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인문학 - 현장의 인문학, 생활 속의 인문학 캠페인
구효서 외 지음 / 경향미디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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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인문’이란 단어만 보면 이상하게 회피하고 싶고, 외면하고만 싶다. 어렵다고 생각해서, 어차피 읽어도 이해를 못할거라 짐작하고 나온 행동이다. 하지만 많은 책을 읽다보면, 또는 세상을 살다보면 ‘인문학’이 필요한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때란 삶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순간, 하나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할지도 모를 그 순간이고, 또 나의 존재가 흔들린다고 느껴질 때라고 생각한다.

<길 위의 인문학> 책에서도 말하다시피 ‘동양의 경우 인문학은 인류 사회의 문화, 인간의 도리와 질서, 예악의 가르침, 즉 공자나 맹자와 같은 성현의 저작을 읽고 탐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p6)  그래서 나부터도 인문학을 어려워하는 것이다. 공자왈 맹자왈하며, 거슬러 올라가기도 까마득한 그 시절부터 이어져 온 이야기에 지레 겁부터 내고, 어려운 한자가 난무하는 글에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게 된다. 일반적인 대중의 이런 평가에 가장 마음 아파하는 것은 예전부터 이어져온 인문학을 ‘이해’ 할수 있고, 자신만의 ‘해석’을 가진 인문학자들이 아닐까 싶다. 이렇게 유익하고 좋은, 행복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인문학을 왜 사람들은 어려워하다 못해 싫어하기까지 할까, 안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길 위의 인문학>은 그런 사람들이 일반인들에게 건네는 초대장과 같다. 듬직한 가이드일 수 있겠다. 소통을 통한 이해의 장을 열어가는 시도이다.

책을 읽으며 새롭게 깨닫게 된 사실은 인문학이란 인간을 대상으로 연구, 탐구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그저 예전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절 어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을 연구, 탐구하여 그것을 ‘나’와 결부시키는 작업이 바로 인문학이란 생각을 했다. ‘나’에게 적용시켜 스스로를 연구, 탐구의 결과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대저 둔한데도 천착하는 사람은 그 구멍이 넓어지고, 막혔다가 뚫리게 되면 그 흐름이 성대해지며, 답답한데도 연마하는 사람은 그 빛이 반짝이게 된다. 천착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지런히 해야한다. 뚫는것은? 부지런히 해야한다. 연마하는 것은 어떻게 할까? 부지런히 해야한다. 네가 어떻게 부지런히 해야할까? 마음을 확고하게 다잡아야 한다.(p109)

책을 통해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 허균, 허난설헌, 남명 조식, 추사 김정희 등의 인물을 만나고, 강릉, 강화도, 서울 등 역사 속에 살아 숨쉬고 여전히 삶의 터전이 되어온 장소를 만날 수 있다. 

옛 인물들을 만나고, 여전히 어렵게만 느껴지는 한자가 난무하기도 하는 책이지만, 다른 때와는 다르게 이해된다. ‘인문학’을 해하는 나의 마음이 예전보다 너그러워지고, 어떤 것인지 들어보겠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인 듯 하다.

인문학은 계속 변화하고 있다. 높은 곳에 머물며 모두가 우러러 봐주길 바라지 않고, 사람들의 곁으로 다가가려 한다. 인문학과 친해지려면 지금이 기회이다. <길 위의 인문학>도 그 중 하나이고.  친근하게 다가서는 인문학을 접해보는 기회, 그래서 스스로의 내면을 가꿀 수 있는 기회, 누구나 그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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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 트립 : 그 두 번째 이야기
장연정 지음, 이지예 사진 / 북노마드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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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껴두고 야금야금 보게되는 책이 있다.

한 장 한 장 넘겨 결국 반 넘게 읽게 되고, 2/3를 읽고.. 그러다보면 그게 그렇게 아쉬워지는 책. 보통 나의 경우 마음에 드는 여행 에세이를 아껴 읽게 된다. 사진도 한번 더 보게 되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 한번 더 읽어보고...

그렇게 아끼는 마음을 갖게 되는 책, 이번에는 <슬로 트립>이었다.

‘ 느리게 숨 쉬는 곳, 슬로 시티를 찾아 ’ 라는 문구가 적힌 이 책은 천천히 사는 것을 중시하는 마을들을 찾아간 여행 기록이다.

느려서 아름답고 불편해서 즐거운 곳, 슬로 시티는 “ 유유자적한 도시” 또는 “ 풍요로운 마을”을 의미하는 이탈리아어 “ 시타슬로” 의 영어적 표현으로 느림의 철학을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커뮤니티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세계 슬로 시티 연맹이 지정한 5곳, 의 슬로 시티가 있으며, 최근 충남 예산군 대흥면과 응봉면이 추가로 지정되었습니다.

라는 설명이 책의 맨 앞에 붙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곳이 있다니...

책장을 넘기면서 그 곳을 볼 수 있다는 설렘이 앞선다. 어느 곳이든 작가의 글과 더불어, 약간은 몽환적이고 정감 넘치는 사진과 함께 소개가 되는데, 그 곳으로 여행을 가고 싶다라는 마음 뿐 아니라, 저기서 살고 싶구나... 하는 마음도 든다.

카메라를 향해 수줍은 브이 포즈를 취하시는 착한 표정의 할머니가 좋아보인다. 혼자 여행한다고 안쓰러운 마음에 챙겨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에 내가 다 마음이 따스해진다. 누군가의 집에서 피어오르는 아궁이 연기가, 돌담 옆 소복이 피어난 꽃이, 누군가 널어놓은 옥수수가 그저 아련하게 다가와 마음에 쿵, 하고 파문을 남기고 간다.

왜 너는 그 복잡한 곳에서 불평만 하고 있니... 돌아보면 세상엔 다양한 삶, 그보다도 더 다양한 자연이 존재하는데 말야... 책이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앞으로도 한참동안 책을 들여다 볼 것 같다. 한 사람의 여행이 또 다른 누군가의 여행으로 이어지는 순간이 되어줄 것 같아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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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승에서 살아남기
아르토 파실린나 지음, 이수연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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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뒤의 세상을 상상해 본적이 있나?

악한 사람은 죽은 뒤에 지옥불에 떨어질것이라고, 그래서 착하게 살아야만 한다고 하도 세뇌당하듯 살아왔는데,  그래서 그런지 <저승에서 살아남기>란 제목을 들었을때, 역시나... 지옥불 속에서 살아남는데 어떤 방도가 있나보구나.. 하고 생각해버렸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오히려 그동안 종교들이 주장해온 지옥과 천국 따위, 저승에는 없다. 오히려 주인공의 입을 빌려 그렇게 세뇌시키는 종교를 이렇게 비판하기도 한다.

“ 신앙인이란 사람들이 이미 지상에서부터 천당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으로 나누는 걸 보면 난 구역질이 납니다.”

“ 당신들에게 종교는 약자들을 당신들 앞에 무릎 꿇게 하는 권력 행사의 수단입니다. ” (p245-6)

지나가던 여자의 종아리를 훔쳐보다가 죽게 된 ‘나’는 그렇게 망자들이 사는 세상, 저승에 다다른다. 보통 생각하기로 우리는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 상태로 높이 높이 떠올라 다른 차원의 천국이나 지옥에 갈 심판을 받는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그저 영혼 상태로 지금 살고 있는 세상 속에 섞여 사는 두 번째 삶을 시작하는 것일 뿐이다. 산 자는 죽은 자를 볼 수 없지만, 그들은 우리를 볼 수 있다. 다만 우리의 삶에 개입할 수 없을 뿐이다. 그 곳에는 “ 예수” 님이 세계를 돌며 순회 설교를 하신단다. 유명한 사람이든, 그렇지 않던, 빈부의 격차도 없고, 그저 더불어 살게 되는 두 번째 삶이라니... 거기다가 가고 싶은 곳은 생각만 하면 갈 수 있다. 심지어 우주에도!

죽음 뒤의 세상이 이 정도만 하다면 왠지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지금 당장 죽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런 죽음 뒤의 두 번째 삶이 평탄하려면 지금 이순간, 이승에서의 삶이 충실히 채워져야하고, 더불어 지적 능력을 잘 키워놔야 하기 때문이다. 생각없는 사람은 죽자마자 그냥 사라져버릴 수도 있다. 두 번째 삶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아, 역시 어렵군. 그래도 어쨌든 지금 첫 번째 삶보다 두 번째 삶은 훨씬 자유롭고, 수월하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살 수 있는 매력적인 삶이다.

이런 저승을 상상하다니... 대단하다. 그럴 듯하고, 무엇보다 마음에 든다. 원래 천국에서 띵까띵까하며 편안한 삶을 살게되길 바라지 않아서 그런가? 내가 죽어도, 아끼는 사람들 틈에서 살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는 생각이다.

사람에게 희망만 있으면 산다더니, 왠지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싶다. 그저 소설일 뿐이지만, 죽은 뒤에 심판을 받지 않아도 되고, 사람들 틈에서 다시 살 수 있다는 이런 생각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니...

<저승에서 살아남기>는 죽음 뒤를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누군가가 심어준 천당과 지옥 말고, 내가 생각한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모습이었으면 좋을까? 하고 꼭 생각해 보았으면 싶다. 믿는대로 이루어지리라, 는 왠지 이런 때에도 적용될 듯 싶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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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화장실에서 똥 눌까?
안야 프뢸리히 지음, 게르겔리 키스 그림, 유혜자 옮김 / 소담주니어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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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화장실에서 똥눌까?> 책을 처음 봤을때,  조카 녀석이 세살이었을 2006년의 정경이 떠올랐다.
기저귀를 떼기 위한 배변 훈련을 시작했을 무렵인데, 그 과정이 어른인 우리가 볼때는 힘들기만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녀석과 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일기장에 담아놨을까.

 그 때를 기록한 일기장엔 이렇게 적혀 있다. 
" 쉬통에 쉬-- 해보라고...하면서 한시간? 그건 좀 심한가? 삼십분 이상 시켜봤지만 실패!
쉬통을 대고 있었다. 싫어하지 않았다.. 에 큰 의미를 두기로 했다" 


  

여느 날과 똑같은 날, 숲에 특별한 일이 생겼다. 작은 파란색 집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동물들을 위한 화장실이었다. 
공원 관리인 아저씨가 동물들이 아무 데나 똥을 누지 못하게 하려고 갖다 놓았다.



멧돼지 그룬처 박사를 시작으로 하나, 둘 동물들은 화장실을 사용해 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간다. 
멧돼지 그룬처 박사는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는다. 
곰돌이 하르트도 씩씩하게 화장실 안으로 들어간다. 
화장실에 들어간 하르트. 정신을 집중해 힘을 줬는데도 똥은 커녕 오줌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화장실에서 나온 하르트는 자신이 볼일을 보지 못했다는 걸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



고슴도치 페터, 토끼 엘리노어, 여우, 사슴 아론, 부엉이 율리아나도 차례대로 화장실에 들어갔다. 
각각의 동물들은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유는 제각각이었다. 
하지만 동물들은 모두 자신들이 화장실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숨겼다. 
모두들 화장실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멧돼지 그룬처 박사는 다시 화장실을 사용해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파란 작은 집 안에서 볼일을 보는 것은 싫었던, 
다른 동물은 똥냄새에 섞여 돼지 똥 냄새가 나지 않을 것을 걱정한 그룬처 박사는 변기를 떼어 밖으로 들고 나가 숲 속 멧돼지 냄새가 나는 곳에 가서 뚜껑을 열고 시원하게 볼일을 본다. 

서로 다른 이유로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지 못했던 동물들의 그림을 보면서 조카가 떠오른다. 
언니와 내가 번갈아 가며 " 화장실에서 쉬해볼까? " 하고 물었을때 쉽지 않은 일이었을텐데, 네 했던, 
그렇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던 조카의 모습이 겹쳐진다.

멧돼지 그룬처 박사처럼 마음이 안정되고, 자신에게 맞는 장소를 찾아냈을때 비로소 성공할 수 있는 일을 왜 그렇게 강요하듯 하라고 시켰는지 모르겠다. 아니, 처음부터 " 숲 속에 사는 동물들에게 인간이 사용하는 화장실은 어울리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알아서 하게 될 일을 공원 관리인처럼 내가 불편해서,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동물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시켰는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입장에서, 아이의 입장에서 각각의 상황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알려주는 것 같다. 

어른들에게도, 아이에게도 큰 일이 되었을 배변 훈련의 시간. 
어른들에게는 인내를 배우는 시간이 되어주었다지만, 어쩌면 아이들에게는 즐겁지 않은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한참의 시간이 흘렀고, 조카는 천천히 시간이 흐른 후에 기저귀를 떼고, 자신의 화장실에서 쉬-를 하는데 성공했다. 
지금에 와서야 말하는 거지만, 좀 더 즐겁게, 강요되지 않은 상태로 조카가 '놀이'처럼 생각하게끔 유도하여 화장실에 가게 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숲 속의 동물들처럼, 자신의 일상을 바꾸는 일은 어른에게도, 아이에게도 분명, 힘든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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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터사이클 필로소피 - 손으로 생각하기
매튜 크로포드 지음, 정희은 옮김 / 이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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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까? 란 질문은 누구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인생 뭐 있어’ 하며 되는대로 사는게 인생이라고 하지만, 나는 좀 더 잘, 그리고 내 맘에 쏙들게 행복하게 살고 싶다. 아, 이것 역시 누구나 같은 마음일까?

요즘처럼 어떻게 살지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적이 없다. 그럴때 이 책이 나를 찾아왔다. <모터 사이클 필로소피>. 제목만 봐서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아래에 붙은 한마디가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

“ 가식과 허세로 가득 찬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라!!”

정말 맨 뒤에 느낌표가 하나가 아니라 두개 붙어 있다. 그만큼 강력하게 주장하는거겠지.

단순히 남부럽잖은 삶을 살기 위해 마지못해 대학에 가거나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할 필요는 없다. 어쩌다 대학에 간다 하더라도 방학 때마다 기술을 배워둬라. 하루 종일 사무실 칸막이 속에서 정보 시스템이나 낮은 수준의 ‘창조적 업무’를 감시하는 사람보다는 독립적인 기술자가 되는 편이 나쁜 영향도 덜 받고 돈도 더 잘 벌 가능성이 높다. 물론 이런 충고에 귀 기울이다보면 계속해서 반대 의견에 부딪힐 것이다. 이 충고는 다른 사람들이 의무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짜놓은 인생경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p68)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 문장들 안에 있다. 저자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싱크탱크의 연구소장으로 근무하고 있다가 오토바이 정비공으로 일하기 위해 그 곳을 뛰쳐나왔다.

보통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 도대체 왜? 미친거 아냐? ” 하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 뭐, 자기가 하고 싶은 일 하는게 제일이지..” 하고 생각한다.

<모터 사이클 필로소피>는 왜 저자가 오토바이 정비일을 하기로 했는지, 그리고 그 일이 어떤 의미인지를 이야기한다. 경제 위기가 한창인 지금, 그리고 앞으로는 자신처럼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더 좋은 삶을 살 것이라는 말과 함께.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는데, 이상하게 이 책은 후반부로 갈수록 지루해진다. 오토바이 정비일에 빗대어 누군가의 말을 인용하고, 무슨 법칙을 적용하고 그러는데,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 알겠는데요, 이해가 안돼요. 그리고 어차피 하고 싶은 말은 위의 문장들 아닌가요?

이런 생각이 책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또 하나 번역의 문제인지, 편집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타나 탈자가 많은 듯 하다.

“ 모든 학생을 대학에 몰아넣으면 노동 시장에 문제를 생긴다.” (p183)

뭐 이런 식으로 매끄럽지 않은 문장들이 종종 나타나 역시 몰입에 방해된다.

여하튼, 저자의 주장대로, 땀흘리는 노동이 인정받고, 숭배(?) 받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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