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도 세종대왕 - 조선의 크리에이터
이상각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1월
평점 :
서구의 링컨 대통령이 일찌기 '국민의 국민을 위한 국민에 의한 정치'를 부르짖었고, 오늘날 수많은 정치인들이 이 말을 들먹이며 자신들의 정치 이념이라고 내세운다. 하지만, 감히 주장하건데 링컨보다 수세기전 조선시대 세종대왕을 통해 이미 '백성을 위한 정치'가 실현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세종의 위대한 치적중 가장 대표적인 한글창제부터 수많은 과학 발명품과 간행물들은 대부분 백성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며 백성들의 입장에서 고민한 결과물이다. 말로만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가장 합리적이고도 현실적인, 피부로 와닿는 정치를 한 임금이 바로 세종대왕이다.
태조가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개국한 이후, 3대 왕인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골육상쟁의 비극에 대해서는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태종은 '피'로 얼룩진 초기의 혼란스러움을 벗어나 조선을 반석위에 올리기위해서는 후계자에게 강력한 왕권을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아낌없이 헌신하였던 처가는 물론이고, 어찌보면 태종을 가장 많이 닮은 세자 양녕대군을 끌어내렸을 뿐만 아니라 건국공신들을 내치고, 세종의 장인 심온 일가까지 모조리 제거해 버림으로써 차기 임금의 왕권강화를 위한 밑바탕을 다져나갔다. 또한 이른듯 보이는 시기에 상왕으로 물러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서도 군권등 주요 결정권을 여전히 행사하면서 철저하게 '군왕 수업'을 시켰다. 집권초기 세종대왕이 느꼈을 중압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가히 짐작이 되는 부분이다.
세종이 어떻게 법을 제정하고 시행하였는지 조세제도를 예로 들어보자. 합리적인 세금 징수를 위해 새로운 조세제도 도입을 논의하던 세종은 대국민 여론조사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중앙정부의 육조, 관리들은 물론이고 각도의 수령으로부터 여염집 빈민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인 여론조사였으니 전제군주시대에 이 얼마나 파격적인 방식인가. 의제는 농지 1결당 미곡 10두씩 거두는 정액제 조세제도였고, 결과를 얻기까지 무려 다섯 달이나 걸렸다고 한다. 여론조사가 실시된 해가 1430년이고, 관련기관인 공법상정소를 설치한 것이 1436년, 마침내 세법을 완성한 때가 1444년이었으니 무려 15여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이 공법에 의한 조세제도는 <경국대전>에 반영되어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시행되었다고 한다.
"세종은 후손들에게 무릇 정책이란 어떻게 기획하고 시현해야 하는 것인지를 멋들어지게 보여준 것이다. " p.144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과정부터 대신들을 통해 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과정까지 얼마나 신중하고 치밀한지. 무엇보다 당대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먼 훗날을 내다볼 줄 아는 거시적 안목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다. 조세와 교육등 나라의 근본된 정책이 널뛰듯 변하는 지금의 현실을 생각할 때, 임기내에 만이라도 일관을 정책을 수립하는 지도자, 차기 정부가 이어받아 지켜나가고 싶은 그런 정책을 수립하는 지도자가 나와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래본다.
세종대왕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 파격적인 정책과 인사를 단행했던 임금이었다. 집현전 학자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해주면서 오로지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었고, 장영실과 같은 인재의 경우 신분을 따지지 아니하고 등용한 예가 그러하다. 한글창제등에 있어서 기득세력과 갈등하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면을 보면 한마디로 뚝심있는 성품에, 유교사회인 조선에서 불교에 심취했던 것을 보면 고집스러운 면도 있어 보인다. 천성적으로 온화한 인품에 태종의 강인함을 타고난 세종은 물려받은 절대권력을 가장 이상적으로 사용한 군주라고 하겠다.
<이도 세종대왕> 이 책은 세종대왕의 일대기를 기록한 것으로 세종대왕을 보위에 올리기까지, 조선의 마스터플랜을 세우기까지, 찬란한 문화, 고독한 임금, 세종과 그의 신하들 이렇게 다섯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다. 주제별로 서술되어 역사적 배경이 약간씩 중복되는 경향도 있고, 가끔씩 툭툭 던지는 유머러스한 맨트가 썰렁하게 와닿기도 하지만 가장 큰 장점은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쉽게 읽히기는 역사서'라는 점이다. 만원권 지폐의 주인공이자 한글을 만드셨으며 '대왕'이라는 칭호를 붙일 수 있는 극소수의 임금이라는 점등 기존에 알고 있던 빈약한 정보를 넘어서 세종대왕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던 기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