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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의 걸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1월
평점 :
발자크는 평생 돈과 귀족으로의 신분상승을 간절히 원했다. 한 번에 큰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사업을 하고 망하기를 반복, 결국엔 빚더미에 허덕이며 자신을 조그마한 작업실에 가두고 하루 18시간, 50잔의 커피를 목구멍으로 부어가며 글을 썼다.
자신의 빚을 갚아주고 신분상승을 이뤄줄 여인을 찾다 마침내 10년의 구애끝에 우크라이나 대부호 귀족 한스카 부인과 결혼에 성공하나 '정말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결혼 후 5달 만에 앓던 병이 악화되어 생을 마감한다.
평민의 아들로 태어나 너무나 귀족이 되고 싶어 자신의 성 앞에 귀족을 뜻하는 '드(de)'를 붙여 오노레 '드' 발자크가 된 사람.
그가 귀족이 아님은 출생기록에 분명히 드러나 있고 프랑스 어떤 왕도 그의 집안에 귀족칭호를 내리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를 오노레 '드' 발자크라 부르지 오노레 발싸(그의 본명)라고 부르지 않는다. 츠바이크는 이를 두고 '문학은 여전히 역사보다 위에 있다'고 말한다.
평생 욕망을 좇아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불태운 발자크.
츠바이크는 발자크 평전에서 '<미지의 걸작>은 가장 순수한, 알려지지 않은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책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두 작품 다 인간의 욕망을 다루고 있다.
첫번 째 작품 <영생의 묘약>은 오늘날 엽기적 바람둥이의 대명사인 돈 후안을 주인공으로 한다.돈 후안은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전설속의 인물로 이 작품에서는 그의 여성편력이 아닌 영원한 삶을 향한 인간의 또 다른 욕망을 보여준다.
두번 째 작품이자 표제작이기도 한 <미지의 걸작>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걸작을 만들기 위해 광증에 사로잡힌 노화가, 프렌호퍼의 이야기이다.
발자크의 해박한 미술지식이 절대미를 갖춘 걸작을 욕망하는 또 한명의 인간과 함께 펼쳐진다.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통사법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언어적 실수를 범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아! (p.77)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네! 자네는 비루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야. (...)우리는 사물과 존재들의 정신과 영혼, 인상(人相)을 표착해야 하네. 그래, 효과! 효과를! 하지만 효과는 생명의 부수적 사건이지, 생명 자체는 아니야." (p.82)
"자네들은 여자를 그리지만 그녀를 보지는 못해! (...)자네들의 손은 스승의 작품에서 베꼈던 모델에 대해 사유하지 않은 채 그것을 재현할 뿐이지." (p.83)
프렌호퍼는 대상을 재현하되 거기에 공간과 깊이가 있어야 하며 더 나아가 그림 속에 흐르는 공기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아름다움은 쉽게 얻는 것이 아니라 긴 고통의 시간 속에서 얻을 수 있으며, 겉모습만을 재현한 그림은 영혼의 충만함을 표현하지 못한다며 당대 주류 미술을 비판한다.
그가 10년에 걸쳐 그려온 작품 <카트린 레스코>. 그에게 카트린은 연인이자 딸이며 자신이 창조한 창조물이다. 자신은 영혼이 있는 하나의 생명을 창조한 창조주인 것이다. 그런 카트린을 남에게 보여준다는 것은 그에게 매춘행위나 다름 없는 것이며, 만약에 누군가가 그녀를 보게 된다면 그 자를 죽여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타인의 시선만으로도 더럽혀졌다고 느껴질만큼 신성한 카트린. 그 그림은 과연 어떤 것일까...소설 속 프렌호퍼를 숭배하는 두 화가 푸생과 포르뷔스는 그의 필생의 걸작을 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프렌호퍼는 자신이 구현한 이런 '완결무결한 여자'를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오! 한순간만이라도, 단 한 번 만이라도 그 신성하고 충만한 실물을, 그 이상적 존재를 볼 수 있다면, 나의' 재산 전부를 바칠 걸세. 천상의 아름다움이여, 나는 그대를 찾으러 그대의 고성소(古聖所)까지 가리라." (p.104)
예술을 향한 무한한 열정과 생각으로 자신만의 절대 뮤즈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실제로 만나보고 싶어하는 프렌호퍼. 이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그의 말대로 이런 여인이 '어디에 살아 있단 말인가?' 그의 관념 속에서 절대적으로 완벽하게 만들어진 여인을 현실에서 만나기를 갈구하는 화가를 보며 현실과 예술사이에서 고뇌하는 예술가의 모습이 보인다.
카트린 레스코, 푸생과 포르뷔스는 마침내 이 걸작과 만난다. 과연 영혼과 생명력이 넘쳐나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깊이있는 작품일까?
이 중편의 두 작품은 발자크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욕망'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전설적인 돈 후앙이라는 인물과 16~17세기 회화미술을 다뤘다는 점에서 예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이 풍기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편력으로 유명한 돈 후앙을 영원한 삶을 꿈꾸는 인물로 그린 점이 흥미로웠고, 예술가에게서 볼 수 있는 '광기의 본성'을 발자크의 화려한 입담으로 그러나 장황하지 않게 보여준 점이 좋았다.