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스캔들
박은몽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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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영향력은 실로 대단하다. 오래전 만화 <바람의 나라>를 보았을 때 처음 삼국에 흥미를 느낀 나는 삼국의 역사를 알고자 서점으로 달려갔지만 문고판 크기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만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많이 달라진 걸 느낀다. 하나의 사극이 방영 되면 그에 관한 책들이 서점가를 장악한다. 독자로서는 큰 즐거움이다. 예전에는 구할 수 없던 전문적인 책들, 그것도 한 분야만을 다룬 세세한 역사서들이 나와 있으니 말이다.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은 신라의 성풍속도에 관한 책이다. 많은 부분을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참고했다 하니 요즘 절찬리의 방영중인 <선덕여왕>의 영향이 큰 듯하다. <선덕여왕>의 팜므파탈인 미실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은 법흥왕부터 문무왕까지의 신라왕실을 중심으로 왕후, 화랑, 색공지신들의 자유로운 성생활과 얽히고설킨 관계들을 12가지 이야기로 담아놓았다.

신국에는 신국의 道가 있다.

원래 정사[正史]보다는 야사[野史]가 재밌는 법이다. 야사[野史]는 우리에게 역사 속 감춰진 뒷이야기들을 전해준다. 그 이야기들 속엔 왕도 왕후도 용맹한 군인도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다. 사랑의 감정도 있고 질투도 하고 실수도 하기에 옛 인물들이지만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이 책은 잘 몰랐던 신라의 가계도라든가 왕실 주변인물을 허물없이 드러내 보인다.

사실 고대가 더 성에 대해 자유로웠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 정도였을지 몰랐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성골이라는 왕족의 피와 골품제를 지켜나가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사실을 알긴 알았지만 복잡하게 얽힌 관계들을 읽고 나니 특히 놀랐다. 물론 고구려나 백제에서도 형사취수제와 약간의 근친혼이 이루어졌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근친혼이 남아있었다는 건 아무래도 신라의 고립된 지역적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신라의 사람들은 이 풍속을 부끄럽거나 야만적이라 생각하지 않고 예부터 내려온 고유의 풍습이라 생각했다 한다. 왕족과 권력을 가진 신하들이 제 피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피의 끈으로 묶은 것이다. 그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유럽의 왕조들도 많은 근친혼들을 했으니 말이다.
또 신라에는 색을 숭상하는 독특한 문화가 있었는데 남편을 잃은 아녀자의 슬픔을 색으로 위로하거나 미실에게 흠뻑 빠진 진흥왕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던 진흥왕의 빈첩 보명에게 진흥왕의 아들 동륜이 색으로써 기쁨을 주려한 것도 좋은 예이다. 그것은 남녀 간의 교합이 그들의 최고의 즐거움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솔직한 지 신라를 폐쇄적이고 매력 없는 나라라 생각했던 내 편견이 많이 줄어들었다.

책을 읽다 보면 지금의 기준으로썬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관계들이 많이 등장한다. 남매간의 결혼이나 아버지와 아들에게 같이 색을 바친 미실, 어머니와 딸이 한 왕을 모신 경우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가 있어도 왕의 명이 있다면 신분 높은 자에게 색을 바쳐야 한 경우도 있었다. 신라에서는 자신보다 신분이 높은 자에게 색을 바치는 것이 당연시 여겼기 때문에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신분을 상승시키기에 좋은 기회였다고 하니 색은 정치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했을 거라 생각된다. 색을 ‘천한 것’이 아닌 道로써 숭상한 신라가 결국은 삼국통일을 하고 천년왕국을 이룩했으니 이 끈끈한 유대감에 삼국통일의 비밀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이와 같이 색으로 채워진 열두 가지 이야기는 우리에게 새로운 신라의 모습들을 알려준다. 또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인물들이 다수 포함 되어 있어 등장인물들을 드라마 인물로 바꾸어 보니 몰입도 더 잘되었다. 다만 드라마와 책 사이의 차이도 종종 등장해서 드라마는 편집하기 나름, 역사는 각색하기 나름(?)이라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아마 신라를 알려진 그대로만 봐왔던 사람이나 신라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읽으면 많은 재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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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추억
사이 몽고메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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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고양이, 앵무새, 원숭이까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동물들은 많다. 가축의 역사로 보면 신석기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장 먼저 가축화 된 동물은 개였고 기원 전 8천 년 전엔 돼지도 가축화 되었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동안 돼지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었지만 여러 편견에 휩싸인 동물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돼지는 식용으로 생각하며 게으르고 욕심 많고 지저분한 동물 일순위로 뽑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편견은 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돼지의 추억>이라는 제목을 가진 이 책은 사랑스러운 돼지 크리스토퍼 호그우드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저명한 지휘자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크리스토퍼 호그우드는 대개 크리스로 불린다. 크리스는 어미에게서 새끼돼지가 10마리 이상 태어나면 도태된다는 ‘무녀리’ 중 하나였다. 암컷 돼지는 젖꼭지가 12개이지만 젖이 잘 나오는 젖꼭지는 10개  뿐이라 10마리 이상 태어나면 도태되는 새끼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무녀리’라고 한다. ‘무녀리’는 덩치가 작고 약하지만 존재 자체가 가족을 위험에 빠뜨릴 경우가 있기 때문에 야생의 본능이 남아 있는 어미돼지는 물어죽이기도 한단다. 크리스는 운이 좋은 경우였다. 그는 슈즈 박스에 담겨 작가의 품에 안겼다. 살아날 확률은 적었다. 그리고 작가는 가혹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작가는 병든 아버지와 크리스를 동일시했고 둘 다 살리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의 희망이 다른 희망으로 이어지듯이.

어렸을 적 돼지 사육장에 들어가 본 적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물놀이를 갔다 만난 마을 분의 집이었는데 수컷 돼지 한 마리와 암컷 돼지 10마리를 키우고 계셨다. 분홍 돼지들이 끊임없이 꿀꿀거리고 출산을 앞 둔 암컷 돼지가 누워 있는 광경은 내 눈에 정말 멋져 보였다. 돼지고기를 즐겨 먹었지만 그 돼지들은 식용으로 보이지 않고 귀여운 동물이자 친구로만 보였다. 난 새끼가 태어나면 한 마리 달라고 졸랐고 아저씨는 그러마하고 약속하셨지만 그 약속은 당연하게도 지켜지지 않았다. 자라고 난 뒤엔 난 그 즐거웠던 기억을 저편에 묻고 이 <돼지의 추억>을 보기 전까지 꺼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책의 표지를 본 순간 기억은 되살아났고 책은 나를 멋진 돼지의 세계로 데려다 놓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책은 사랑스러운 돼지 크리스가 잔뜩 나온다. 크리스는 헛간을 탈출해 이웃의 상추밭에 들어가거나 도로를 질주하는 말썽꾸러기지만 사람을 좋아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면 만족하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었다. 돼지가 본능에 충실한 만큼 아름다운 모습은 없다는 게 작가의 지론이다. 행복과 소망이 늘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크리스의 매력적인 모습에 이끌린 사람들이 점점 늘어 크리스를 찾아오면서 그에게도 많은 친구들이 생겼다.

나도 점점 크리스의 매력에 빠져 들었다. 크리스가 기쁠 때 낸다는 낮은 음역의 꿀꿀 소리도 듣고 싶었고 돼지마사지로 크리스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또 돼지고원에서 크리스와 함께 뒹굴 거리고 싶기도 했다. 그만큼 크리스에게 열중했다. 돼지가 똑똑하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크리스는 그 이상이었다. 그는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않고 열심히 가꾼 정원을 망치지도 않았다. 아이들을 좋아했고 사람마다 반기는 꿀꿀 소리가 다 달랐다고도 한다. 

하지만 사랑스러운 동물과 사람의 교감을 그린 책은 항상 끝이 슬프다. 이 책도 크리스의 죽음을 전했다. 14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살았지만 직접 동물을 키운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시간도 짧게 느껴진다는 것을.
크리스는 뉴햄프셔의 스타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뒤에도 많은 친구들이 생전의 크리스에 대한 추억으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책은 크리스의 이야기 뿐 아니라 동물학자인 작가 개인의 이야기와 이웃 친구들, 가족이야기, 일 이야기가 함께 실려 있다. 이는 작가의 동물에 대한 관점과 주변 상황, 가족의 갈등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에서 크리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도 이야기 한다. 또 작가는 동물들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이해하고 용서의 마음을 배우기도 한다. 다른 종[種]을 이해한다는 것, 그 존재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은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도 큰 연관이 있다. 작가는 그 마음을 배웠고 글을 씀으로써 독자들에게도 그 마음을 가르쳐 준다.

나에게도 교감을 나누는 동물이 있다. 이 강아지는 나에게 온지 8년째이고 우리는 그 세월만큼 서로를 알아왔다고 확신한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또 재밌어 하는 일들을 안다. 지금도 옆에서 이불을 꺼내 달라고 조르는 강아지가 사랑스럽다. (절대 바닥에서 자지 않는다.) 작가가 크리스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듯이 나도 하루하루 배움의 길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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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김주영 옮김 / 씨네21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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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여기 당당하게 사람을 살해하겠다고 선언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한명이 아닌 세 명씩이나. 사람을 살해하면 안 된다는 상식은 있다. 사랑하는 가족이 있고 번듯한 직장을 가진 사회의 일원이다. 하지만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죽여야 할 사람이 세 명이 있다. 괜찮다. 그 세 명을 죽이고 체포되지 않으면 되니까. 그러려면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첫 장부터 독자들을 확 사로잡는 이 선언은 책의 주인공인 나미키 나오토시의 독백이다.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려 하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나미키가 살인을 하려는 의도는 뒤에 순차적으로 나오게 되는데 나는 책을 다 읽은 순간까지 작가의 생각대로 움직였다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책은 나미키의 생각과 행동들을 독자들에게 낱낱이 고한다. 살인이라는 추악한 행위를 나미키 스스로가 정당화 시키고 무고한 사람을 죽일 때조차 변명으로 일삼는 나미키의 행동에 속이 뒤틀리기까지 하는데 그 모든 게 작가가 의도한 것이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 이시모치 아사미는 심리전에 능한 대단한 작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미키의 표적은 야타베 히토미, 기시다 마리에, 구스노키 유키까지 세 사람이다. 원한으로 살인을 저지르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나미키가 돌보던, 불쌍한 사람들이다. 히토미와 마리에, 유키는 각각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쓰고 사망한 아버지들의 딸들이다. 나미키는 이런 ‘원죄 사건’들의 피해자 가족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지원자 그룹의 한 사람이었고 세 사람은 지원자들의 보살핌을 받고 성장했다. 나미키는 왜 어릴 때부터 함께 해왔던 그 세 사람을 죽이려는 것일까. 그것도 절대 잡히지 않기 위한 완벽범죄를 계획하면서까지.

이야기는 우연치 않게 나미키가 그 세 사람이 아닌, 같은 지원자 그룹의 아카네를 먼저 죽이면서 꼬여간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살인을 시행하려한 나미키의 생각과는 달리 ‘악랄한 교사’가 집에 찾아오면서 살인은 그날 밤 모두 끝내야할 나미키의 의무가 되어버렸다. 하룻밤 안에 세 사람을 살해해야 한다. 나미키의 머리는 그때부터 재빠르게 돌아간다. 독자는 살인자의 머릿속에 들어가 그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살인에 동참하게 된다. 동조할 수도 그렇다고 말릴 수도 없는 살인행위에 공범자가 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이다. 이유를 쉽사리 알려주지 않는 불친절한 살인자에게 끌려 다니는듯한 기분 또한 함께 느껴진다.

사건은 대부분 나미키의 시선으로 이어진다. 실행하기까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현장을 그려보지만 원래 사람이라는 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살인이 계속될수록 일은 꼬여만 가고 나미키의 자기변명은 계속 된다. 

작가는 살인자란 원래 비겁하고 비참하고 추악하고 약해서 결국에는 패배하기 때문에 일부러 그런 식으로 쓰고 싶었다고 말한다. 나미키는 그 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이 자신의 정의와 사회의 행복에 부합된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그건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는다. 제목 그대로 귀를 막은 살인자를 떠올리면 된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책을 만난 건 두 번째이다.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도 그랬지만 독자에게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풀어나가는 방식이 독특하다. 또 복선을 깔아놓는 방법도 어색하지 않아 독자가 끝까지 책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든다. 한 마디로 말해 다음에도 이 작가의 책을 읽을 거란 얘기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일본 스릴러 작가라 하면 떠올릴 작가 중 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다음 작품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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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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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난 항상 일어나서 나가버릴지 아님 끝까지 봐야할지 고민한다. 영화가 재미없어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그의 영화가 내가 마주하려 하지 않았던 현실의 고통들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밀양>을 보기 전까지 피해자의 남은 가족들의 삶을 깊게 생각해보지 못한 무신경함. <오아시스>를 보기 전까지 장애인들에게도 욕구가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못한 무지함까지도. 
 

<도가니>를 보면서 이창동감독의 영화들을 연상한 것도 그 때문이다. 너무나 현실적인 이야기를 접하고 있다 보면(그것이 영화나 소설일지라도) 난 도피하고 싶어진다. 이건 거짓말일 거야. 현실이 아니야 하면서. 하지만 그 일들은 현실이다. 우리가 외면하려 해도 할 수 없는 우리 주위의 이야기이며 우리가 흘려보내려  해도 그 자리에서 ‘나 여기 있어요’라며 존재감을 드러내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어쩜 이 이야기가 지금에야 나왔나 싶었다. 뉴스를 보다보면 한 달에 몇 번은 보게 되는 장애인 폭행사건들은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사람들이 계속 존재함을 알린다. 또 그에 대한 철저한 대책 없이 지지부진한 해결은 앞으로도 이 일들이 계속 될 것임을 암시한다. <도가니>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이게 어찌 요즘에만 있었으랴. 우리가 알려하지 않았을 뿐이지 사회 기득권자가 약자를 짓밟고 유린한 일은 일상처럼 벌어진다. 사회가 그렇게 돌아간다. 그들은 마치 신처럼 위에 군림하면서 자신들이 아니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떠들어 댄다. 지긋지긋한 무진의 안개들같이 없애려 해도 없어지지 않는 시스템이다.

‘자애학원’이라는 거대한 성벽을 두드린 사람은 기간제교사로 온 강인호였다. 하던 사업이 어려워져 작은 거 다섯 장을 주고 맞바꾼 기간제교사의 자리. 젊고 의욕에 차 무진에 내려왔던 강인호에게 보여준 ‘자애학원’ 의 자그마한 비리는 처음엔 작은 거 다섯 장이었다. 상호 묵인 아래 벌어진 그 자그마한 비리는 모욕적이었지만 괜찮았을 것이다. 정식 교사가 될 수 있다는데 투자에 가깝다는 게 강인호의 생각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애학원’의 아주 큰, 도저히 용서 할 수 없는 비리는 따로 있었다. 기껏해야 초등학생, 중학생인 어린 아이들을 교장과 그의 쌍둥이 동생인 행정실장, 박보현 선생이 강간하고 폭행한 것이다. 기간제교사 자리는 강인호 가족의 희망이었다. 그는 처음에 귀를 막고 싶었을 것이다. 현실이 아니라며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책을 읽는 나조차 그랬으니까. 과정이 세세하게 나오면 나올수록 더 피하고 싶었다. 책을 읽다가 덮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난 현실을 알아야 했다. 그들의 절규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너무 늦게 알아서, 그간 뉴스를 봐도 그대로 흘려보내어 미안하다고 말해야 했다.

책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법정에서 부터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법정에서 이야기를 통해 기득권층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 되어 있고 어떻게 서로를 보호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사실 놀랍지도 않다. 확인을 더해 씁쓸했을 뿐. 판사, 경찰, 교회, 지역유지들까지 견고히 얽혀있는 관계들은 깨기 어려웠다. 아무리 진실을 외쳐도 그들의 부인과 침묵 안에서는 거짓이 되었다. 바위로 된 성벽을 약한 주먹으로 두드리면 주먹만 깨진다는 건 누구나 안다. 그렇다고 포기해야 하는 걸까? 강인호는 이 책에서 사회적 정의와 가족의 행복 사이에서 고뇌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런지 강인호의 선택과 서유진의 선택 둘 다 공감이 갔다. 그 둘은 각각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이 아니다. 거짓 속에 진실이라는 보석을 찾은 그들은 모두 하나의 입장이다. 선택해야 할 미래가 달랐을 뿐이었다. 
 

지연과 학연이라는 오랜 악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길은 있을까. 지금도 나라의 높은 자리에는 같은 학교 출신들이 수두룩하게 포진해 있다. 어쩔 수 없지, 내 일이 아니야 하며 무덤덤하게 넘기는 내가 싫다. 옳지 않다면 적어도 목소리라도 내야하는데 그저 내가 만들어낸 자그만 현실 속에 안주하려는 내가 싫다. 안개 속으로 처음 들어갈 때엔 옷이 젖는 걸 모른다. 오래 서 있다 보면 옷이 젖어 축축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젖어서 무거워진 옷을 짜내어 조금이라도 저항할 것인가 아니면 그저 서 있다가 점점 무거워질 옷을 입고 안개 속에 파고들 것인가. 선택의 몫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나는 대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선택.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이후로 잠시 작가 공지영을 떠나 있었다. 왜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고맙다. 그리고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라는 것도 고맙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이 이야기를 알게 되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도 일어나고 있는, 그 끝나지 않는 소식들을 들으며 <도가니<를 떠올릴 테니까. 기득권에 밟혀 버린 작은 꽃들이 다시 피어나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게 되었을 테니까 그리하여 세상을 바꾸기보다 세상이 나를 바꾸지 않게 하기 위해 더 이상 그 소식을 무덤덤하게 넘기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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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사무소
더글러스 애덤스 지음, 공보경 옮김 / 이덴슬리벨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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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코믹 S.F 장르의 개척자, 작가의 특이한 이력 등등. 그의 두 번째 이야기 <더크 젠틀리의 성스러운 탐정 사무소>는 전작만큼 긴 제목을 가졌고 뜻조차 범상치 않았다. 탐정 사무소면 탐정 사무소지 성스러운은 왜 들어갈까? 물론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알게 되었지만 이젠 제목보다 내용이 문제다. 이 쉴 새 없이 떠드는 책의 정체는 뭐란 말인가? 
 

책은 도입부가 힘들었다. 빛과 탑의 설명, 그리고 생소한 전자수도사라는 개념까지 집중하기에 좀 시간이 걸린 것 같다. 전자수도사라는 건 인간의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만들어진 장치였다. 세상이 믿으라는 것을 대신 믿어주고 인간의 번거로움을 줄여주기 위해 고안되었는데 너무나 모든 것을 열렬히 믿다보니 세상이 온통 분홍색이라고 믿고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책엔 사기꾼이라기엔 애매한 탐정 더크 젠틀리와 그의 친구 리처드, 리처드의 고용주이지만 전자수도사에게 살해당한 고든 (후에 유령으로 돌아다닌다),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누구도 딱히 기억해내지 못하는 리즈교수 등 많은 인물과 사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이리저리 부딪힌다. 소리가 난다면 분명 우당탕하고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작가의 희한한 설정은 타임머신에서 더 큰 빛을 발하는데 이것이 여러 사건과 인물들을 하나로 묶는 중요한 설정이다. 타임머신의 존재를 눈치 챈 더크 젠틀리는 정말 소질 있는 탐정일까? 아님 정말 초능력자? 
 

처음 적응하기 힘들었던 이야기는 중간을 넘어가자 이야기에 적응하면서 읽는 속도도 빨라졌다. 뭐랄까. 기분이 유쾌해졌다고나 할까. 그리고 이렇게 말 많은 소설이라니!! 대화가 책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어서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한바탕 소동을 끝낸 후에 비로소 인류 구원이 이루어졌지만 (책 표지에 나와 있던 인류 구원의 말이 이렇게 연결 될 줄이야) 책을 덮은 후에도 여전히 소란스러운 등장인물들의 입담이 들리는 것 같았다. 작가는 상상력 뿐 아니라 재치 또한 출중한 듯하다.  
 

이야기가 너무 빨리 끝난 감이 있었는데 후속편이 있단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개성 있고 나오는 내내 즐거웠기 때문에 다음 편 그대로 나와 줬으면 하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절대 소소한 일을 맡기고 싶지 않은데 대신 인류를 구원하는 탐정 더크 젠틀리. 다음엔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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