처음에 내가 제임스 조이스에게 다가간 것은 그의 놀라운 문학적 실험이었으나, 『율리시스』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여러 번 읽으면서 중요한 것은 형식이나 기법이 아닌 내용과 주제임을 알게 되었다. 과거의 러시아와 농경 생활에 대한 아름다운 구절들이 우리 가슴 속에 파고들지만, 중요한 것은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러시아의 디스토피아 문학은 그 역사가 깊다. 사실 내가 『체벤구르』에 가까이 다가간 계기도 탄압받던 시절의 러시아 문학이기 때문이다. 봉건주의에서 공산주의로 너무 이른 도약을 한 나머지 무지와 가난의 늪에 빠져버린 수많은 러시아인들을 깨우치기 위해, 지식인들이 항상 억압과 이단자 취급을 받으면서 걸작들을 써 내려갔다. 자먀찐의 『우리들』을 시작해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등 디스토피아 문학과 수용소 문학들의 고전이 모두 『체벤구르』가 쓰여졌던 시기, 즉 이념이 인간을 억누르던 때에 쓰여진 책들이다. 그런 점에서 이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의미가 깊다.

 

 

        왼쪽은 예브게니 자먀찐의 『우리들』이고, 오른쪽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다. 전자는 세계 최초의 디스토피아 문학이며, 후자는 수용소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는 작품이다. 이 두 소설 모두 러시아의 암흑시대에서 탄생되었다는 점에서, 안드레이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와 일맥상통한다.

 

 사회주의라는 개념은 마르크스가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을 통해 널리 선포한 혁명적 사상이다. 하지만 그것을 읽지 않고, 공산주의 유토피아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자본주의를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라는 '최종 과정'으로 급격히 넘어간 20세기 러시아와 다르지 않다. 샤샤의 방랑은 지상 낙원인 체벤구르를 발견하는 것으로 끝이 나지만, 이야기는 그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왜냐하면 체벤구르야말로 플라토노프가 꿈꾸었던 러시아의 모습 그 자체니까 말이다. 그가 애써 그 '슬픈 유토피아'를 유토피아로 묘사하려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문체를 사용한 까닭도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로 묘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조국 러시아를. 그는 공산주의였지만, 배운 지식인의 의무로서 거대한 땅만큼이나 문제점이 보였던 러시아를 변혁시키길 원했다. 그 결과가 바로 『체벤구르』다. 하지만 조국은 그를 믿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작품이 인정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51년 폐결핵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러다가 2012년 10월, 그의 말에 귀기울인 사람이 나타나 그를 이 세상에 알렸던 것이다. 이 멋진 신세계를 많은 이들이 맛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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