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전드 레전드 시리즈 1
마리 루 지음, 이지수 옮김 / 북폴리오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소설과 영화로만 본다면 우리 미래는 “반드시” 암울할 것이다. 핵전쟁은 "반드시" 일어나 수십억 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온 세상을 방사능과 잿빛 먼지로 뒤덮을 것이고, 지진, 화산폭발, 쓰나미, 지각 변동 등 전(全) 지구적 천재지변(天災地變)은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런 일들이 일어날 확률이 전혀 없을 것이라는 과학자의 예견이 있다하더라도 절대 안심하지 말기를. 왜냐하면 외계인의 침입이나 로봇들의 반란이 그런 재앙을 “반드시”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재앙 이후 지구에는 민주주의가 자취를 감춰버리고 최첨단 기술로 로 국민들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강력한 독재국가가 “반드시” 출현할 것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청소년들은 참 불쌍하기 이를 데 없다. 소년소녀들은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국가가 정해준 반려자와 강제로 결혼해야 하며, 지금의 대학입시는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정도로 어렵기 그지없는 국가공인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일생을 노예로 살거나 또는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어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역시 청소년은 미래의 기둥이라고 했던가. 저항 한번 못하고 죽어 버리는 어른들 대신 미남 미녀에 천부적인 운동신경을 갖춘 청소년들이 강압 통치에 반기를 들어 혁명(革命)을 “반드시” 일으킬 것이다. 무슨 “노스트라다무스” 같은 미래 예언 쯤으로 들릴 수 도 있겠지만 최근 들어 “디스토피아(Distopia)적 미래를 그린 청소년용(YA; Young Adult) 판타지 소설들을 읽은 분들이라면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저 범주(範疇)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몇 권 읽다 보면 비슷비슷한 설정과 스토리로 금세 식상하게 되기 일쑤이다. 그렇다고 모든 작품을 도매급으로 매도하기에는 너무 성급한 판단일 것 같다. 탄탄하고 치밀한 구성과 이야기 전개, 롤러코스터(Roller Coaster)를 타는 듯한 아찔하고 짜릿한 재미와 스릴을 선사하는 “주옥(珠玉)” 같은 소설들도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작품이 소설과 영화로 크게 성공한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 시리즈라고 할 수 있겠다. 워낙 독보적인 작품이다 보니 이후 출간된 작품들은 종종 이 <헝거 게임>에 비교 당하곤 하는데, 대부분 <헝거 게임> 보다 못하다는 평가와 함께 금세 잊혀지는 비운(悲運)(?)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번에 스릴과 재미 면에서 <헝거 게임>과 비교해 봐도 좋을 만한 소설을 만났다. 바로 “마리 루”의 <레전드(원제 Legend / 북폴리오 / 2012년 8월)>가 그 책이다.

 

(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시대를 알 수 없는 어느 미래, 한 때 세계경찰국가를 자처하던 미국은 멸망해 버리고 여러 국가로 나뉘어 버린다 - 책에는 정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 그 중 로스엔젤레스를 중심으로 한 나라인 “리퍼블릭”은 전 국민이 열 살이 되면 “트라이얼”이라는 국가공인시험을 치러 그 점수에 따라 신분이 나뉘는 독재 국가이다. 이 시험에서 첫 만점을 기록했던 15세 영재 소녀 “준”은 이 나라 최고의 대학인 “드레이크”에서 교육을 받고 있는데, 학과 성적은 항상 탑을 달리지만 말썽을 곧잘 피워 오빠이자 군인인 “메이셔스” 대위는 종종 학교로 불려오곤 한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오빠와 단 둘이서 살고 있는 준은 자신을 아버지처럼 자상하게 돌봐주는 오빠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그런데 그런 오빠가 병원 근무 중에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범인은 바로 리퍼블릭 최고의 현상 수배범으로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 이자 자신과 동갑인 15세 소년 “데이”이란 것이다. 준은 대학을 조기 졸업하고 군대에 입대하여 데이를 잡기 위해 빈민가로 위장 잠입하여 마침내 준 일행을 만나게 된다. 복수심과 증오로 불타오르던 준은 막상 데이를 만나자 마음이 흔들려 버린다. 전염병에 걸린 동생과 그 때문에 고생하고 있는 형과 어머니를 위해 애쓰고 있는 데이의 처지가 자신과 그리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 싸구려 와인 탓인지 데이와 키스까지 하면서 애정이 싹터 버리지만 결국 준은 데이를 함정에 빠뜨려 그를 체포한다. 체포과정에서 어머니가 죽는 불행한 일도 벌어졌지만 데이는 그래도 준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준에게 자신은 준의 오빠를 죽이지 않았다고, 그리고 빈민가에 창궐하고 있는 전염병에는 리퍼블릭의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준은 그런 데이의 주장을 변명으로 여기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는 생각에 사고 당시 슬픔에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던 오빠의 시신 사진과 오빠가 남긴 일기장을 꼼꼼히 들여다보는 데,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시신의 상처도 그렇고 일기장에는 오빠가 의도적으로 남긴 수수께끼가 있었던 것이다. 오빠가 남긴 수수께끼를 푼 준은 오빠가 자신에게 남긴 비밀 메시지를 읽고는 마침내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된다.

 

이처럼 설정과 줄거리, 그리고 소년소녀라는 주인공만 놓고 보면 앞에서 언급한 범주에 모두 부합되는, 어쩌면 식상할 수 도 있는 그런 이야기이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 책을 받고서는 그동안 읽었던 여느 소설들과 다를 바 없겠지, 거기에 <헝거 게임>과 유사한 책 표지 문양이라니 기껏해야 <헝거 게임>의 아류(亞流)에 불과하겠구나 하는 마음에 별 기대 없이 - 정확히는 실망할 준비를 미리 하고 재미없으면 중도에 읽다 말 생각까지 하고-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기대 이상으로 재미가 있지 아닌가. <헝거 게임>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여러모로 다른 재미와 스릴이 느껴져 책 읽는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결국 마지막 페이지까지 내처 읽고야 말았다. 그렇다면 이 책 만의 재미와 스릴은 과연 무엇일까?

 

우선 추리소설적인 이야기 전개를 들 수 있겠다. 책에서 주요 사건은 주인공 “준”의 오빠인 “메이셔스” 대위의 죽음과 또 다른 주인공 “데이”의 동생이 앓고 있는 전염병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단순한 살인 사건과 그저 흔한 전염병 인줄 알았던 두 사건은 중반 이후 그 속에 감춰진 비밀이 드러나는데, 오빠의 시신을 찍은 사진 몇 장 - 그것도 상처 부위가 잘 드러나지 않도록 각도를 왜곡하여 찍은 사진들 - 과 오빠의 일기장에 남긴 수수께끼 - 오빠를 잘 아는 준만 발견할 수 있을 정도로 교묘하게 숨겨놓은 -, 그리고 데이가 우연찮게 발견했지만 그냥 지나쳐버린 이상한 시설물 등의 단서를 통해 감춰진 비밀들이 그 베일을 벗고, 전혀 별개의 사건인 줄 알았던 두 사건이 하나의 접점에서 만난다는 결말이 마치 추리소설을 읽듯이 흥미진진하고 재미있다. 두 번째는 서로 다른 처지에 있지만 그 누구보다도 닮아 있는 두 남녀 주인공의 운명적인 만남과 서로에 대한 이끌림, 오해, 화해, 그리고 사랑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언뜻 로미오와 줄리엣 식 식상한 관계 설정으로 볼 수 있지만 만남과 갈등, 사랑에 이르는 두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진행 과정이 꽤나 치밀하고 섬세하게 그려져 있어 감정이입과 공감을 불러일으키게 만든다. 이런 로맨스 판타지 소설 자체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고 특히 남녀 주인공의 로맨스에 종종 손발이 오그라들고 하는 그런 중년의 남성인 내가 읽어도 유치하게 느껴지지 않고 이런 식의 청춘남녀의 만남과 사랑도 꽤나 매력적이겠구나 할 정도라면 적어도 나에게만은 성공했다고 봐도 좋지 않을까? 물론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말이다^^ 책의 부제인 "두 개의 심장 하나의 불꽃"이라는 문구가 딱 어울리는 그런 로맨스였다고 생각된다.

 

여기에 데이가 체포되었다가 사형 집행 바로 전에 탈출해서 준과 함께 하는 일련의 과정 - 강력한 스포일러가 될 수 있겠지만 이 책이 시리즈 첫 번째 권이니 주인공이 제대로 사랑 한 번 못해 보고 첫 권에서 허무하게 죽어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나 다 할 수 있기에 그냥 결말을 써 본다^^ - 들이 여느 스릴러 액션 소설 못지 않게 박진감 넘치게 그려져 있어 눈길을 잡아끌게 만든다. 물론 다른 소설들도 이런 면들이 없진 않지만 작가의 결코 녹록치 않은 이야기 구성력과 글솜씨가 전혀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요리에서 같은 식재료와 조미료라고 하더라도 요리사의 솜씨에 따라 전혀 다른 맛과 모양의 요리가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은 그런 같은 재료와 조미료로 만들었기에 모양은 비슷할 지 모르지만 그 맛은 훨씬 뛰어난 그런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역시 이 책에서도 미래 사회를 빗대서 현대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꼬집고 있다는 메시지를 끌어내 볼 수 있지만 애써 주제의식을 찾아보려고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책 자체의 재미만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과 기존 사회 질서와의 본격적인 갈등이 시작될 2권과 <트와일라잇> 시리즈 제작진이 제작한다는 영화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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