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8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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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에 이런 말이 나온다.

 

"주인공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이야기에서 가장 사랑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사랑할 만한 사람'인가는 다들 생각이 다르겠지만, 나는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매력이란 그가 자신의 한계를 온몸으로 껴안는 행동을 할 때, 그걸 지켜보는 사람(작가나 독자)의 내부에서 저절로 일어나는 공감의 감정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장을 읽으면서 지난 달에 읽은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 그에게 퓰리처 상(1953)과 노벨문학상(1954)을 안겨준 작품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 노인이 생각 났다. '자신의 한계를 온몸으로 껴안는' 다는 표현은 바로 산티아고 노인이며 이런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쿠바 멕시코 만류에서 고기를 잡으며 생계를 이어가는 노인 산티아고. 고기를 못 잡은지 84일 째, 같이 고기를 잡던 소년 마놀린도 부모의 만류로 떠나고 홀로 남은 그는 85일 째 되던 날 행운을 비는 마놀린의 배웅을 받으며 넓은 바다로 나간다. 운이 통했는지 첫 날 거대한 청새치가 낚시줄에 걸리고 노인은 망망대해 한 복판에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잡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상어떼에게 습격을 당하고 청새치는 뼈만 남게 되어 돌아온다.

 

드넓은 바다 위 조그만 배안에 홀로 있는 노인을 보며 나 또한 아니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라는 바다 위에서 외로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인은 혼자 배를 타면서부터 혼잣말을 하게 된다. "이번에는 미끼를 물 테지. 하느님, 그놈이 제발 먹게 해 주십시오!" 라며 고기가 잡히길 강렬히 열망한다. "그 애가 옆에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를 도와줄 수도 있고, 이걸 구경할 수도 있을 텐데." 라며 청새치와의 고독한 싸움에 소년이 함께 해주길 바란다. '늙어서는 어느 누구도 혼자 있어서는 안 돼' 라고 생각하며 늙은 자신에게 연민도 느낀다. '차라리 어부가 되지 말걸 그랬나 보다' 하며 후회하는 모습도 보이지만 어부가 되는게 자신의 운명임을 알고 힘을 내기 위해 다랑어를 먹는다. 육체의 고통 앞에서 '넌 언제까지라도 영원히 저놈과 싸울 수가 있어. 자, 지금 다랑어를 먹어 두자' 며 끊임없이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는 말을 한다. 순간순간을 끊임없이 긍정하며 자신의 할 일을 하려는 노인의 모습이 나에게는 강인하고 아름다운 한 인간을 보는 것 같았다.

 

한 때는 잘나가던 어부였으나 현재는 운이 다한 늙은 어부인 산티아고. 그는 왜 먼 바다까지 나와 이런 고생을 하는 것일까...

 

p.67

난 녀석에게 인간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참고 견뎌 낼 수 있는지 보여 줘야겠어.

"나는 그 아이한테 내가 별난 늙은이라고 말했지. 지금이야말로 그 말을 입증해 보일 때야" 그가 말했다.

 

노인은 자신의 어부로서의 정체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어한다. 그는 지금까지 그런 입증을 수천 번 해 보였지만 그런 영광은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안다.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할 뿐 과거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소년에게 자신이 '별난 늙은이' 임을 보여줌으로써 소년의 믿음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너무나 유명한 이 말은 바로 이런 노인의 정신을 보여준다. 인간은 언젠가는 죽기에 파괴당할 수는 있겠지만, 살아있는 순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그 정신만큼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노인은 알고 있고 그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인간 정신의 숭고함과 함께 아름다운 것은 함께 나누고 의지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까마득한 바다에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순간마다 소년을 그리워한 노인과 그런 노인을 누구보다 존경하고 믿는 소년. 바다에서 외롭게 혼잣말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대화를 나눌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에 노인은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육지로 돌아왔을 때 노인과 소년이 나눈 대화는 마음을 울린다.

 

p.125

"사람들이 나를 찾았니?"

"물론이죠. 해안 경비대랑 비행기까지 동원됐어요."

"바다는 엄청나게 넓고 배는 작으니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을 테지." 노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가 아닌, 이렇게 말 상대가 될 누군가가 있다는 게 얼마나 반가운지 새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단다. 그런데 넌 뭘 잡았니?" 노인이 물었다.

"첫날에는 한 마리 잡았고요, 이튿날에도  한 마리, 그리고 셋째 날엔 두 마리나 잡았어요."

"아주 잘했구나."

"이젠 할아버지하고 같이 나가서 잡기로 해요."

"그건 안 돼. 내겐 운이 없어. 운이 다했거든."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운은 제가 갖고 가면 되잖아요." 소년이 대꾸했다.

 

단순히 큰 물고기를 잡는 것이 목적이 아닌 자신을 극복해 내는 그 과정이 노인에게는 중요하다. 비록 노인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빈 손으로 돌아왔지만 떠나기 전의 노인과 돌아온 후의 노인은 분명 다른 사람일 것이다. 노인은 분명 평생을 이런 신념으로 살아왔을 것이다. 곁에는 그런 노인을 믿고 존경하는 소년이 있다.

 

앙상한 뼈를 드러낸채 배에 묶여 있는 청새치는 노인이 바다에서 무엇을 했고, 어떤 시련을 견뎌냈는지 보여주는 빛나는 상징이다.

자신의 운명에 당당히 맞서 그 '한계를 온몸으로 껴안는' 산티아고를 보며 그의 말처럼 '하루하루가 새로운 날'임을 마음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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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7-05 10: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산티아고 노인 정말 좋아해요. 바다에서 싸우고 터덜터덜 돌아와서 뼈만 남은 청새치와 함께 돌아온 노인이 모습... 그리고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라는 말... <노인과 바다>는 어릴 때 읽었을 땐 이게 뭐야 싶었는데, 나이 들어 다시 읽으니 헤밍웨이 최고작으로 꼽힐 만 한 작품이에요. 정말.

coolcat329 2019-07-05 12:20   좋아요 0 | URL
네, 20대들은 ‘이게 뭐야?!‘ 할 수도 있을거 같아요. 나이가 들어서 좋은점도 있네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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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풍부한 사유를 하게 만드는 책이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 중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답은 없다. 그저 인간은 이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인간실존에 대한 고민을 4명의 남녀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실험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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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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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보잘 것 없는 무의미해 보이는 것들이 지니고 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

 

그 유명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안 읽고-요즘 읽고 있다- 처음 만난 쿤데라의 작품이다. 그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삶의 가벼움, 하찮음, 무의미함에 대한 생각이 응축된 시집같은 책이다. 지금까지 읽어왔던 리얼리즘 소설과는 다른 특이하면서도 매우 지적인, 철학적 사유를 담은 책이란 생각이 든다. 어렵다면 어려운 소설이겠으나 술술 잘 읽히기는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거의 다 읽었는데, 온전히 이해하기엔 어려운 책이란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술술 읽힌다. 그에 비하면 이 작품은 가벼운 느낌이지만, 독서 토론에서 다룬다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적어도 나에겐 그런 경험이 필요한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쿤데라는 삶의 가벼움에 대해 이야기 하지만 그의 작품을 처음 접한 나는 머리가 무거워 힘들다.

 

쿤데라가 85세에 쓴 작품으로 어쩌면 그의 유작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데, 85세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나로서는 그저 바라볼 뿐이다.

 

인상적인 구절을 적어본다.

 

p.58

"맞아. 사과하지 말아야 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사람들이 모두 빠짐없이, 쓸데없이, 지나치게, 괜히, 서로 사과하는 세상, 사과로 서로를 뒤덮어 버리는 세상이 더 좋을 것 같아."

 

p.147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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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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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월 나의 생일을 자축하며 나에게 선물한 책이다.

필기체로 멋스럽게 적혀있는 제목과 골드카키빛 표지에 그려져 있는 여러모양의 나뭇잎들, 평화로운 작은 마을을 검은 실루엣으로 표현한 띠지를 두른 이 책은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책을 읽고 나서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이젠 <올리브 키터리지>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메인 주 바닷가 마을 크로스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13편의 이야기를 연작 형식으로 담고 있다.

주인공 올리브 키터리지는 학교에서 수학을 가르치고 정년퇴임한 74세의 여인이다. 남편 헨리의 말에 따르면 단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사람, 아들 크리스토퍼는 올리브에게 편집증적이며 너무 화를 많이 내고, 주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고 한다. 성질이 불같은 엄마를 더이상 참기 힘들다며 "이젠 엄마에 대한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을 거에요."(<불안>) 라며 흥분한 올리브 앞에서 너무나도 침착하게 말을 한다.

 

이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녀는 친절함과는 거리가 멀고 무뚝뚝하며 늘 자신은 옳고 타인은 문제가 있다는 식으로 세상을 대한다. 거구의 몸에 발사이즈는 275, 화난 듯한 얼굴에 "젠장","빌어먹을","염병할","우라질" "닥쳐" 같은 거친 말들도 서슴없이 하는 '쎈'여인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살로 마음 속에 상처를 지니고 있는 여린 여인이기도 하다.

 

13편의 단편은 올리브를 중심으로 하는 주변 이웃 주민들의 이야기이다.

따뜻한 심성을 지닌 올리브의 남편 헨리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각각의 단편들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을 하나하나 칼로 도려내듯 날카롭게 보여준다.

 

끔찍하게 자살한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한 때 올리브의 제자였던 케빈(<밀물>). 엄마의 그늘에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피아니스트 앤지 오미라(<피아노 연주자>). 거식증이 걸린 소녀를 도와주는 과정에서 사랑과 관심에 굶주린 자신과 마주치는 하먼(<굶주림>). 모든 것을 함께 했다고 믿었던 남편이 죽은 후 알게 된 진실과 그로 인한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끼는 말린(<여행 바구니>) 등 멀리서는 안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각자 짊어져야 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풍성하게 보여준다.

 

이런 다양한 사람들 사이에서 주인공 올리브도 힘겹긴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아들 크리스토퍼와의 갈등, 남편 헨리와의 냉랭한 관계, 잘난 박사 며느리를 보며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 헨리가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혼자가 된 상황 등 겉은 씩씩해 보이지만 속은 여린 그녀도 일상의 슬픔과 외로움을 견뎌내는 것이 버겁다.

 

<튤립>에서 남편 헨리가 갑자기 뇌줄중으로 쓰러지고 올리브는 혼자가 된다. 매일 요양원에 가서 헨리에게 그날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는 올리브. 혼자 있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람들과 있는건 더 견디기 힘든 현실. 의지할 곳은 아들 뿐인데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크리스의 목소리는 늘 어딘가 쌀쌀맞고 올리브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한다.

"크리스토퍼, 내가 어쨌기에 네가 날 이렇게 대한단 말이니."

크리스와 전화를 끊고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식탁에 무너지듯 앉아 스스로 내뱉는 말이다.

이 상황이 난 너무 슬펐다. 왜냐면 나도 가끔은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하기 때문이다. 늙어서 자식도 떠나고 혼자가 된다는 상상을 하면서 막연히 그 오지도 않은 외로움에 몸서리를 치곤했는데, 이렇게 글로 마주하니 그 상황이 너무 서글프게 다가왔다.

 

내가 가장 재밌게 읽은 이야기는 마지막 <강>이었다.

매일 아침 하는 강변 산책 도중 쓰러져 있던 잭 케니슨을 발견하는 올리브. 그녀가 평소 재수없다고 여기던 잭 케니슨과의 만남이 그녀의 일상에 특별함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p.466 <강>

둘 다 말을 하고 들어줄 말동무가 필요한 듯했고, 그렇게 했다. 그들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리고 좀 더 들었다. 

 

 

서로 말하며 듣고 또 말하며 듣는 그 훈훈한 공기가 나에게 훅 들어와 벅찬 감동에 두 눈을 감게 만들었다. 노년의 혼자가 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유일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축복과도 같은 것.

 

이야기가 끝나가는 마지막 장은 다 쓰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p.483 <강>

젊은 사람들은 모르지, 이 남자의 곁에 누우며, 그의 손을, 팔을 어깨에 느끼며 올리브는 생각했다.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이제 올리브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이 누군가를 간절히 원하고 서로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안다. 헨리에게 이런 소중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하루하루 낭비한 지난 나날이 너무나 후회스럽다. 하지만 남은 인생에 '언젠가'는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 얼마나 용기와 위로를 주는 결말인가...

 

p.484 <강>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한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 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직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많이 지치고 늙었지만 세상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사랑이라는 감정에 자신을 내맡긴 올리브. 첫 이야기 <약국>에서의 올리브와 마지막 <강>에서의 올리브는 얼마나 다른가. 사랑스럽고 따뜻한 여인 올리브...너무나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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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위화 지음, 백원담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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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작가 위화가 1993년 발표, 장이머우 감독이 영화로도 만들어 칸 영화제 심사의원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작년에 읽고 싶어서 중고서점 갈 때마다 찾았으나 가격이 중고가 아니라 안사고 버티다 지난 주 종로에 빈대떡 먹으러 갔다가 우연히 들린 종로책방에서 3500원의 이 책을 발견! 은희경의 <새의 선물>과 함께-역시 3500원- 기분 좋게 들고 나왔다.

 

그날 밤 남편이 어쩌다 이 책을 먼저 읽게 되었는데, 갑자기 "아...어쩌냐..." 하면서 너무나도 슬프게 우는것이 아닌가...다 읽고 나서도 책을 어루만지며 그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에 난 책을 읽기도 전에 그 아픔과 슬픔이 고스란히 전달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민요를 수집하는 어떤 사람이 우연히 푸구이라는 노인을 만나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 푸구이는 부유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부인(자전)과 딸(펑샤) 그리고 뱃속에 아이(유칭)까지 있지만 노름에 빠져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집과 땅을 다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전락하게 된다. 불행은 이어서 온다고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픈 어머니를 위해 의원을 부르러 성안으로 갔다가 얼떨결에 국민당 군대에 강제로 징집이 된다. 2년 동안 전쟁터를 누비다 해방을 맞아 구사일생으로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고 딸 펑샤는 벙어리가 되어 있다. 힘들게 집에 돌아온 푸구이는 그날 밤 자전과 두 아이를 쓰다듬으며 자신에게 말한다. "나는 집에 돌아온 거야."

 

소중한 가족을 보며 제대로 살아보려는 푸구이 앞에 그 시대는 기가막히게 다가온다.

정권을 장악한 공산당의 토지개혁, 1958년 시작된 마오의 대약진운동으로 수천만의 인민이 굶어죽게 되고 푸구이의 착한 아내 자전도 구루병에 걸리게 된다. 한창 커야할 나이인 아들 유칭은 물로 배를 채우고 딸 펑샤는 유칭의 학비 때문에 남의 집으로 이미 보내진 상태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약해진 권력을 다시 잡기 위해 마오는 청년들을 선동, 문화대혁명을 일으킨다. 마오의 사상에 세뇌된 홍위병들이 정치인,지식인,예술인들을 학살하고 매일같이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런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아무 힘도 없는 한 사람이 견뎌내야 하는 삶이란 감히 상상이 가질 않는다.

 

얼마전 본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의 대사가 떠오른다.

 

"제일 좋은 계획은 무계획이야. 인생은 계획대로 안되거든. 계획은 세워봤자 틀어지기만 해. 계획이 없으면 틀어질 일도 없고. 무슨 일이 닥쳐도 아무렇지 않지."

 

너무나 고달픈 삶과 운명 앞에서 인간이 세우는 계획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가. 노름에 빠져 집안을 몰락시키고 나서야 자신의 가정으로 돌아온 푸구이. 착한 아내와 이쁜 자식들을 보면서 "앞으로는 제대로 살아야지" 다짐을 한 푸구이. 그러나 인생이란 이런 아주 작은 바람조차도 무참히 꺽을 수 있는 칼같은 것임을 광기로 얼룩진 중국의 현대사 속의 푸구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 책은 보여준다.

 

푸구이가 겪는 비극을 더이상 쓰지 않겠다. 그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남편은 많이 울었지만 난 울지는 않았다. 아마도 세상을 초월한 듯 물 흐르듯이 들려주는 푸구이의 이야기가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인듯 하다.

 

모두가 떠나고 홀로 남은 푸구이.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늙은 소를 사서 푸구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또 살아간다. 노래를 부르면서...

 

어린 시절엔 빈둥거리며 놀고,

중년에는 숨어 살려고만 하더니,

노년에는 중이 되었네.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 목적이 없는 듯 하지만 한 발 한 발 내딛는 발걸음 속에 위대함을 품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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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06-08 1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로책방 갑입니다. 중고 모서점 더 상 중고가격이 아니니... 인생 정말 걸작입니다.

coolcat329 2019-06-08 11:54   좋아요 0 | URL
제가 레삭매냐님 덕분에 종로책방 알게된 걸로 기억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