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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록(Rock) 밴드나 헤비메탈(Heavy Metal) 밴드 공연에 가 보면 이상한 모양의 손짓을 자주 볼 수 있다. 검지, 새끼손가락은 치켜세우고 나머지 엄지, 중지, 약지손가락은 굽혀 손바닥에 대는 모양의 손짓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해방”,“일탈”,“자유”라는 “록 정신(Rock Spirit)”이나 “놀아보자”라는 의미의 “Rock On"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또는 아무 의미 없는 손짓에 불과하다고 하는데, 일부에서는 치켜세운 검지와 새끼손가락이 사탄의 상징인 염소의 뿔을 의미하기 때문에 록과 헤비메탈은 악마의 음악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록과 헤비메탈의 직설적이고 강렬한 가사와 연주, 때로는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로 자극적인 퍼포먼스에 너무 과장되게 의미 부여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뭏튼 소, 염소, 사슴 등 동물에게는 흔하지만 사람에게는 찾아볼 수 없는 “뿔”을 악마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에게는 정말 뿔이 없을까?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머리에 뿔 난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뿔이 난 사람들 사진이 실려 있는 어느 블로그 글에서는 이웃 중국에는 고령층의 노인들 중에 뿔이 난 사람들의 사례가 여럿 있으며, 예멘에서는 102살 먹은 노인의 머리에 45cm가 넘는 큰 뿔이 달려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뿔이 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노화에 따른 피부 변형으로 여겨진다고 하며, 보기가 흉한 것 외에는 건강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하니 다행이다. 그런데 이런 노화나 피부 질환이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머리에 뿔이 자라나 있고, 사람들이 자신에게 속내(眞心)를 털어놓게 만드는 악마적인 능력이 생긴다면 과연 어떨까? 언뜻 허무맹랑하고 터무니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뭔가 기이하고 신비로우면서도 왠지 우스꽝스러운 일들이 벌어지지 않을까? 지금부터 소개할 “조 힐(Joe Hill)”의 <뿔(원제 Horns / 비채 / 2012년 8월)>이 바로 이런 상상을 활자로 담아낸 소설이다.
밤늦게까지 술을 진탕 마셔대고는 1년 전 애인인 “메린 윌리엄스”가 살해된 곳인 주물공장 너머 숲 속에 가서 누군가가 추모하기 위해 세워 둔 십자가와 성모상을 짓밟고 오줌까지 눠 버리는 온갖 추태를 부린 “이그”는 아침에 일어나 변기 앞에 놓인 세면대 거울을 보고 그만 움찔하고 만다. 관자놀이에 두 개의 뿔이 자라나 있는 것이 아닌가. 어제 밤에 한 짓 때문에 벌어진 자업자득이라고 생각한 이그는 같이 동거하고 있는 “글레나”에게 얘기해보지만, 글레나는 도넛만 먹어대며 자신의 친구인 “리”와 주차장 한복판에서 노골적인 애정행각을 벌였다고 횡설수설해대기만 한다. 그런 글레나를 뒤로 하고 머리에 난 뿔 때문에 병원에 가보지만 대기실 앞 접수원은 자신의 뿔은 아랑곳하지 않고 대기실에서 울부짖는 아이와 엄마를 심하게 욕해대고, 아이의 엄마나 진찰하는 의사와 간호사도 묻지도 않았는데도 자신의 불륜 행각이나 마약 복용 등 감히 남에게 밝힐 수 없는 속내들을 이그에게 술술 털어놓고 시시콜콜히 털어놓으며, 손끝만 스쳤는데도 과거의 행각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대로 머리에 떠오르는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사실 이그는 1년 전 메린을 살해한 범인으로 오해를 받아 구속까지 되었지만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었는데, 메린을 잃은 슬픔과 자신에 대한 따가운 눈총을 견디지 못해 어젯밤에 그렇게 과음하고 추태를 벌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마주치는 사람마다 자신이 메린을 죽였다고 대놓고 말하고, 심지어 자신의 무죄를 믿어줄 줄 알았던 할머니와 부모님마저 이그가 죽였을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가족들의 말에서 심한 배신감을 느낀 이그는 자신을 아끼고 사랑했던 형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듣게 된다. 메린이 죽던 날 밤 형은 그 현장에 있었으며, 범인의 정체가 다름 아닌 이그와 가장 가까운 “누구”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느날 갑자기 돋아난 두 개의 뿔의 악마적인 능력으로 메린의 죽음에 얽힌 비밀이 밝혀지고 이그는 메린이 죽었던 옛 주물공장 창고에서 범인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
어느날 아침에 일어나보니 머리에 두 개의 뿔이 갑작스레 자라나 있다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말미에 실린 옮긴이의 말에서 소개하는 것처럼 호러, 추리(스릴러), 판타지, 연애소설, 성장소설, 거기에 간간히 터져 나오는 유머에 이르기까지 대중소설의 모든 요소와 장점들이 잘 혼합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서두에 언급한 것처럼 악마의 상징인 “뿔”이 머리에 돋아나면서 주인공은 여러 가지 초자연적인 능력을 펼쳐 보이는 데, 사람들의 속내를 털어놓게 하고 신체 접촉만으로 과거의 일들을 알아내며, 태곳적부터 악마의 시종으로 잘 알려진 “뱀” -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를 유혹했던 악마가 바로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 들을 불러 모으고, 역시나 악마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인 “불(火)”에 휩싸여서도 어디 한 곳 화상 하나 입지 않고 입었던 상처마저 깔끔하게 치유되는 능력을 선보인다. 즉 앞서 록 공연에서의 손짓은 오해이겠지만 여기서 뿔은 악마의 상징, 그 자체인 셈이다. 작가는 이런 호러와 판타지 소설적 요소를 주요 뼈대로 하되, 주인공의 애인인 메린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밝혀내는 추리 소설적 요소와 이그와 메린, 리의 첫 만남과 성장과정, 그리고 가슴 아픈 사랑을 그린 성장소설과 연애소설적 요소를 가미하고, 주인공에게 자신의 비밀을 술술 털어놓는 주변 인물들의 장면들에서는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질 정도의 유머까지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요소들을 억지로 끌어 맞추다 보면 요소들끼리 겉돌아서 이야기가 들 떠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전혀 그런 억지스러움과 부조화를 느끼지 못했을 정도로 각 요소들과 이야기를 절묘하게 융합시켜 여느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참 독특하고 이색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개인적으로 이런 독특함 하면 떠오르는 작가가 바로 공포소설의 제왕 “스티븐 킹”인데 아니나 다를까 작가 “조 힐”이 바로 스티븐 킹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미리 알고 읽은 것이 아니라 다 읽고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작가 소개글을 보고 알게 되었는데, 읽으면서 어딘지 모르게 스티븐 킹 소설과 닮았구나 하고 생각했던 내 느낌이 그대로 맞아 떨어져 마치 반전(反轉)을 맛보는 것처럼 놀라고야 말았다. 작가는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조 힐이라는 필명으로 활동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런 작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버지 이름을 떠올리게 만드는 독특한 소재와 상상력 만큼은 결코 감출 수 없었던 것 같다.
책은 500 여 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술술 읽히는 재미있는 책인데 아쉬운 점도 없지 않다. 우선 이 책의 가장 큰 소재인 “뿔”의 초자연적인 능력이 기대했던 것 보다는 밋밋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주인공이 각성(覺性)하면서 점점 능력이 커지기는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정도의 능력에 그치고 말고, 특히 범인과의 마지막 대결 장면에서는 오컬트(Occult) 영화에서 볼 법한 불가사의하고 공포스러운 위력을 발휘해주기를 기대했지만 실소를 자아낼 정도로 영 싱겁게만 느껴졌다. 이왕 사실성을 버린 판타지적인 설정이었다면 악마적인 능력으로써 뭔가 좀 더 거창하고 치명적인 능력을 선보였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에 뿔이 돋아난 현재와 주인공들이 처음 만났던 청소년 시절, 메린이 죽던 날의 상황 등 빈번한 시점 변환 등은 각각의 상황과 내막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는 효과가 있지만 몰입을 방해하는 면도 없지 않았다. 그리고 모든 갈등이 막을 내리고 이제 악마가 되어 버린 주인공이 사라져 버리는 결말 또한 불명확하고 모호하게 느껴져 아쉬움이 남았다. 선한 품성과 함께 마음 속 깊이 잠재되어 있는 악마성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본질과 진정한 사랑의 의미 등 이 책의 주제 의식들도 책의 재미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들이라 하나하나 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지만 그랬다가는 글이 쓸데 없이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이 글에서는 굳이 언급하지 않겠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이런 주제의식들을 제대로 평가할 능력이 없다는 게 맞겠지만 말이다^^
아쉬운 점이 없진 않지만 독특하고 이색적인 소재, 대중 소설의 재미와 장점들의 적절하고 절묘한 조화, 극적인 이야기 전개와 결말 등 이 책, 분명 단점보다 장점이 훨씬 많은 재미있는 책이다. 요즈음 스티븐 킹이 전성기 때만큼은 못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아쉽게까지 느껴지는데, 이제 아들이 이 정도 성취와 재미를 선보이고 있다니 한때 스티븐 킹 식 공포와 상상력에 푹 빠졌었던 나로써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재미 면에서는 분명 훌륭하지만 약간은 아쉬운 점도 있어 별점을 어떻게 평가할 까 살짝 망설였는데 아버지를 능가하는 조 힐 만의 공포와 재미를 선보일 그의 미래에 대한 기대 때문에 기꺼이 별 다섯개 만점을 준다 . 작가 이력을 보니 이미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에 올린 작품도 여럿인 작가의 미래를 위한다니 영 멋쩍기만 하지만^^ 아뭏튼 조 힐, 분명 이름을 기억해 둘 작가 임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